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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결과 249명의 사망자 가운데 빨치산 활동을 했거나 빨치산에게 협력한 사람은 없는 것으로 확언되었다. 희생자들은 빨치산과 국군 사이에서 시달렴을 받으면서 마을에 남아 았던 농민들이었다. 3. 가해주체와 가해 이유 가. 조사내용 1) 육군 11사단의 창설과 토벌작전 가) 부대 창설과 견벽청야 작전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초기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유 엔군은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다. 같은 해 9월 15일 유엔군 사령관 맥아 더는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인민군에 대한 반격을 시작하였다. 유엔군과 한국군의 반격으로 인민군과 지방좌익 등은 북으로의 퇴로 가 차단되자 후방 산악지대에 들어가 빨치산활동을 전개하였다. 정부 는 빨치산 토벌을 위하여 1950년 8월 27얼 국방부 일반명령 제54호에 의거 육군본부 직할부대로 11사단을 창설하였으며 육군 준장 최덕신이 9월 25일자로 초대 사단장으로 취임하였다. 이후 11사단은 지리산 동서 양안 지역에서 빨치산 토별작전을 전개 하다 1951년 4월I 8사단과 엄무를 교대하였다. 11사단장 최덕신은 중국의 고전적 작전개념인 견벽청야(堅塵淸野) 작 전을 빨치산 토별작전에 활용하였다. 이 작전은 i지켜야 할 전략거점은 벽을 쌓듯이 견고하게 확보하고 부득이 적에게 내놓게 되는 지역은 인 력과 물자를 이동시키고 건물은 깨끗이 없애 적으로 하여금 이용하지 못하게 하는I 내용이다. 11사단은 빨치산 토별작전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사기별로 목표를 구분하였다.81) l 제1기(1950. 10. 7. ~ 10. 25.) 작전은 병력의 호남지역에 집결 후 81) 육군본부1'"한국전쟁사료.JJ 59, 1988, 172~ 176쪽. - 15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