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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부 진셜규명 및 진설규명불능 결정 결과 풍으로 대대적언 로별작쩔을 판f쩡하7)로 결역착릎 한편 져려산져구전투경찰I캔 본부를 님-원에 설치하였다. 여러한 토별착전의 겸과 19501쉰 4뭘 펼껴져 공벼 몇 빨쳐산 주력부I춰 대부분어 소탕되 였다.5) 그리고 많온 쪼찍원들이 토벌작전어l 의혜 사살되거나 체포되었으며, 살아남은 일 부도 도피생활어l 룹급확였다. 또한 01려현 토별착전과 공벼 또는 빨쳐산의 져항과정어l셔 무고한 민간인여 많01 희생되었다. 특히 작전지역 가까이 거주하는 면간인들은 설로 엄 청난 재싼펴혜와 선체적 우}해를 당학거l 되였다. 합평져역의 경우 1948년경부터 퍼혜7r 발생하였다.6) 2. 싸켠법 ^t설적 측면 가.조차내용 1) 본 사건의 사실판계를 확인 할 수 있는 근거로는, 함평폭도 28명 사살이라고 보 도된 1949년 9월 25일져 호남열보 기사 몇 선청언 • 참고연역 전술을 들 수 였다. 번져 워 예 언급한 호남멀보 기사의 전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면서거 구장 틀 가담한 함평폭도 28명 사살 (함평) 져난 20얼 아침 함평셔 윤상수(尹相洙) 줌대장어 언솔한 유격대와 환청배속 장 교 김창성 (金룹成) 소위가 인솔현 한청부대가 대동면과 신광면 산g벼l 적을 잭출 또는 잠 복근무를 lJr치고 21얼 오후 5시 반경에 신광면으로부터 귀환 도중 읍으로부터 4킬로미터 지점언 함평군 잉펌부락 뒷산쩌l서 도주하는 폭도를 발견하고 즉셔 하차하여 부락을 포위 하고 사살 28명, 아지트 7개, 미신기 1돼, 침구 등을 압수현 전과를 올힘. 정찰 측은 최판기 (崔判基) 순경여 적개심예 불타는 펴 끓는 용기로 적전에 돌젠하여 수 명을 발사 직사케 하다가 불행하게도 흉탄에 우측 흉부에 부상을 입음. 5) 육군본부 편찬 rr공비토별사J, 육군본부, 1954, 27 ~30쪽. 6) 함평군, 앞의 글? 함평군, 2006, 18쪽, - 2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