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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들이 들어 왔기 때문에 전 부락민들은 이들 군인들에 환호의 박수를 보내 며 열광적인 환영을 했다. 그러나 이들은 살려준다고 마을 뒷산에 모이라 해놓고 그곳에서 남녀 구별 없이 군경가족과 50세 이상의 고령자 및 16세 이하의 어린애들을 구분 제외 하고 나머지 부락민들엔 앉으라고 말한 다음 담배 한 대씩을 피우게 했다. 그리고 5중대장 권대위의 권총 선호로 미리 준비해 두었던 기관총과 줄지 어 있었던 총살분대의 M1소총을 면전에서 수백 발 싹 죽였는데 1차 사격에 서 숨이 붙어 있던 부락민들은 “산 사람은 일어나서 각자 집에 붙은 불을 꺼라 그래야 살려준다”는 i권I대위 말에 속아 일어났다가 2차 사격에 대부분 죽고 3차 사격은 시체를 총 뿌리로 헤치며 움직이는 시체에 총탄을 퍼부었 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거창y 함양, 산청의 학살과 같이 시체를 태우 지는 않고y 그대로 방치한 채 물러갔다 한다. 이 학살에서 제외되었던 부락민들에겐 각자 자기 집에 불 지르게 한 후 4 킬로미터 떨어진 면사무소 소재지에 피난 시켰다 처녀와 유부녀를 강간한 후 싹죽이고 부락민들의 재산을 약탈해간 5중대 였기에 현재 이곳의 우는 어린애를 달래려면 '5중대l란 말 한마디만 하면 울던 어린애도 울음을 그치고 무서워한다고 하며 젖먹이다가 어머니란 단어 (單語)보다 5중대란 단어를 먼저 배운다고 했다. 91년(1958년)도에 정부에서 지어준 후생주택 10여 동이 세워진 월악리 부락엔 아직도 주춧돌아 수없이 남아 았고 형장이었던 마을 뒷산에는 절손되어 유가족이 없는 농민의 무텀 이 남아 있는 부락민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 20여 개 있었다. 아이규환의 10년 전의 악몽이 되살아 몸서리가 쳐진다는 유가족들은 권대 위의 극형을 정부에 진정할 것이라 했다. 만일 이를 들어주지 않으면 전 부락민들이 총출동하여 전국을 샅샅이 뒤 져 권 대위는 물론y 그 가족까지 찾아내어 몰살하겠다고 벼트고 있다. 나 산 면 해 보 면 83년 음력 12월 5일부터 부락단위로 감행되었던 함평군 해보면(成平那 海 保面)의 400명과 나산면(羅山面)의 300명 학살 때도 역시 제5사단 20연대 2 대대 5중대장 권(權俊玉)대위가 지휘하는 군인이었다. 이 양면에서는 동일한 방법으로 양민을 학살했다는 것으로 100여 명이 한꺼번에 학살당한 해보면 대창리(大昌里)에서는 군인들이 집에 불 지르고 부락민들에게 살려면 동 부 락 속칭 i쌍구령l으로 피난 가라고 한 다음 I쌍구령l에서 미리 대기 하고 있 던 기관총과 M1소총 및 따발총분대가 그곳에 접근하는 남녀노소를 막론하 - 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