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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좌익과 소년단 일부 등 수십 명이 내동마을 뒤쪽에 있는 손동 재에 올라 t김일성 장군 만세I 등을 부르면서 군인들을 자극하는 행동 을 하였다는 증언도 었다.35) 사건 당일 총살 현장에서 유족 중 일부는 시신을 수습하고/ 일부는 생명이 남아있는 부상자를 집으로 데려왔으나 치료가 불가능하여 이들 대다수도 곧 사망하였다.36) η 함평군 월야면 외치리 사건 신청인 정재선은 1950년 12월 초순 월야면 외치리 칠봉산 외치재에 5중대 군인들이 보초를 서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고 한다.3끼 영광과 광 주 간 도로인 이곳은 5중대 군인들이 낮에는 보초를 서다 밤이면 중대 본부로 철수하곤 하였다. 1950년 12월 9일 오후 군인들은 동네 이장을 앞세우고 마을을 돌면서 주민들을 마을 앞으로 나오라고 하였다고 한 다. 외치재 주민은 사건 전에도 두어 번 정도 빨치산이 도로를 파손하고 공격하면 그때마다 군인들에 의하여 마을 앞으로 불려나가 울력으로 도로보수를 해왔기에 그날도 별다른 생각 없이 나갔다.웹 사건현장을 목격한 정재선에 의하면 마을 앞 도로에 불려나온 주민 들은 가족단위로 모여 있었고 군인들은 10대 후반에서 20대로 보이는 35) 내동마을 뒷산언 손동재에서 그 안날(12월 6일) 저녁에 봉화를 피우며 빨치산과 내동, 지변마을 주민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당시 저도 현장에 있었는데 좌익이나 빨치산이 소집시켜 나간 주민이 100여명 되었습니다. 빨치산도 10여명 있었습니다. 빨치산이 나오라고 해서 동네사람 모두 봉화 를 피우러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어쩔 수 없이 살기 위해 주민들은 올라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빨치산은 아침에 모두 산으로 도망가고 주민들은 마을로 다시 내려왔습니다. 마을에도 좌익 활동을 했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봉화를 피우고 노래를 부른 곳은 외치재 등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지역이었습니다.(신청인 정남진 진술조서, 2007. 1. 19) 36) 남녀를 구분해서 앉았는데 여자는 몇 명 되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남산외에서 즉사하지 않은 상 태라서 당일 집안 어르신들이 이불에 싸서 마을로 데리고 내려왔습니다. 남편은 양쪽 팔과 허벅 지, 국부 등에 총을 맞았는데 그날 저녁에 사망했습니다.(신청인 백삼남 진술조서, 2006. 7. 21.) 37) 신청인 정재선, 진술조서 5쪽, 2006. 5. 17. 38) 집에 있는데 이장이 군인들과 함께 골목골목 다니면서 나오라고 아우성쳤습니다. 저희 가족과 마 을 사람들은 군인들의 지시에 의해 도로 모퉁이에서 가족별로 나이 많은 사람이 앞쪽에 앉았습 니다. 군인들은 총과 봉퉁이 등을 든 군인 7, 8명이 있었습니다. 전부 모이고 나니 군인 중 한 명이 주민들에게 “모퉁이 도로를 잘라 버렸으니 범인을 찾겠다, 마을 사람을 살리려면 자진해서 나오라”고 하였습니다. 불려나간 사람은 죽은 정기복을 포함해 20명이었습니다.(신청인 이용헌 진술조서, 2006. 7. 12,) - 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