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page

학교변에서 면간연 집단 희생 사건이 발생한 곳은 사거리 율동과 낙천동l 월산리 송산y 신홍동이다. 특히 사거리는 1번 국도에서 함평읍으로 들어오는 주요 관문으로서 제3대 대의 수복작전에 맞서 빨치산의 저항이 있었던 곳이다. 빨치산은 수복작전 이전부터 제3대대의 함평 진주를 저지하기 위하여 무안 사창역(현 무안역)에 서 고막원역 사이의 철도를 봉쇄하고 있었다.웠) 또한 1950년 10월 22일 교전이 벌어진 뒤에는 빨치산이 함평읍과 인근 학 교면, 대동면/ 신광변 등에서 주민(청 · 장년 남성)을 강제로 불러내어 죽창을 들고 사거리 인근 전투지역에 보초를 서게 하였다.용) 제3대대의 함평 수복작전이 시작되자 빨치산은 불갑산 방향으로 깊숙이 퇴각한 반면y 강제로 동원되었던 주민은 빨치산을 따라가지 않고 전투지역 인근 송산마을을 거쳐 대동면l 나산면 방면 등으로 피신하였다.3되 3대대는 이들을 뒤쫓아가면서 사거리 율동마을 낙천동y 월산리 월봉마을 송산마을 등에서 청 • 장년을 색출해 그들의 집 앞이나 야산에서 총살하였다. 가) 사거 리 율동마을 사건 1950년 10월 22일 학교면 사거리 민간인 희생사건이 일어난 날은 함평읍 장날이었다.36) 그날 오전 제3대대는 사거리 율동마을 뒤편에서 빨치산과 교 전을 벌였다. 오후에는 빨치산을 무안 방향으로 격퇴시켜 한동안 전투가 소 강상태에 었다가 오후 3, 4시경부터 다시 총격전이 벌어졌다.3η 이 무렵부터l 제3대대는 마을에 들어와 산 바로 아래의 접부터 시작하여 집집마다 수색하 면서 주민들을 마을 뒤편 야산으로 끌어냈다. 제3대대의 함평 수복작전에 대하여 당시 12중대장이었던 김용림은 다음과 같 이 진술하였다. 33) r참고인 김동쉬 녹취록J (2007. 12. 28.), 2쪽. 34) r참고인 오영종 진술조서J (2007. 9. 6.), 2-3쪽; 「참고인 김동쉬 녹취록J (2007. 12. 28.), 4쪽. 35) r참고인 김동쉬 녹취록J (2007. 12 28.), 4-5쪽; 「참고인 김정수 진술조서J (2007. 12. 5), 5쪽. 3이 제3대대가 학교면 사거리에 들어와 주민들을 연행하여 간 날을 신청인들이 진실규명신청서에는 10월 23일이라고 적었지만 신청인 박남규는 그날이 함I영장날(양력 10월 22일)이었다고 기억하고 있었고I 참고인 노순례도 음력 9월 12일이라고 기억하고 있었다 r신청인 박남규 진술조서」 (2007. 9. 12.), 2쪽; 「참고인 노순례 녹취록J (2007. 10. 10.), 2쪽. 37) r참고인 윤상율 진술조서J (2007. 9. 6.), 3쪽. - 24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