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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 20명을 불러내자 청년 정기복은 군인들이 나오라고 지목하여도 머뭇거리면서 “부역한 사실도 없는데 왜 불려내느냐”고 항의하자 군언 은 곧바로 그를 사살하였다고 한다.39) 이에 항의하는 당시 윌야면 부 면장인 정기복의 형 정복만에게도 총부리를 겨누었으나 무사하였다. 정기복을 현장에서 총살한 군인들은 나머지 주민 19명을 해보면 금 덕리 문장장터의 중대본부 쪽으로 끌고 갔으나 종무소식이었다. 나머 지 주민들은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보름 후 5중대가 해보에서 잠시 철수하였을 때 해보면 금덕리 두루샘 부근에서 17구40)의 시신이 발견 되었는데 군인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유족들은 이 시신을 수습해 대부 분 현장에 매장하였다.41) 목격자들은 시신 상태로 보아 총이 아닌 죽 창 등에 의한 사망으로 판단했다고 한다. 마을이 함평군과 광산군의 경계지역이고 마을 앞 도로는 영광과 광 주간의 주요 도로인데 빨치산이 군용차량의 통행을 방해하기 위해 도 로를 자주 파손하자l 군인들은 주민 중에서 혐의자를 색출하겠다며 사 건을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은 불갑산에 있는 빨치산이 가끔 마을에 내려와 쌀y 소 등의 보급물자를 빼앗아갔고 때로는 마을 사람 들을 불갑산으로 데려가기도 하였다. 5중대는 사건 후에도 상당기간 외치재에 주둔하였다고 증언하였다.42) 8) 함평군 나산면 이문리 사건 신청인 진술에 의하면 1950년 12월 9일 오전 9시경 나산면 이문리 사정마을에 5중대 군인들이 몰려와 주민들을 이문초등학교에 모이게 하였다. 당시 이문리 김 00 등 몇몇 주민은 인민군 통치 시기 강요에 의하여 부역행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주민들은 낮에는 대 39) 신청인 정재션, 진술조서 3쪽, 2006. 5. 17. 40) 와치리 희생자 수에 대해 유족회는 18명의 명부를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희생자 수는 5중대 군 인이 20명을 골라내 현장에서 정기복은 총살되었고 나머지 19명 중 교사인 정기흥과 학련의 도 움으로 풀려나 희생을 면한 정태진 등 2명을 제외힌 두루샘 희생자는 17명이 맞다고 하였 다.(2007. 6. 5, 유족회 정끈욱 총무) 41) 마을에 50호 정도의 가옥이 있었기 때문에 추정하면 300명 정도가- 모인 것 갇습니다. 군인들은 눈대중으로 짐작하여 젊은 남자들만 골라서 나오라고 하였습니다 청년 20명올 모아서 중대본부 인 해보 쪽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 이후로 끌려간 사람들은 당일 저녁에 중대본부에서 죽였디는 소문을 들었습니다.(신청인 정지}선 진술조서, 2006. 5. 17.) 42) 선정인 정지}션, 진술조서 5쪽, 2006. 5. 17. - 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