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page

한민국에 협력하고 밤에는 좌익들에게 협력해야 했다.43) 그러나 김。 O는 사건 당시 마을에 있지 않았고 그 후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에 서 붙잡혀 정역 6년을 복역하였다.없) 신청언 김수창의 진술에 의하면 군인들은 주민들을 이문리 이문초등 학교 운동장에 가족별로 앉힌 다음 i군 · 경 가족은 나오라’고 하여 나 머지 주민들과 분리하였다. 일반 주민 중 택호와 이름을 부르며 지목 하면 가족들이 따라 나가기도 하였다. 군언들은 선별한 주민을 이문초 등학교 옆 나산천변으로 데려가 총살한 다음 마을에 불을 지르고 남은 주민들은 소개하였다고 한다.45) 9) 함평군 해보면 쌍구룡 사건 쌍구룡 사건의 신청인과 참고언에 의하면, 5중대 군인들은 1950년 12월 31일 해보면 대창리 성대마을에 들이닥쳐 마을을 에워싼 채 불을 지르며 “죽지 않으려면 모두 나오라”고 하여 주민을 해보중앙초등학교 부근 쌍구룡으로 집결시켰다고 한다. 군인들은 끌려나온 주민들 중 남자들을 골라 해보중앙초등학교 옆 길가에 앉혀놓고 기관총을 발사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주민 중 장진섭 이 일어나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왜 죽이느냐고 항의하자 군인은 대 검으로 그의 가슴을 찌르고 총살하였다. 남자들이 모두 죽자I 배수로 쪽에 앉아 있는 여자들을 도로건너 밭으로 한명씩 가도록 한 후 하나 하나 총으로 쏘았다. 한 주민이 군경가족도 죽이느냐고 묻자 그때부터 군경가족을 한쪽으로 골라낸 다음 총살을 계속하였다고 진술하였다.46) 43) 그때는 어수선한 상황이어서 낮에는 아군에 협력하고 밤에는 밤사람들에게 협력해야 했던 시기였 다고 들었습니다. 김OO(현재 작고)라고 좌익 우두머리가 았었는데 다른 집에 비해서 많은 피해 를 입었다고 들었습니다.(신청인 오정수 진술조서, 2006. 8. 24,) 그 당시에 저희 아버지(김 00)가 나산면사무소 면서기였습니다. 그래서 좌익사람들이 총을 들이대면서 강요하니까 어쩔 수 없이 불갑산으로 끌려가게 되었답니다. 아버지는 전라북도 김제 금구에서 경찰에 잡혀서 6년간 정역을 살고 나오셨습니다.(신청인 김승 원 진술조서, 2006. 7. 12,) 44) 신청인 김승원, 진술조서 6쪽, 2006. 7. 12. 45) 저는 군인들이 돌아다니며 마을 앞 학교운동장으로 집합하라고 한다며 어른들이 와서 이야기하여 따라 나갔습니다. 운동장에 가보니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군인들이 가족별로 앉으라 하였습 니다. 경찰가족과 군인가족은 주민들과 구분하여 앉으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마을 사람 들 앞에는 거관총이 놓여 있었습니다. 군인들이 부락사람 여릿을 데리고 다니면서 마을 사람 중 “누구를 데리고 와라, 누구를 가리켜라” 하였습니다.(신청인 김수창 진술조서, 2006. 8. 3,) - 1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