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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2일 국군의 함평 수복을 앞두고 학다리고등학교 인근에서 빨치산에 강 제로 동원된 주민 100여 명과 빨치산 50여 명45)이 제3대대와 대치하였다. 그 후 전투에서 패배한 빨치산이 영광 방향으로 후퇴하자 이들에게 강제로 동원되었 던 주민 대부분은 송산을 지나 대통변과 신광면 방향으로 피신하였다.46) 이들 주민이 송산마을로 내려가는 것을 본 3대대는 동원된 주민들어 모두 빨 치산에게 협조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마을에 내려와 젊은 사람을 선별하여 사 살하였다. 월봉마을 윤기환의 작은형 윤두식은 마을에 나갔다 돌아오다 3대대가 마을로 뛰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서수빈의 집으로 들어갔는데/ 이를 3대대가 따라 들어 가 총살하였다. 반면 비슷한 시각 윤기환의 큰형 윤장식은 자신의 집으로 뛰어 들어갔는데 이를 본 3대대가 뒤따라왔으나., 3대대에게 “어렸을 때 소아마비를 앓았다”라고 말하자 이들이 물러가 죽음을 변했다.4끼 월봉에셔 2km 남짓 떨어진 신홍동은 큰 도로변에 위치한 마을이다. 당시 이 마을 주민 대부분은 이미 피신한 상태였는데, 3대대는 3, 4명씩 짝을 지어 다니 면서 마을을 수색하며 남아였는 청 · 장년을 눈에 보이는 대로 끌어내어 살해하 였다. 참고인 오영종은 당시의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마을 앞에 선선재가 있는데 그곳에서 군언과 빨치산의 전투가 이틀간 있었 는데 주민과 빨치산은 100명 정도 되었고 … 빨치산이 영광 쪽으로 몰려간 뒤 에 국군이 마을에 내려오t 3, 4명씩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주민들을 끌어냈습니 다. 대부분의 주민은 빨치산과 전투 때 피난 갔는데/ 우리 집은 어머니가 그날 여동생 납순이를 출산하여 피난을 가지 못하였습니다."48) 송산마을은 사거리 낙천동 · 율동마을의 오른쪽에 있다. 앞서 교전이 벌어졌 던 학교면 사거리 학다리고등학교 뒤편 야산은 송산마을 뒤로 이어지는데 송산 마을의 오른쪽에 윌봉마을이 었다.3대대는 야산으로 몰려가면서 빨치산과 빨치 산에게 동원된 주민들까지 대동면 향교리 방향으로 몰아붙였다.3대대에게 몰린 45) r참고인 김동쉬 녹취록J (2αY7. 12. 28.), 5쪽. 46) r참고인 김동쉬 진술조서J (2007. 12. 28.), 4쪽. 4끼 「신청인 윤기환 진술조서J (2007. 9. 11.), 3~4쪽. 48) r참고인 오영종 진술조서J (2007. 9. 6.), 2~3쪽. - 24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