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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0월 23일 제3대대는 부대를 물로 나누어 한 부대는 해통마을로 들어왔다.100여 명 정도의 한 부대는 합평읍 방향으로 01동하며 총율 쏘변 서 천자봉 쪽에서 들어왔고, 다른 부패는 대둥마을 방향에서 들어왔다. 3대 대는 마을을 포위하고 민가에 들어가 주민을 끌어내거 시작하였다. 참고인 검정순은/ 당시 해동11]-을 들머리에 있는 자신의 집에 였다가 유아 를 업은 채로 3대대에 의해 마을 앞 논으로 연행되었다. 다행히 김정순은 총 격에서 살아남았는데y 당시 사건 현장을 자세허 기억하여 진술하였다,56) 그의 진술에 따르면I 김정순의 집에 온 2명의 국군이 자선와 남편을 찾기 에 ”마을에 가고 없다”라고 대답하자 국군은 그에게 아이를 엽은 채로 “마 을 앞 논으로 나가라”라고 하였다. 김정순은 끌려 나오면서y 국군이 마을 노 연에게는 “할아버지는 나오지 말고 들어가라”라고 하면서 돌려보내고 이웃 의 조상현은 마을 앞 논으로 나가라고 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마을 앞 논에 끌려나온 김정순/ 조상현/ 이종면, 조애폴I 조선예는 총을 맞 았는데 희생자 이종면(며신청)은 총상을 업은 채 접으로 돌아와 계속 피를 흘리다 그날 저녁 사망하였고y 김정순r 조애폴/ 조선예는 사건 현장에서 살아 남았다. 또 조기영, 조기행r 이인행은 주민들이 소집되어 았던 논으로 오는 도중에y 조효영은 마을 앞에서 제3대대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또한, 3대대는 조기재와 박양길 부부를 마을 어귀에서1 조백석과 장장근을 마을 앞 도로에서I 구장현을 김정순의 집 앞에서 살혜하였다. 한편y 대둥마을 뒤쪽에서 해동마을로 건너온 다른 3대대 7, 8명은 해동마 을 뒷산 아래에 았는 이건영의 집에 들어와 이건영과 그의 집에 함께 었던 이건오/ 이행수를 끌어냈다i 그들은 50여 명의 3대대가 었는 곳으로 끌려가 부역 및 언민유격대 참여 여부를 추궁 받았으나I 이건영의 동생 이건기가 3 대대에게 밤을 갖다 준 뒤 풀려났다. 이 상황에 대하여 참고언 이건영은 다 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국군이 우리에게 부역과 인민유격대 참여 여부를 묻고 있는데 셋째 남동생 이건기가 아버지의 지시로 국군에게 밤을 가져왔습니다. 이 밤을 국군에게 주었더니 저희들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면서 돌아가라고 하였습니다 "5끼 56) r참고인 김정순 진술조서J (21αY7. 10. 5.), 2-4쪽. - 25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