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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2대대장은 5중대가 공비의 근거지를 없애기 위해 미수복 지역 의 민간인들을 사살한 내용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당시 5중대는 자신 들이 수행한 작전상황에 대해 장성의 2대대 본부에 3일에 한번 씩 작 전결과를 보고하였으며 보고자는 사병 1개 분대 규모 병력과 엇비슷한 숫자의 청방의 호위를 받으며 도보로 갔다고 한다.128) 당시 5중대는 마 을에 들어가 주민 소개작전을 할 때도 팽이 삽 쇠스랑 도끼 등을 반드 시 가져오도록 하여 노획무기의 전과로 보고하였는데/129) 이 같은 내용 은 공비사살과 무기노획이 중요 작전 목표였으며/ 그것이 대대/ 연대에 그대로 보고 되었던 것으로 보안다. 이는 1950년 말께 6중대 청년방위 대 중대장으로 았으면서 연대본부에서 사살한 인명 수 등의 내용을 적 은 5중대 전과표를 보았다는 윤석근의 진술에서도 뒷받침된다.130) 다만 5중대가 연대본부에 본 사건을 단순히 공비토별 전과로 보고했는지의 여부와 대대장과 연대장이 5중대에 의한 민간인 집단살상 내용을 인지 하고 있었는지의 여부를 공식적으로는 확인할 수 없었다. 단지 권준옥을 1951년 1월 22일 연대 병기장교로 인사이동 조치한 것으로 보아 집단희생 · 성폭력 사건 등으로 주민의 원성이 너무 크기 때문에 무마차원에서 전보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20연대의 작전명령을 확인할 수 없는 상태에서 20연대장이 직 접 “/이적행위자r를 총살하라”라고 명령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1사단 의 작전 지휘 하에서 발생하였던 거창사건의 경우를 유추해 보면 연대 차원에서 예하의 2대대장과 5중대장이 불갑산 연근의 주민 중 청 · 장 년들을 사설상 공비로 간주하여 총살해도 무방하다고 해석할 정도의 명령이나 지침을 하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같은 2대대 소속이라고 하더라도 5중대 작전지역에서 유독 민간인 희생사건이 많이 발생하였던 이유는 5중대 작전 지역의 지리적 특성과 공비와의 실제 교전 경험과 그것으로 인해 초래된 군언들의 공 포감과 보복심과 감정적 대응y 그리고 5중대장 자신이 매우 난폭한 성 격의 소유자인데다 인명을 경시하는 관습을 갖고 있었던 점, 5중대 군 128) 김앨호가 팡주 연대본부에 보고하라 다니는 깃 을 보았다는 증언이 았다. 침고인 김석주1 진숲조: 샤 4쪽, 신창인 이용헌, 진술조서 6쪽. 129) 유칭 기 증언, 김영택 r한국전쟁괴 함평양민핵산~ . 사화문화윈, 275쪽. 130) 잔고얀 윤석끈, 진술조서 6쪽, 2006. 12. 13. - 16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