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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자의 연령별 분포를 보면 11세에서 40세까지가 전체 희생자 52명 중 44명을 차지한다. 10세 이하의 희생자는 없었다. 그 이유는 국군이 주민 중 11세 이상의 청년들은 주로 빨치산 용의자 또는 협조자로 간주하여 살해하 였기 때문이다. 다) 희생자의 직업별 분포 희생자의 직업별 분포를 보면 농업 41명y 상업 4명이었다. 또 중학교와 대 학교 등에 재학 중이던 학생도 6명이 포함되었다. 나. 가해부대 및 지휘관 기존의 문헌자료와 참고인의 진술에 따르면 함평 수복작전은 국군 제11사 단 20연대 2대대 및 3대대에 의하여 수행되었다. 또 사건 당시 수복작전을 수행한 제2대대장은 유갑열(柳甲烈)85) 소령/ 제3대대장은 김필상(金弼相)86) 소령이었음이 확인되었다. 국군 제11사단은 1950년 8월 27일 국방부 일반명령 제54호에 의하여 경북 영천에서 예하에 9, 13, 20연대 및 1개 포병대대와 공병대대를 예속 받아 육 군본부 직할로 창설되었다.8끼 1950년 9월 25일l 제11사단장에 최덕신(崔德新) 준장, 20연대장에 박기병(朴基內) 대령이 임명되었다.88) 사단장 최덕신 준장은 토벌작전에 견벽청야 작전 개념을 도입하였다.89) 85) 유갑열은 자력표상에는 1950. 9. 14.-12.15.까지 제6훈련소 근무(조사4팀-368)로 되어 있으나r 『부 대역사일지』 에는 사건 발생 무렵 제20연대 2대대장으로서 장성지역에 출통한 기록이 았다. [보병 제20연대, 「부대역사일지J , 1970, 17쪽.] 또한., 3대대장이었던 김필상도 제2대대장 유갑열이 불갑 산을 거쳐 영광 수복작전을 지휘하였다고 진술하였다.[ r참고인 김필상 전화 진술조사 보고」 [(2008. 1. 31.), 6쪽.J 86) 김펼상은 자력표상에는 1950. 9. 8.-12 14.까지 제5훈련소 근무(조사4팀-368)로 되어 있으나I 『부 대역사일지』 에는 사건 발생 무렵 제20연대 3대대장이었다는 사실이 기재되어 있으며, [보병 제20 연대, 「부대역사일지J , 1970 , 18쭉.] 김필상 자신도 함평 수복작전 당시 제3대대장이었다고 진 술하였다. 그는 함평에서 빨치산과의 전투가 없었다고 진술하였으나 12중대장 김용림은 빨치산으 로부터 포 공격을 받았다고 진술하였다.[ r참고인 김필상 전화 진술조사 보고J (2 1α)8. 1. 31.), 2쪽. ; 「참고인 김용림 전화 진술조사 보고J (2008. 2. 1.), 5쪽.] 87) 보병 제11사단, 『화랑부대 전사.! , 198α 10쪽. 88) 1950. 9. 25, 육군본부 특별명 령(갑) 제159호. 89) 중앙일보사편, 『민족의 증언.J 3, 을유문화사, 197κ 410쪽; 그러나 3대대장 김필상은 자신이 1951 년 초 11사단 작전참모로 있을 때 비로소 견벽청야 작전에 대하여 사단장으로부터 들었다고 진술 - 2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