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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현장에서 살아남은 정송모는 1950년 12월 7일 이른 아침 월야리 순촌/ 송계I 괴정/ 동산마을과 월악리 지변/ 내동/ 성주마을에는 이장을 앞세운 5중대가 집집마다 불을 지르며 주민들을 불러냈다고 증언하고 있다.26) 군인들의 언솔로 월악리 자변l 내동l 성주마을 주민들은 팔열 부정각 부근에 모여서/ 월야리 주민들은 각각의 마을에서 남산꾀로 모 여들었다. 군인들은 영문을 모르고 끌려나온 300~400명2끼의 주민을 17 세 미만과 17~45세y 그리고 45세 이상28)과 군 · 경 가족으로 분류하였 다. 또 현장에서 실제 나이와는 관계없이 외모에 의해서 연령을 지레 짐작하고 선별한 경우도 있었다고 정진천은 진술하였다)9) 이 과정에 서 정병우는 자신을 호국군3이 장교라고 밝혔다가 오히려 그 자리에서 5중대장에 의 해 권총으로 사살되 었다고 한다. 그리고 선무공작대장 윤인식과 5중대장 권준옥의 연셜31) 후I 군인들 은 17세 미만으로 분류된 청소년에게는 마을에 가서 불을 끄라며 내려 보냈다. 이어 45셰 이상의 주민에게는 내려가서 즉시 해보 쪽으로 피 난을 가라고 명령한 후 남아있는 17~45세 사람들을 따로 앉혀놓고 기 관총과 소총을 일시에 발사했다. 모두가 피투성이가 된 채 악악소리를 지르며 쓰러졌다. 잠시 후 중대장은 “살아있는 사람은 살려줄 테니 일 26) 군인들은 역할에 따라 조 편성이 되어 움직였습니다. 마을에서 사람들을 끌어내는 군인들, 남산 꾀로 사람들을 이동시커는 군인들 마을에 불을 지르는 군인들 남산외 현장에서 사람들을 지커 는 군인 등으로 구분되었습니다. 대부분의 군인은 철모에 흰색 띠를 두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높은 사람으로 보이는 군인은 작업모에 흰색 띠를 두르고 있었습니다.(신청인 정송모 진술조서, 2006. 5. 26,) 27) 신청인 정남진, 진술조서 2쪽. 당일 남산외에 모인 주민의 수에 대해서는 250명에서 500명까지 다양하게 나오고 있다. 아침을 먹고 나서 집에 있는데 아마 9시 정도나 되었을 겁니다. 군인들이 갑자기 들이닥쳐서 전 부 집 밖으로 나오라고 하여 1차적으로 지변마을의 새터(새테) 논 앞에 사람들을 집결시켜 놓았 습니다. 그리고 남산외로 모두 올라갔습니다. 남산외 주변 마을의 남녀노소가 모두 모여 있었으 니까 500명 이상얼 거라고 생각됩니다.(신청인 정태환 진술조서, 2006. 6. 29,) 28) 선별의 기준이 되었던 연령대에 대해 여러 설이 았다. 총살 대상의 기준이 15-40세, 17-45서1], 15-45세로 엇갈리고 았다. 29) 저희 아버지는 젊었을 때부터 턱수염을 기르고 생활을 하셨답니다. 그래서 군인들이 봤을 때 나 야가 많은 것으로 착각하여 노약자로 구분해서 살아났답니다. 형님은 빨리 성장을 해 죽은 것 같 습니다. 아버지하고 형님이 함께 끌려갔는데 아버지는 노인저렴 수염이 엽수룩하게 나 있어 남산 외에서 살아 내려왔고 형님은 남아 았으라고 했답니다.(신청인 정진천 진술조서, 2006. 6. 28) 30) 호국군은 전투 예비병력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으로 1948년 11월 30일 창설되어 1949년 8월 31 일 해체되고 역할은 청년방위대에 넘겨주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한국전쟁사의 새로운 연구J , 2001. 31) 권준옥은 “너희들 같으면 도저히 시국을 안정해 나갈 수 없다. 너희들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는 춰지의 연설을 하였다. 정봉규 증언, 제4대 국회 r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위원회속기록J (전남반), 14쪽, 1960. 6. 8. - 1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