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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외치리 인근에서 군의 이동과 초소가 운용되었음이 증언을 통하여 확언되었다.92) 기록상 사건지역에서 20연대 2대대가 최초로 출현한 것 은 12월 18일 함평군 해보면 구계리로 알려져 았었지만93) 위 「정기작 전보고」 에서는 10월 27일에 함평지역에 진출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2대대는 이후 11월 30일에 화순군 동면 287고지 소탕전을 전개하였 다.94) 위원회의 다른 조사에 의하면 2대대의 대대본부와 8중대는 장성 군 삼계면 사창리에, 6중대는 전라북도 고창에, 7중대는 장성군 북부 지역에서 작전을 수행한 사실이 확인되었다.95) 라) 국군의 함평읍 수복과 5중대의 해보면 주둔 참고인 이현석(현 함평문화원장)의 진술96)에 따르면 함평군 함평읍에 20연대가 최초로 나타난 시점은 1950년 10월 23일이다 9'꺼 3대대 9중대 가 목포에서 광주로 올라오던 중 함평군 학교면 사거리 언근에서 빨치 산과 전투를 한 후 함평중학교에 주둔하였고 일부는 나산면 나산초등 학교에 주둔하였다. 나산면 구산리 주민 이재열(당시 청년방위대원)은 함평 쪽에서 들어온 군인이 나산국민학교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인근 원선리에서 빨치산과 전투를 벌였다98)고 증언하였다. 12월 18일 「구계려 공비소탕전」 은 현지 주민을 통해 탐문해본 결 과 실존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었다.99) 또 5중대의 해보면 금덕라 문장장터 주둔에 대해서는 당시 5중대장 연락병 김일호의 진술에서도 확인되었으며,100) 윤인식 (4선 국회의원), 이계펼(사건 당시 월야지서장), 오정인(월야지서 경찰)의 진술도 그와 일치한다. 92) 신청 인 정 재션, 진술조서 4쪽, 2006. 5. 17. 93) 육군본부Ir한국전쟁사료.JI 59, 1987, 928쪽. 94) í화순군 동면 287고지 소탕전J , 육군본부 r한국전쟁사료.11 59, 1987, 941쪽. 95) 2대대의 작전 관련 문서는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위원회의 고창지역 조사, 그리고 본 사건과의 함평지역 조사 등에서 주둔사설은 확인되었다. 96) 참고인 이현석, 진술조서 4쪽, 2006. 8. 23. 97) 함평의 수복은 1950년 10월 23일이다. 함평군사편찬위원회Ií함평군사.11 (2), 1999년, 67쪽. 98) 함평군 나산면 구산리 이재열(5중대 청년방위대원)과 2007. 6. 6, 전화탐문. 99) 해보면 금덕리 거주 윤주원(061-323-0414)괴 2007. 5. 9. 전화탐문. 100) 00사단의 사라진 작전명령서 í이제는 말할 수 있다J 14, 2000. 6. 25, 'MBCJ; 참고인 김 일호, 2007. 2. 15. - 15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