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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포중대장y 수 20연대 <표 4>와 같다. 사건 당시 국군 제11사단 하였다.조사결과는 조사는 대상으로 군경 측 참고인 색소대장 및 사병을 <표 4> 군경 측 참고인 진술 • 수색소대는 작전 하루 전날 함평국민학교에서 집 결하여 기도비닉16)을 위하여 20명만 출동하였고/ 불 갑산에 가서는 양쪽에 5명씩/ 중앙에 10명을 잠복시 켜 내려오는 적과 피난민을 생포하게 하였음. · 작전 후 연대장으로부터 표창장을 받았는데 표창 장에 1적 생포 70명I이라고 적혀 있던 기억은 남. · 밤중에 들어가 매복 후 작전을 하다 보니 어두워 아군의 포가 우리 쪽으로 떨어지는 상황이었음. 빨 치산은 우리에게 총격을 가하지는 않았음. · 실탄 사용량은 과다하게 보고되었으며/ 수색소대 는 전투를 하지 않았기에 /적 사살 70명/은 사실과 다르며/ 다른 전과(戰果)도 부풀려졌을 것임. · 전투 후 퇴각하다 부대원 1명이 부상당하였음 . . 2월 20일 불갑산작전은 송정리에서 문장을 거쳐 갔는데 불갑산 부근에서 1박을 하고 작전을 하였음. ·새벽에 출동하여 불갑산 정상까지 갈 때는 아무 일이 없었는데 내려오다 부상을 입었음. · 빨치산이 호 안에서 하늘에 대고 총을 쏘아 총구 만 보여 최후의 발악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음. - 도망가는 사람들은 떼를 지어 움직였는데/ 민간인 이었지 전투요원으로 보이지는 않았음. • 내려오다 부상을 당하여 민간인의 당가로 밤늦게 해보국민학교로 내려와 후송되었음. · 빨치산 복장은 대부분 떨어진 인민군 복장에 죽 창/ 철창을 들었고 99식 소총이나 따발총을 든 사람 조금밖에 없었음. · 빨치산은 몇백 명에 불과하여/ 전력은 국군이 압 적으로 우세하였음. · 전과는 민간인을 죽고 적 사살이라고 보고하였음. · 수색대장 유삼률의 연락병이었는데 불갑산작전 때 는 전사자나 부상자는 없었음. · 작전은 몇 시간 밖에 안 하고 오후에 해가 떨어지 기 전에 내려왔음. 우리가 올라갈 때 /따꿈따꿈/ 총 쇼리가 몇 번· 내처칸후힘는 응사만 하였음. i 수색소대는’적사:}살 전과는 없었고 비무장 피난민 만 몇 사람을 발견하여 데리고 내려왔음. 수 색 소 대 장 6 중 대 원 진술 2008.10.9. I 녹취 (조서) ;지승 12.12.1 ζ휠 유삼률 (22세) 양창규 (19세) 1 2 7 중 대 원 지소 2007.12.13.1 ζ 른 _"二;ζ , .1 김성순 (19세) 3 스 l 재「 λ 、{ 버케 이건 - 297 - 토- 2008.11.13.1 _~ 컨 ~_l→L 김정부 (19세)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