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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1년 1월 20일 전남경찰국과 영광경찰서 경찰/ 구수산에서 250명의 적 발견하여 185명 의 적 사살 @1월 26일 빨치산 80명y 함평 나산면 구산리 습격/ 경찰 2개 소대 출동 @1월 31일 함평 손불 북성리에서 빨치산 70명(무장 26명), 경찰과 교전 @2월 4일 빨치산 500명(무장 80명), 함평지서 경찰 30명과 교전 그러나 1951년 2월 20일 군경과 빨치산 간의 전투가 벌어졌을 때에는 빨 치산불갑산지구의 주요 기관 · 성원은 새벽 3시 용천사를 빠져나와 동나주 쪽으로 퇴 각하였다.따) 다. 불갑산 용천사 일대 피난민 상황 함평군 해보면과 영광군 불갑/ 묘량면 일대에 걸쳐 있는 불갑산은 주봉이 영실봉42)이다. 1948년 10월 여순사건 직후부터 빨치산은 이 산을 근거지 삼 아 군경과 대치하는 일이 잦았다. 국군 제20연대 2대대 5중대가 1950년 11월 20일경부터 함평군 해보면 금 덕리 문장에 주둔하면서 토별작전을 벌였는더J 1950년 12월 6일 월야면 정산 리, 12월 7일 월야면 월야리와 월악리, 12월 9일 월야면 외치리와 나산면 이 문리, 12월 31일 해보면 대창리, 1951년 1월 12일 해보면 상곡리, 1월 14일 나산면 우치리 등에서 주민 수백 명이 5중대에게 살해되었다.싫) 인근 마을의 수복과정에서 군경에 의한 무차별적인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는 사실을 인지 한 청 · 장년들은 /불갑산이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불갑산으로 피신하기 시작 하였다.44) 또한 1950년 11월 중순경부터 군경의 소개명령에 따라 피난을 나왔던 함 평군 해보면 광암리 용천사 부근의 주민들은 식량고갈 등으로 어려움을 겪 자 1951년 2월 초 음력 설을 전후하여 원거주지인 용천사 인근으로 되돌아 41) “저는 새벽 3시경 지구 성원 30명과 함께 나주 금성산으로 빠져 나왔습니다"창고인 김영승 진술조서 (2008.9.9.) 42) 영실봉은 해발 516rn로 함평군 해보면에 자리하고 있다. 영실봉 아래에 위치한 용천사 주변에서는 빨치산 토벌작전이 끊임없이 있었다. 43) 진실화해위원회/ 함평11사단사건 진실규명 결정서 (2007.7.3. 제48차 전원위원회) 44) 신청인 정효연 진술조서 (2008.9.3.) - 3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