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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사람들을 사살한 다음 따라온 청년방위대원(청방)을 시켜서 시 체를 방죽에 던져 넣었다. 본래 방죽은 깊이가 한길은 되었지만 겨울 여라 물의 깊어가 무릎 정도 되었다. 이 과정에서 넘어져 있던 이금남 은 살아있는 채로 방죽에 던져 넣은 청년방위대원의 지혜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한다.4끼 사건 당시 성대마을 원주민들은 대부분 광주 등 외지로 피난을 한 상태였으며 거주자의 대부분은 불갑산 용천사 아래 마을인 광암리에서 군 • 경의 명령으로 소개되어 온 사람들이었다.짧) 선청인 장재수는 사건 현장인 성대마을과 광암리의 거리가 5킬로미 터에 불과했기 때문에 식량 등을 가져오기 위해 이들은 광암리에 왕래 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진술하였다.49) 또 청방으로 근무했던 참고언 김석주는 사건 하루 전날 5중대는 성 대마을 너머에 있는 천주봉으로 토벌 작전을 나갔다가 어수산과 월앙 산 방향에서 빨치산들이 총을 쏘아 군인들이 더 진격하지 못하고 후퇴 하였다고 증언했다 5이 군인들은 성대 마을에 빨치산이 있거나 협조자 가 있다고 생각하여 주민들을 집단 총살한 것으로 보인다. 1이 함평군 해보면 상곡리 모평 사건 46) 신청인 박용원, 진술조서 5쪽, 2006. 7. 12. 47) 시신 1구당 청방요원 4명이 달라붙어 시신을 방죽으로 던져 넣었습니다. 그런데 청방이 옆으로 오자 “나 좀 살려주시오”라고 하여 청방이 죽은 사람처럼 들어서 방죽에 던져 넣었습니다. 그래 서 기어서 방죽 가 쪽으로 나가려고 하는 데 같은 동네 청방이 “나오면 죽으니까 나오지 말라” 고 하면서 총소리가 나지 않으면 나오라고 하여 군인들이 철수한 후에 살아남은 마을사람을 따 라 집으로 갔습니다.(신청인 이금남 진술조서, 2006. 7. 14.) 48) 성대마을에는 원래부터 살던 사람 중 부유층은 광주로 미리 피난을 가 빈집이 많았습니다. 이러 한 빈집에 불갑산 밑에 살던 사람들이 와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라고 가끔 경찰이 낮에 와서 빨 치산에게 부역을 하였는지 등을 조사한 적이 있었습니다.(신청인 김형술 진술조서, 2006. 7. 11.) 49) 저는 해보면 광암리 운암에서 대대로 살았으나 한 달 전 경찰이 소개령을 내려 해보면 대창리 성 대마을로 왔습니다. 운암마을하고 거리가 가까워 식량이라도 가져다 먹기 위해 소개령이 내려지 지 않은 성대마을로 소개되었습니다. 당일 오전 10시에서 11시 사이 모평마을 방향에서 총소리 가 들라면서 군인, 청방들이 마을에 진입하고 공포탄을 10여발 쏘고 집집마다 불을 지르면서 살 려면 빨리 마을 앞으로 나오라고 하여 나갔습니다.(신청인 장재수 진술조서, 2006. 7. 13,) 우리 마을에는 불갑산 근처 해보면 산내리, 광암리 사람들이 소개되어 와서 살았습니 다. 원래 성대에 살던 사람은 밤이면 빨치산이 내려와 주민들을 못살게 굴어 피난을 갔 습니다. 또 군인, 경찰가족은 피난을 갔습니다.(신청인 김종회 진술조서, 2006. 7. 13.) 저는 사건 40일 전에 광암라에서 성대마을로 나왔는데 식량 등을 가져다 먹기 위하여 8, 9번쯤 광암리에 왔다 갔다 한 적이 있습니다.(신청인 박용원, 2007. 6. 8. 전화탐문) 50) 참고인 김석주, 진술조서 10쪽, 2006. 6. 29. - 1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