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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보면 광암리 가) 운암마을 광암리는 용천사로부터 2km 아래에 위치하며/ 운암y 광동/ 가정 등 3개 마 을이 있다. 이 중 운암마을은 광암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수복 직후에는 70 여 호의 주민이 거주하였다. 1950년 12월 빨치산 토벌작전을 앞두고 군경이 주민들에게 소개명령을 내리자 광암리 주민들은 대창리 성대y 금덕리 문장 등으로 피 난을 나갔다.53) 그러나 광암리에서 대창리 성대로 소개 나갔던 주민이 1950년 12월 31일 국군의 총격으로 희생되는 등 주변이 불안하자 1951년 설 무렵인 1951년 2 월 초에는 주민 대부분이 마을로 되돌아와 있었다.54) 국군은 불갑산 대보름작전을 2월 20일 동틀 무렵 한평군 신광면 방향에서 용천사를 향하여 포 공격을 하면서 시작하였다. 영광군 불갑면 안맹리를 출 발한 제20연대 중포중대가 빨치산사령부가 았던 용천사에 공격을 하였고y 뒤 이어 7중대도 산내리 뒷산에서 용천사를 포위하며 총격을 가하였다.55) 당시 상황에 대하여 광암리 운암마을에 살았던 장재수(당시 15세)의 진술이다. "작전 당일 동이 틀 무렵 광암리 앞 신광 쪽 길목에서 처음 총소리가 들렸고 뒤 이어 대각리 앞산 석랑/ 용천사 앞 쪽으로 계속 이어졌습니다. 총소리가 나자 피난민들은 처음에는 운암마을 뒷산으로 밀려갔고/ 군인들은 산내리와 대각리 뒷산에서 용천사를 포위하고 올라왔습니다. 오후 2시 무렵에는 용천사 뒤 모악 산 봉우리 부근을 군인들이 완전히 점령하였습니다."56) 국군의 공격으로 용천사로부터 1km 정도 떨어진 광암리 노적봉에 있던 빨 치산 2중대가 궤멸되었다.57) 오후 2시경에는 283.4고지뿐만 아니라 노은재/ 53) 신청인 박득수 진술조서 (2008.6.26.) 54) 신청인 장재수 진술조서 (2008.9.3.) 55) 육군본부/ r한국전쟁사료.1 59, 1988, 1112쪽 56) 신청 인 장재수 진술조서 (2008.9.3.) 5끼 “산안마을 위가 1중대 고지였고 2중대는 광암마을 위쪽에 있었어요. 2중대가 패하니 전 부 1중대 쪽으로 몰렸어요. 하루 종일 전투를 하고 마지막으로 용천사를 탈환하려고 총 공격을 하니 빨치산은 버틸 수가 없었어요. 중기 기관총으로 공격을 하여 고개를 들 수 없었어요" 참고인 김인석 진술녹취 (2008.9.24.) - 3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