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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장 집단희생규명위원회 헤쩍훨 υ ’양용 희생착의 적협을 찰펴보편, 대통면 셔거 장기날과 3개 ul-을 구장 등 몇 명을 제외하고 는 대부분 놓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양렴마을에는 군청이나 면사무소에 다녔펀 주민들아 다릎 부락에 벼해 많았으나 청찰 근무자는 없였다. 또한, 혁생자들의 학력을 살펴보면, 대 부분 무학이었으며 얼부만아 야학으로 공부하여 글을 터득하고 있는 정도였다. 션청언 대표짜 장겨황은 따올 주면들은 당셔 좌역과는 거리가 멸였다. 그려고 대풍면 사무소에 근무하면서 좌익세력을 배척했던 장기남을 비롯하여 신기, 동하, 양림 등 3개 따을 구장 등 성설혀 꽁적을 수행했펀 사람들을 왜 경찰어 셔살했는져 도무져 어해져 안 된다"라고 주장하고 였다}7) Lt ::.와결 어상의 조사 결괴흘 종합하여 보면 1949년 9월 21일(음력 7월 29일)부터 9월 22일(음 력 8월 1얼)껴져 。l틀간쐐 걸쳐 경찰유격대혜 의해 희생된 피혜자의 수는 28명여벼 여들 은 공직을 수행하던 3개 마율 구장을 비롯한 무고한 민간인들이었다. 4. 희생캡워 7t 꿇Af-LH훌훌 신청언 • 참고인의 진숨올 근거로 본 사건의 겸워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양렴ul-율은 함평씁역1셔 불갑산요로 통하는 길목예 위치혜 였였으므로, 당시 공벼토 벌작전을 수행했던 경찰병력 수송차량이 마을 앞 도로를 자주 지나다녔다. 신청인 · 참고 언 전술에 쩍하면 공빽토별부대연 경찰유격폐거 o}동했던 경로는 〈져도 1)과 같다. 2) 겸찰유격대는 1949년 9월 21열(음력 7월 29일) 늦은 오후 불갑산 방향에서 공비토 별작전을 ul-치고 함평읍 방향으로 귀대하다가 병력수송차량 2대중 1대가 펑크가 나져 양 림마을 앞 삼거리(주포마을 입구)에 정차하여 수리 겸 휴식을 취하고 있였다. 이 때 경찰 유격대원들은 양림라울 주띤 장락규가 략경18)을 셔겨 워해 죽창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보 았고 이를 수상허 어겨 마을을 수색하였다. 이 과정에서 한 유격대원이 장락규를 붙잡아 17) 션청인 장기환, 진술조서(2007.8.30.) 8쪽, 18) 함펑경찰셔의 져셔에 따라 접접마다 야경을 셔라고 하여 함평읍 함평리 산성uH (속칭 찍쭉째)에셔 양렴 마을 사람, 하늘이마을 사람, 고향촌 사람들이 야경보초를 서곤 했으며, 직접 야경을 서기도 하였다. (신청 인 장무갈, 진술조서 3쪽 : 신청인 장순철, 진술조서 3쪽) - 2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