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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일부가 들어와 있었고 각 군당은 생산유격대라고 불리는 보급조직을 운 용하고 있었다)5) 이 생산유격대는 관내 경찰관서를 습격하고 민가에서 식량/ 음식 등을 약 탈하였으며 물자운반을 위하여 지역 청 · 장년을 끌고 가기도 하였다.36) 불갑산지구 빨치산은 1950년 11월 중순부터 군경의 토벌작전이 본격화한 후 불갑산 주변으로 밀리면서 지역의 관공서를 습격하는 등 공세를 취하기 도하였다. 한편 불갑산지구 빨치산은 용천사 주변에 호를 파고 작전에 대비하면서 입산 혹은 피신한 주민이 이탈하지 못하도록 당부마다 보초를 운용하였다 3η 용천사를 중심으로 하여 대각리 가정마을 =응 오두치 =추 산내리 원산 · 산 안마을 걱 구수재 =추 수도암 =응 노은재를 잇는 방공호는 애초에는 빨치산의 방어선이었지만I 1951년 2월 20일 대보름작전 때는 군경에 의한 피난민 총살 장소가 되었다)8) 또 용천사에 사령부를 둔 불갑산지구 빨치산은 군경을 습격/ 교전을 하였 는데 사건 이전인 1950년 12월 2일 함평군 월야면 한새들로 진출하여 제20 연대 2대대 5중대와 교전하여 군인 2명을 사살하였다)9) 이후에도 빨치산은 행51연 1쉴 16얼I 19얼I 20일I 26일I 31일I 2월 4일 등 불갑산 인근의 군경부 대에 대한 습격이 잦아졌는데 1951년 1월에서 2월초까지의 함평/ 장성과 영 광지역에서 있었던 주요 습격 사건을 「한국경찰대일일보고」 에 의하여 살 펴 보면 다음과 같다.40) CD 1951년 1월 16일 빨치산 280명 함평 해보지서 습격/ 경찰과 교전 (2) 1951년 1월 19일 /장성 빨치산 36중대/ 서삼면 금송리에서 경찰과 교전 35) 참고인 김영승 진술조서 (2008.9.9.); 김영승은 당시 불갑산에 있었던 빨치산 출신 생존자 이다. 36) “반란군들이 마을에 자주 내려왔는데/ 마을에서 식량 등을 빼앗아 마을 청년들에게 지고 가 도록 하였습니다" 신청인 정병천 진술조서 (2008.6.24.) 3η n음력 1월 13일경 군경이 작전을 들어온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주 민들이 불갑산에서 내려가려고 하였지만 빨치산 때문에 내려갈 수 없었습니다" 신청인 장재 수 진술조서 (2008.9.3.) 38) 참고인 김진현 진술조서 (2008.9.4.) 39) “빨치산이 월야지서에 총을 쏘고 한새들을 거쳐 시목마을 쪽으로 도주했고/ 월야지서에 주둔하고 있던 5중대는 이들을 추격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시목마을 쪽에서 빨치산이 사격을 했고 군인 2명이 사망하였습니다"참고인 이행하 진술조서 (2006.6.28.) 40) í한국경찰대일일보고J I , r빨치산지-료집J 3, 한림대학교아시아문화연구소, 2001, 61- 144쪽 - 3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