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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다.45) 한편 장성군 일대의 빨치산은 1951년 1월 중순부터 함평군 불갑산과 전라 북도 순창의 회문산으로 퇴각하면서 주민들에게 입산하라고 압박하였다.46) 서삼면 장산리에서는 1951년 1월 24, 25일/4끼 삼서면 학성리에서는 1951년 1월 29일/ “군경이 작전을 들어오면 모두 죽게 될 것이니 함께 피난을 가자” 라고 강권하여 서삼면 주민은 전라북도 순창 회문산으로y 삼서면 주민은 함 평 불갑산으로 가족단위로 빨치산을 따라 피난을 갔다. 이와 같이 삼서면 주민은 빨치산의 압박과 권유/ 그리고 군경에 대한 두 려움 때문에 어린이와 노령의 주민을 포함한 전 가족이 불갑산 용천사 주변 인 오두치 등으로 피난을 나온 경우가 많았다. 오두치 앞 밭에서는 장성군 삼서면 학성리 주민들이 20여 일 정도 움막에서 피난생활을 하고 있었는데y 이 상태에서 국군의 토벌작전이 시작된 것이다.48) 또 영광군 불갑y 묘량면 등 불갑산 자락의 미수복지역 주민도 군경과 빨 치산의 교전을 목격하면서 전투가 있을 때마다 I안전한 곳/을 찾아 쫓기듯 피난생활을 하였고,49) 때로는 강압에 의하여 빨치산에게 협조하고/ 협조 후 혜는 치서나 출장소혜 차수를 하는 불칸한 생활을 하였다.댔 이 무렵 불갑산의 용천사 인근인 함평군 해보면 광암리 광동/ 운암마을과 대각리 오두치/ 각궁/ 회화정마을/ 그리고 산내리 송산/ 산안마을 주변에는 수많은 피난민 움막이 있었고 각 마을에는 함평군당/ 무안군당/ 장성군 삼계 면과 삼서면당y 영광군당 일부/ 나주군당 일부 등 국군에 쫓겨 불갑산으로 들어온 지방좌익이 섞여있었다.51) 45) 신청인 장만기 진술조서 (2008.8.19.) 46) “빨치산이 자신들을 따라가지 않으면 반동으로 몰아 죽이는 상황이었습니다. 빨치산의 말을 듣지 않아 동네 뒷산에서 돌아가신 분들의 시신을 군인들 진주 후에야 가져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신청인 문만섭 진술조서 (2008.8.19.) 4끼 “1951년 1월 24, 25일경 /군경이 들어오면 죽이게 되니 피난을 가야 한다f고 하는 빨치 산을 따라 전라북도 순창 쌍치로 갔다가 2달 후에 일부 주민만이 살아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피난을 떠난 바로 뒤 경찰이 들어와 마을에 남아 있던 주민을 빨치산에게 협조 하였다고 살해하였습니다" 신청인 김영석 진술조서 (2008.7.9.) 48) 신청인 문만섭 진술조서 (2008.8.19.) 49) “불갑산 아래에 살았는데 군경과 빨치산이 매일 교전을 하여 불갑산 주변에 있던 우리 들은 피난을 가야 살 수 있다고 생각하여 논동골(노은)로 피난을 가게 되었습니다" 신 청 인 정 광전 진술조서 (2008.6.24.) 50) 참고인 김동출 진술조서 (2008.9.25.) - 3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