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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에서 해당 지역 주민들이 빨치산으로 활동하였거나 빨치산에 협력 하였다고 의심하여 집단 또는 소규모로 총살 · 살해한 사건이다. 1950년 11월 27일 덕림리 사건은 주민들이 신고 없이 주막에 모여 새끼 꼬는 것을 5중대 군인들이 수상히 여겨 살해하였다고 주장한다. 12월 6일 월야면 정산리 장교, 동촌마을 사건과 12월 7일의 남산꾀 사건은 한새들 전투와 관련 었는 것으로 보인다. 즉 12월 2일의 한새 들 전투 3일 후 동촌마을 뒤쪽에서 일부 주민들이 징과 팽과리를 치며 I승리I를 자축한데 대한 보복행위였다.65) 또 수해리 사건은 태청산에 었던 빨치산이 마을에 내려와 식량을 조달해가자 주민들이 이들에게 협조하였다고 의섬하여 총살한 것으로 보인다. 6일 저녁 윌야리와 월악리 주민들과 .소년단원들은 좌익들의 강요로 손동재에서 봉핫불을 피우며 만세를 부른 것이 다음날 5중대가 남산뢰 에서 벌인 집단총살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1950년 12월 31일의 쌍구룡 사건과 1951년 1월 12일 모평 사건 그리고 1950년 1월 14일 우 치리 사건은 소개나온 주민들이 식량등을 가져오기 위하여 마을을 왕 래하자 5중대가 이들을 빨치산 내통자로 의섬한 나머지 군 · 경 가족을 제외한 모든 주민을 선별 없이 총살한 사건이다. 그리고 모평마을 사건은 전날 밤 비녀봉에서의 중대본부 공격과도 연관이 있다고 하겠다. 또 12월 9일 외치리 사건은 빨치산의 5중대에 대한 도로 교란작전이 주민총살의 빌미가 되었을 것으로 보이며l 같은 날 나산면 이문리 사 건은 좌익 · 부역혐의자 색출과정에서 집단 총살되었을 가능성이 크 다. 1월 14일 나산면 우치리 사건은 공비소탕작전 진격과정에서 벌어 졌고 5중대 진격소식이 전해오자 젊은이들이 마을에서 모습을 감추어 희생자가 대부분 노약자들이었다. 65) 그 전날 군인 2명이 선기마을에서 죽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빨치산들이 봉화를 올라고 그러 니까 그랬던 것 같습니다. 또 제가 듣기로 장교마을에 <joo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 때문 에 여자와 아이들까지 죽었다고 들었습니다. (신청인 서백수 진술조서, 2006. 7. 25.) 어머니와 이모가 밥을 하는데 5중대 군인들이 마을을 포위하고 큰소리로 “대한민국 군인이 들어 왔다. 모두 밖으로 나와라”해서 나갔습니다. 군인들이 연설하는 줄 알고 작은 이모는 아기를 업 고 맨 앞에, 어머니는 아기를 업고 이모뒤에 앉았습니다.(신청인 한정옥 진술조서, 2006. 5. 25.) - 13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