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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리를 자주 왕래하였다고 하는데 5중대는 이를 빨지산과 내통한 것으 로 의심하여 경찰을 시켜 틈틈이 호구조사를 실시하였다고 한다. 사건 전날인 5중대는 12월 30일 어수산 방향으로 토벌작전을 나갔다가 잠복 하고 있던 빨치산의 습격으로 퇴각하기도 하였다.120) 5중대는 이날의 습격에 자극받아 성대마을의 소개민을 빨치산으로 의심하여 집단 총살 한 것으로 보인다. 상곡리 모평마을 집단희생사건의 원인은 사건 전날(1월 11일) 밤 모 평마을 뒷산과 연계되어 있는 비녀봉에서 빨치산들이 중대본부에 총격 을 가한데 대한 보복행위였다. 나산면 우치리 소재마을의 경우 일부 소개 피난민들이 이곳에 식량 등을 조달하기 위하여 드나들었는데, 5중대는 이를 빨치산 활동으로 의심하여 마을에 들어가 남아있는 주민을 총살하였다. 대부분의 사건들이 1950년 12월 2일의 한새들 전투 이후에 발생했다 는 점을 보면I 함평 11사단 사건은 윌야l 해보 등지의 불갑산 인근 지 역 주민들이 빨치산과 내통한다고 간주한 5중대 군인들이 무리하게 토 벌작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 군인들은 빨치산에 게 피해를 엽은 다음에는/ 한새들 전투 이후 장교 · 동촌마을 사건이나 남산꾀 사건 또 쌍구룡I 모평마을 사건처럼 화풀이 식으로 인근 지역 주민들을 공격 대상으로 삼았던 정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5중대장의 평소 부하나 주민들에 대한 난폭한 행동도 주요한 이유가 되지만/ 빨 치산과 비교해서 전투능력이 현저히 떨어진 나이 어린 군인들의 빨치 산에 대한 공포감과 보복심도 화풀이식 무차별적인 주민희생을 야기한 중요한 이유가 된다. 나. 소결 1950년 10월 말 이후 함평군 해보면y 윌야변에 주둔하면서 토별작전 을 벌이는 과정에서 민간인들을 집단 총살한 가해부대는 육군11사단 20연대 2대대 5중대로 확인되었다. 5중대의 함평군 해보면 금덕리 문장 장터 주둔 사실은 당시 5중대장 120) 참고인 김석주, 진술조서 11 쪽, 2006. 6. 29. - 16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