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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청인과 참고안에 의하변 1951년 1월 12일 5중대는 대창리 성대마 을에서 가까운 인근 해보면 상곡리 모평마을 주민을 집단총살 하였는 데 군인들은 마을에 들어가 집집마다 불을 지르며 “살려면 쌍구룡쪽으 로 나오라”고 소리 지르고는 나오는 대로 총을 쏘았다고 한다. 윤경중 등 신청인들은 100여 가구의 이 마을은 다른 마을에 비하여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 사회에 전출한 사람도 많았지만 지리적으로 불갑산과 가까워 빨치산의 보급기지 역할을 하기에 알맞은 곳이었다고 한다.51) 더구나 사건 전날 밤에는 모평마을 뒤쪽 비녀봉에서 5중대 본부를 향하여 총격을 가하는 일이 발생하였다.5깅 신청인들은 빨치산의 중대 본부 공격이 이날 집단총살의 주된 원인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11) 함평군 나산면 우치리 사건 이계백 동 신청언에 의하면 모평마을 사건 발생 이틀 뒤인 1951년 1 월 14일 5중대는 나산면 우치리 소재마을에 와 집안에 었던 주민들을 마을 앞으로 집결시키고 무차별적으로 총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우치리 청년들은 이미 월야면 일대와 해보 쌍구룡y 그리고 상곡리 모평마을에서 발생한 주민집단총살사건을 알고 았던 터라 마을 에서 피해버렸다고 증언했다.53) 따라서 남아았던 노약자와 여자들이 대부분인 주민들이 마을 앞으로 끌려나와 5중대 군인들에 의해 집단으 로 총살당하였다.않) 이 과정에서 일부 군인들은 제사를 모시고 었는 51) 1950년 11월 말부터 모평마을을 5중대가 소개시켜 이웃마을인 해보면 용산리 소성마을 누나 집 애서 살고 있었습니다. 장성에 주둔하던 8중대로부터 모평마을에 들어가도 된다는 연락이 와 1월 11일에 들어갔습니다 한 10일 정도 되는데, 5중대가 당시 해보를 떠나서 어디론가 갔었고, 이때 8중대가 해보로 들어와서 들어가도 좋다는 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8중대는 바로 떠났고, 얼마 후 5중대가 들어왔습니다.(신청인 융경중 진술조서, 2006. 5. 18,) 그때는 굶어 죽을 판이어서 없는 사람뜰이 그곳에 남아 있다가 변을 당했습니다. 원래 모평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은 다른 곳으로 다 나가 버렸고 남아 있는 사람들은 다른 곳에서 들 어온 사람이나 노인들 노약자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신청인 노병량 진술조서, 2006. 7. 12.) 52) 김영택, 『한국전쟁과 함평양민학살J , 사회문화원, 2001, 127-128쪽. 53) 국군들이 들이닥친다는 소문을 듣고 사건 발생 하루 전에 큰집 식구들과 큰누나, 작은누나, 본인 은 미리 피신을 했습니다. 아버님은 우리가 피신한 장소를 확인하고 다시 다른 곳으로 갔습니다. 갓 태어난 동생을 데리고 있던 어머니와 다리가 불편한 외삼촌은 집에 있다가 군인들에게 변을 당한 것으로 생각됩니다.(신청안 이계백 진술조서, 2006. 5. 18,) - 1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