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page

으나 생명만 유지한 채 혼절하였는데 저녁 무렵 가족이 나산면 할아버지 집 으로 데려가 살아남았다. 이 지역 사건의 특이점은 마을에 진주한 3대대가 여성동맹위원장을 색출 하려 하면서 발쟁한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3대대는 대동면 소재지였던 덕산리와 용성리 정창에 거점을 형성하고 있 던 빨치산을 불갑산 방향으로 퇴각시키고 10월 24일 덕산리에 도착하였다. 덕산리에서 3대대는 마을 주만을 대동국민학교 운동장으로 나오게 하였 다. 덕산리 주민 김재운은 당시 구장을 맡고 있는데다 동생 김재호가 경찰이 었기 때문에 거리낌 없이 만세를 부르며 3대대 앞으로 나갔다.3대대는 김재 운에게 ι빨치산이 타이어를 어디에 두었느냐”라고 물었는데 검재운이 “모른 다”라고 대답하자 y 같은 마을 주빈 성명섭(미신청)과 함께 인근 느티나무 아 래로 연행하여 총살하였다.69) 제3대대는 이후 함평읍과 대동면 향교리 명륜당 등에서 숙영하변서 고산 봉 인근에서 토벌작전을 전개하다가 며칠 후에는 나산면 나산국민학교로 이 동하였다.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를 통해 대동면 향교리 사건의 희생자 대부분은 제 적부상의 실재사실을 확인하였으나 조병수 부부와 덕산리 사건의 희생자 성 명섭은 제적부상 실재사실을 확인하지 못하였다. 4) 나산면 사건 대동면 향교리 명륜당에서 숙영지를 나산면 나산국민학교로 이동한 3대대 의 일부는 천주봉과 못골 둥 산악지대에서 토벌작전을 계속하였다. 제3대대 는 빨치산의 습격을 받기도 하였는데 그 후에는 인근 면가에 들어가 수색을 벌였다. 10월 28일 3대대는 나산면 월봉리 안영마을에 들어와 청 · 장년 7명을 2km 정도 떨어진 천주봉으로 연행하여 총격70)을 가하였다. 이날 곽원길(신 청), 이기옥/ 노셰창/ 정종하 y 김복수y 김두전의 남펀(이상 미신청)은 현장에서 69) í신청인 김지현 진술조서J (2006. 8. 14.), 3쪽; 「참고인 김영재 녹취록J (2007. 10. 25.), 2쪽. 70) í신청 인 곽연자 진술조서J (2007. 11. 26.), 1~2쪽. - 2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