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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수는 당시의 국회 속기록과도 차이가 난다. 함평 현지 증언청취 속기록을 보면 당시 윌야변 부면장은 월야지역 희생자를 350명(부상자 25명 포함)이라고 증언하였으나 해보면은 금덕 리 고두마을 43명(이장 강철현 증언)1 모평마을 83명(이장 윤형중 증 언)1 성대마을 40명(이장 김성묵 증언)1 그리고 해보지역 주민 45명(김 성묵 증언)이라고 증언하여 이를 합치면 해보면 피해자는 211명이었다. 나산면은 우치리 36 1 37명(이오섭 면장 증언)1 이문리 10명(이오섭 면장 증언)이라고 증언하였다. 속기록에 나타난 피해자 수를 합치면 607명이 된다. 이는 해보면 피해자 수에서 83명의 차이가 나거 때문이다. 제4대 국회의 현지 증언청취를 통한 조사가 1960년 6월 8일 단 하루 동안 설시되었기 때문에 이장들의 증언을 모두 신뢰하기는 어렵다. 그 리고 524명의 신원 등이 포함된 명단은 현재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정확성 여부를 판단하기 어렵다. 한편 함평군의회는 1996년 12월 28일 제46회 정기회에서 함평양민학 살진상조사 특별위원회(위원장 윤표, 간사 이재화 의원)를 구성하여 1997년 12월 29일까지 1년간 활동하였다.79) 군 의회 조사 역시 피해 유족들을 개인별로 확언한 것이 아니라 주로 마을 。l장을 통해 기존 유족회 명부를 확인하는 방법으로 진행되어 한계가 많았다. 함평군의회 조사는 당시 마을별 증언청취와 현장 확언 등을 통한 조 사이어서 그 보고서의 희생규모 역시 정확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또 이 조사에서 5중대에 의하여 발생한 사건 중 동네의 다른 소규모 사건과 관련 희생자 규모는 누락되었다. 이에 비해 위원회 조사는 진실규명 신청언에 대한 진술조사를 중심 으로 전행되었기 때문에 전체 피해규모 산정에서 이전 조사에 비해 좀 더 엄밀하게 진챙되었다. 그려나 진실규명을 신청하지 않은 유족들이 상당수 있고 가족이 전멸한 경우도 있기 때문에 258명이 최종 확인된 피해자 규모라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함평11사단사건 관련 희생자 78) 제4대 국회 조사보고서는 당시 조사기- 단 하루에 이루어진 조사였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희생 자의 규모룹 사건 당시와 가장 근접하게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국회조사의 원자료 등이 거의 없어 이애 대한 파악은 불가능하였다. 또 조사보고서에서는 함평지역 희생자를 면별 희생자 수만을 발표하다 보니 마을별 희생자 수 등 희생자의 구체적인 파악은 불가능하였다. 79) 현지 기초단체가 설시한 조사였지만 당시 사단정, 연대장, 대대장, 중대장 등 군의 지휘체통상의 조사는 이루아지지 않았다 - 15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