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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也面)과 해보면(海保面)에서의 만행진상이 현지를 찾은 기자들에 의해 상세히 드러났다. 이 고장 사람들은 한 결 같이 그 당시의 『제5 중대』 란 말만 들어도 폼서 리를 치면서 10년 전의 t슬픈 사실’을 다 음과 같이 알려주었다. 월 야 면 “대한민국 만세” 중에 맞아 쓰러지는 전직 호국군인 정(鄭)씨의 필사적인 힘의 외침이었으나 “이놈의 자식”이라는 욕설과 함께 또다시 퍼부은 총탄에 l정r씨의 맥박을 잃게 했다는 이야기는 83년 음력 10월 29일 함평군 내에서 제일 먼저인 월야면(月也面) 325명 집단학살사건의 무자비한 주둔 군인들의 만행을 대변하는 것 같다. I정I씨는 “살려면 집에서 나와 뒷산에 모이라”하는 제5사단 20연대 2대대 5중대장 권(權俊玉)대위의 추상같은 호령에 죄 없는 우리들은 설마하고 따라 나선 500부락민들 속의 한사람으로 부락에서 200미터 지점인 뒷산 형장에서 모든 증명을 제시하며 호국 군인이었음을 주장했으나 군인들은 이를 본체만 체 방아죄를 잡아당겨 쓰러뜨리고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는 I정’씨에게 또다 시 총탄세례를 퍼부어 죽였을 뿐더러 6 . 25때 후퇴하여 집에 없는 남편이 동 부락에서 3킬로미터 지점인 불갑산(佛甲山)에 입산했다고 경찰이었던 노 (훌興用) 씨의 부언을 총살했다는 것이다. 부락민들은 이 학살에 앞서 동월 28일 밤 동면에서 공비와 교전중인 2명의 군인이 전사했기 때문에 그 보복으로 알고 있으나r 학살 당시 부역자와 공비 는 이미 불갑산 속으로 자취를 감추어 버려 참변을 당한자 중에는 부역자 가 한사람도 없었고 죄가 없기 때문에 남아있었던 양민들이었다는 것이다. 5중대 사병 한사람과 친해졌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사실을 알아냈다는 월 야리(月也里)의 김(金容澤=45)씨의 말에 의하면 5중대는 하루에 공비 300명 과 건물 50동을 사살 또는 소각시키는 전과를 올리라고 상부에서 명령을 받 았기 때문에 부락민을 학살하고 집을 불살라 이를 전과로 상부에 보고했고 밭에서 일하다 끌려왔던 농민들을 죽이고 그 손에 쥐어진 농구(農具)들을 사 살한 공비에게 얻은 노획물로 압수해갔다는 것이다. 월야리 현장에서 등에 기관총탄을 맞고도 죽은 듯이 쌓여진 시체 밑에 숨 을 죽이고 있었기 때문에 기적적으로 살아 나왔다는 정(鄭南植=33)씨와 당시 총살하는 임무를 맡은 모소대장 연락병 /김일호’ 1등병 때문에 학살자 중에 서 제외 되었다는 정(鄭一雄=32)씨 말에 의하면 동 부락 우익진영의 청년들 은 5중대가 들어오기 전 해보면(海保面)에 주둔한 5중대를 찾아 “현재 남아 있는 부락민들은 부역자 가 한 사람도 없다”고 말해주려 떠나려던 때에 군 q u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