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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이날 해동마을 주민 이종면y 홍종희와 해동마을 앞에서 주막을 하턴 서。。 등이 살해되었다. 이들 3명은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실규명 신청 을 하지는 않았으나 희생사실에 대한 목격자 진술이 있어,58) 진실화해위원회 는 그들의 유족을 탐문하였다. 그 결과 이종면59)은 제적부상 실재사실을 확 인하였으나 나머지 희생자의 실재사실은 확인하지 못하였다. 3대대는 수호리에서 1시간에 걸쳐 빨치산 및 협조자 색출을 하고 주민들 을 살해한 뒤 기산봉을 념어 함평읍으로 들어가 함평중학교에서 숙영하였다. 이후 함평읍에 주둔한 제3대대는 함평에서 불갑산l 영광방면에서 토벌작 전을 전개하였으며I 다른 한편으로는 함평읍 인근 지역에 부역자를 색출하러 다녔다고 한다.60) 또한r 참고인 이현석은 그 무렵 함평의 중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국군이 함평을 수복한 것에 감사하라는 내용으로 교육하였다고 진술하였다.61) 3) 대동면 사건 함평읍의 북동쪽에 있는 대동면의 향교리는 학교변 월산리와 경계를 이루 고 있어/ 수복작전 당시 학교면 사거리 전투에서 제3대대에게 밀린 빨치산과 그들에게 강제로 동원되었던 주민의 일부가 대동면 향교리를 거쳐 나산면 방향으로 후퇴하였다. 1950년 10월 22일 학교면 월산리 화산마을에서 숙영했던 3대대의 일부는 다음날 대동면 향교리 남교마을에서 수색활동을 계속하였다. 그 후 제3대대 는 향교(명륜당)에서 며칠간 주둔하면서f62) 다른 중대와 함께 향교리 뒷산인 5η 「참고인 이건영 진술조서J (21聊. 8.22.), 5쪽. 58) I참고인 김정순 진술조서J (2007. 10. 5.), 2-4쪽. 59) 이종변은 r피해보고서』 동에는 이종민(李鍾폈)으로 기재되었으나 참고인 진술과 제적부 확인결 과 이종면(李鍾動)으로 확인되었다. 60) I참고인 나병환 녹취록J (2007. 10. 11.), 4쪽. 61) 학교에서 학생틀에게 I우리를 구해주신 고마우신 국군 20연대장 박기병/을 외우게 했습니다. [ I참 고인 이현석 진술조서J (2006.8. 23.), 6쪽.] 62) 당시 사병 참전자 허경일은 12중대의 주둔사실을 진술하였으나 12중대장 김용림은 부인하였다. 「참고인 허경일 녹취록J (2007. 12. 12.), 2-3쪽; 「참고인 김용림 전화 진술조사 보고J (2008. 2 1.), 4쪽. - 25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