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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들러 “여기 았으면 다 죽으니 빨리 피하라”고 해서 일부 사람들 이 도망했지만 미처 피하지 못한 사람들은 희생되었다고 한다.5딩 우치 려 사건은 불갑산 용천사 아래 대각려 주민이 피난을 나올 수 있는 거 려여서 이들이 대각리에 왕래하며 빨치산에 협력하고 있다고 판단하여 집단 총살한 것으로 보언다. 우치리 사건이 발생하자 이오섭 나산면장은 5중대장 권준옥 대위를 찾아가 주민총살에 대하여 항의하였다. 이 항의 이후 5중대에 의한 이 지역 집단총살은 중단되었다.56) 함평지역에서 마을벌 집단총살사컨이 우치리에서 끝난 것은 시거적으로 토벌작전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것 과도 관련이- 았겠지만 나산면장의 항의가 결정적 역할을 하였을 것으 로 보인다. 12) 함평군 월야/ 해보l 나산면지역 소규모 희생 사건 5중대가 해보면 금덕리 문장장터에 주둔하는 동안 소규모 민간언총 살사건이 인근 여러 동네에서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빨치산이 야간에 이들 동네에 내려와 식량 등을 가져갔는데 이 때문에 주민들은 군으로 부터 빨치산에 협조하였다는 의심을 받아 희생을 당하였다. 대표적으 로 안길원의 부 안해동/ 이기신의 형 이성신l 최병수의 숙부 최남휴 등 이 그 사례에 해당된다 5끼 이재문의 부 이정섭의 경우 아들이 인민군 54) 5중대 군인들이 오전 10시 30분경 마을에 들어와 주민들을 모아 놓고 기관총을 쏘아 주민 중 어 린이 8명, 노약자 6명, 불구자 1명, 부녀자 5명 등 20명을 현장에서 총살하고, 2명이 부상했으 며, 부상자 2명 중 1명은 며칠 후 사망하였습니다. 어머니도 59세였는데 사망하였고 부상자는 정유예라는 노인이 있었는데 87세까지 살다가 돌아가셨습니다. 부녀자 5명 중 3명은 젖먹이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신청인 이계준 진술조서, 2006. 5. 17.) 55) 신청인 김재경, 진술조서 5쪽, 2006. 8. 9. 56) 김영택, 『한국전쟁과 함평양민학살J , 2001, 사회문화원, 138쪽. 57) 아버지 안해동이 1950년 n월 29일(음) 함평군 해보면 금덕리 구장터에서 5중대 소속 군인들에 게 종격을 받아 사망하셨습니다. 부모님과 고모 저 어린 여동생 그렇게 5식구가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신청인 안길원 진술조서, 2007. 1. 18,) 저의 형 이성신이 1950년 12월 13일경(음 11월 5일) 해보면 금덕리 사자등마을에서 5 중대원에게 희생되었습니다. 군인들이 형을 잡아다 해보면 금덕리 밀재 밑에서 죽여서 묻었다 합니다.(신청인 이기신 진술조서, 2006. 5. 25.) 돌아가신 최남휴는 저의 숙부인데 아이들을 데리고 여동생이 사는 해보면 고모리로 가 다 마을 입구에 진을 치고 있던 군인들에게 붙잡혀 모친 구타를 당한 후 마을 뒤 저수 지 옆으모 끌려가 총살당하는 것을 저의 고모가 직접 목격하였습니다.(신청언 최병수 진술조서, 2007. 1. 18.) 아버지 김병갑은 1950년 12월 27일(음 11월 19일) 5중대 군인들에게 끌려가 해보면 - 13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