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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06) 방향으로 퇴각시키고 영광읍을 수복하였다.1딩 이후 제3대대는 부대를 나누어 이동하였다. 당시 제3대대장 김펼상의 진 술과 제주 출신 참전사병의 진술y 그리고 현지 목격자 진술 등을 종합하면l 10월 22일 이후 3대대의 이동경로는 다음과 같다. 가) 제3대대 11중대('K' Co)는 학교면 사거리 인근에 300명의 적이 출현하였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출동하여 10월 22일 오전 9시 무렵부터 빨치 산과 교전하여 빨치산을 무안과 함평읍 북쪽으로 격퇴시켰다.16) 어로써 함평 이 1950년 7월 23일 얀민군에게 점령된 지 3개월 만인 10월 22일 국군에 의 하여 수복되었다.1꺼 이후 11중대 풍은 10월 22일 학교면 사거리 =추 학교면 월산리 =응 대동면 수복 후 향교리 명륜당 숙영 =추 나산면 나산국민학교 숙영 • 영광읍 수복 =추 전라북도 고창으로 이동하였다. 나) 제10중대 등은 빨치산이 더 이상 남하하지 못하도록 목포에서 무안 방향으로 북상하며 작전을 계속하였다. 이 부대는 10월 23일 함평읍 수 호리 =• 함평중학교 숙영 · 함평 인근 토벌작전 =• 영광읍 수복 =추 전라북도 고창으로 이동하였다. 다) 제3대대는 10월 23일 오후 1시 또다시 빨치산과 교전을 하였다. 10월 22일과 23일의 교전에 대해서는 수복작전 과정에서 첫 전투였기 때문 인지 조사과정에서 만난 당시 3대대 대대장을 비롯한 관련자들은 마을 이름 또는 학교면이라는 지명까지 기억하고 있었다.18) 당시 함평지역 수복작전에 대하여 3대대장19)과 사병들의 진술20)사이에는 15) 육군본부l 「정 기작전보고J , 1970. 10, 358쪽. 16) NA, RG 40κ box 1766-1, 앞의 인용문. 이 같은 사실은 당시 사병 및 주민의 진술을 통해서도 확 언되 었다. [ f참고인 김정수 진술조서J (2007. 12. 1.), 5쪽; 「참고인 입봉섭 녹취록J (2007. 12. 5.), 4쪽; 「참고인 고수홍 녹취록J , (2007. 12 11.), 4쪽; 「참고인 채희돈 녹취록J (2007. 12. 12.), 3 쪽.] 1끼 『함평군사』 에서는 함평 수복 일자를 1950년 10월 23일로 기술하고 있다. 함평군사편찬위원회, 『함평군사.J (2), 1999, 67쪽. 18) r참고인 고수홍 녹취록J (2007. 12. 11.), 5쪽; 「참고인 채희돈 녹취록J , (2 1αη. 12. 12.) 3쪽. 19) “함평이 완전히 인민군 점령 하에 있다고 듣고 들어가게 되었는데I 우리가 들어가니까 다 달아나 버렸단 말이에요. 그래서 거의 총격전 없이 함평을 점령했어요. 적정을 살피니까, 완전히 인민군 점령 하에 있다고 하여 진격했는데 저항이 없단 말이죠. 그래서 그대로 들어간 거죠간 「참고인 김 필상 전화진술 조사보고J (2008. 1. 31.), 2~3쪽.] 20) 당시 제3대대 12중대 3소대원으로 수복작전에 참전하였던 고수홍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목포에서 손톱l 발톱, 머리를 깎는 동 전투태세를 갖추고I 도보로 이동했는데, 얼마 후 앞에서 소 총중대는 전투를 벌였고y 우리는 뒤에서 포로 지원하는 동 서너 시간의 전투 후 함명을 수복하였 - 24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