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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106) 현재 위원회에서 진실규명 결정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신청인 진 술에서 확인 되는 바 같은 2대대 소속이면서도 전 · 남북의 다른 지역 에서 작전을 했던 6중대나 8중대에 의한 피해보다 5중대에 의한 피해 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이 사건의 지휘책임이 일단 5중대장에게 있 음을 입증해 준다. 당시 목격자나 경험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5중대 군인들이 민간인들 을 괴롭히는 일은 비얼비재했는데y “군인들을 만나면 무조건 죽이니까 군인들이 없는 곳으로 피신가야 했다"10끼고 증언하기도 했다. 실제로 이 지역 주민들은 국군들이 없는 곳으로 피난을 가기도 했으며/ 따라 서 불갑산으로 올라간 주민들 상당수도 빨치산을 따라간 좌익성향의 사람들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5중대 군언을 피해 피난 갔다고 볼 수 있다. 참고인 윤홍병은 “전반적으로 질이 나쨌다. 무시무시한 놈들이 다”라고 5중대 군인들을 기억하고 있으며y 학련활동을 했던 정현모는 “이동 시에 낙오하거나 따라오지 못하면 죽여 버리기까지 하였다"108)며 5중대 군인들의 잔인성을 기억하고 았었다. 5중대 사병의 대부분은 전투력이 별로 없는 신참 군연이라는 점도 주목할 펼요가 았다. 입대 후 연주일의 훈련으로 낯선 함평에 온 17, 8세의 병사들에게 문장장터에 주둔한 후 맞닥뜨린 빨치산의 가습은 위협적이었다. 더구나 5중대는 소대별로 야전에 참호를 파고 천막을 치고 생활하다 보니 틈만 나면 민가에 나가 주민들에게 행패를 부렸 다는 증언도 었다. 5중대의 규율은 6중대와 대비된다. 6중대는 같은 대대의 중대였지 만 학교 안(고창중학교)에 주둔하다 보니 병력이 통제되고 규율이 엄격하게 유지되었지만109) 5중대는 소대별 천막생활을 하여 규율이 존재하지 않았다. 5중대가 작전지역에서 민간인 집단총살사건을 빈번하게 야기한데 는 5중대장 권준옥의 개인적인 성격과 품성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106) 김영택Ií한국전쟁괴 함평양민학산.1 , 사회문화윈, 2001, 139쪽. 107) 참고인 장두병 , 진술조서 4쪽, 2006. 6. 28. 108) 침 고인 ;성 현모, 진술조서 9쪽, 2006. 7. 20. HJql 착:1[91 유삭끈 논춰록 꺼쪽 ,)()()꺼 l? 1 r~ - 16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