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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6> 부대 편성 및 작전 결과3깅 5중대 중위 이영오 89(3/86) -r「1 120 6중대 중위 이용배 115(5/110) 전사 1, 부상 9명 70 16 7중대 중위 강충호 120(5/115) -r「1 130 8중대 중위 신해희 125(4/121) 전사 L 부상 10명 250 2 중포중대 중위 강장헌 104(3/101) 부상 3명 280 대전차포중대 소위 김운호 112(3/109) 전사 1명 85 130 연대수색소대 소위 유삼률 53(1/52) 부상 2명 70 합계 718(24/694)명 전사 3, 부상 24명 11,005명33)1 148명 육군본부의 자료에는/ 이날 작전의 결과 국군은 1,005명의 적을 사살하고 148명을 생포하였으며g 국군의 피해는 3명이 전사하고 24명이 부상을 당하였 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국군의 실탄 소모량은 M-1 실탄 14,000여 발/ 차 빈 실탄 1,500여 발, 30mm LMG 실탄 2,500여 발인 반면에/ 국군은 이날 빨치 산으로부터 99식 소총 4정/ 차빈 1정r 권총 2정/ 사제 목총 3정 등을 노획하 였다고 한다.왜 이와 같이 실탄 소모량과 노획한 무기의 양을 보면 국군의 전투력이 압도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전과(戰果)보고의 /적 1,005명 사살/이라는 기록과 /공비 350명/이라 는 기록은 차이가 난다. 따라서 /적 1,005명/에는 1951년 2월 20일 불갑산 일 대에서 희생된 민간인도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 나. 빨치산불갑산지구 상황 당시 빨치산불갑산지구에는 함평/ 무안군당과 목포/ 영광/ 나주r 장성군당 32) 육군본부f 『한국전쟁사료j 59, 1988, 1106-1111쪽「부대편성과 전과I를 정리하였다. 33) í전투상보」 중 소탕작전의 결과를 보면 사살된 적의 숫자는 1,005명이다. 그러나 1951 년 2월 20일 하루의 전과(戰果)를 기록한 이 수치는/ 제11사단의 1950년 10월 4일부터 1951년 4월 6일까지의 전과 1,950명의 절반을 상회하는 수치이다. 국방군사연구소/ r韓 國戰爭j , 中卷, 1996, 478쪽; 『화랑부대전사j (1986), r공비연혁 J (1971), r공비토벌 사J (1954) 등의 자료에는 공비의 규모가 '350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34) 육군본부/ 『한국전쟁사료j 59, 1988, 1109-1111쪽 - 3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