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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과 각 지역 행정기관 복구 및 적정을 수집하였다 . • 제2기(1950. 10. 26. ~ 12. 31.) 작전은 월동기를 맞아l 빨치산의 저항을 불능케 하기 위하여 보급로 차단 및 통신망 두절 등의 방법을 통해 적의 저항을 불능케 하기 위하여 /견벽청야 작전l을 전개하였다. l 제3기(1951. 1. 1. ~ 1. 31.)는 중공군의 참전으로 빨치산이 고봉을 근거지로 아지트를 구축하고 약탈/ 납치/ 방화/ 기습 등을 감행함에 경 찰/ 청년방위대에 보급로 및 통신망 확보에 대한 책임을 맡기고 사단 은 근거지 붕괴에 주력하였다 . • 제4기(1951. 2. 1. ~ 3. 31.) 작전은 최종 토벌기로서 공비의 섬멸 을 위하여 지리산 불갑산 등 빨치산 근거지 인근 산악지역의 주민 소 개 작전도 병행하였다. 이 작전은 빨치산토벌이라는 본래의 작전 목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많은 무고한 민간인 희생을 발생시켰다. 경상남도 거창y 함양/ 산청지 역의 민간인 희생사건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 작전에 대해 당시 사단장이었던 최덕신은 “견벽청야작전에 대해 주민들의 원성이 컸어요. 집을 불사르고 철수시킨 다음, 다시 주민들이 들어갈 때 정부에서 보상을 제대로 하는 것도 아니니/ 원성이 클 수밖 에요”라고 하면서 이후에 오랜 시간이 지나 그 폐해를 인정한 바 았 다.82) 나) 11사단 예하 연대의 창설과 20연대의 광주 주둔 11사단은 예하에 9, 13, 20연대를 배속시켰는데 함평11사단사건과 관 련된 20연대는 1950년 9월 25일 경상남도 삼랑진에서 육군 제6훈련소 를 개편하여 창설하였으며 10-월 1일 제주의 육군 제5훈련소로부터 장 교 87명/ 사병 1500명을 충원 받아 편성을 완료하였다.83) 20연대는 11 사단 작전명 령 제3호에 의 거I 1950년 10-월 4일 삼랑진을 출발하여 10 일 광주시에 도착하여 광주여자중학교에 연대본부를 설치하였다.84) 82) 중앙일보사편 r민족의 증언.H 3, 을유문화사, 1975, 410쪽. 83) 육군본부 w한국전쟁사료.JI 59, 1987, 922쪽. 84) 1950. 10. 22. 연대 작명 제 12호에 의거 팡주여자중학교에 주둔 중인 떤대분부와 예하 각 대대 본부를 광주 서석국민학교로 이동하였다. 육꾼 군사연구실 I부대약랙표」 - 15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