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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신청언의 진술에 따르면 동촌마을에서도 장교마을 사건 발생일과 칼은 12월 6일 동이 틀 무렵, 5중대 군언이 진입하였다. 5중대 군인 중 일부는 장교마을 쪽에서l 나머지는 서촌과 고실마을 방향에서 논을 가 로절러 동촌마을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신청인 곽상덕은 5중대 군인들이 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불을 지르 며 큰소리로 주민들을 동네 앞으로 모이라고 하여I 여자와 어린이를 제외한 나머지 주민은 동네 앞 논으로 들어가라고 한 뒤 논으로 들어 간 남자들을 총살하였다고 한다.13 ) 그리고 남은 주민들에게 성냥을 나 누어 주며 마을에 내려가 미처 타지 않은 집에 불을 지르라고 하였다. 5중대는 이렇게 작전을 끝낸 뒤 살아남은 주민들에게 중대본부가 았는 해보면 문장으로 소개하라고 지시하였다.왜 신청인 곽상태는 장교마을에서 총소리가 들려오자 몇몇 청년들은 마 을 뒤로 도망가기도 하였다고 진술하였다.15) 사건을 목격한 주민들은 사건 며칠 전 마을 뒤에 있는 한새들 앞에서 있었던 5중대와 빨치산의 I한새들 전투I를 사건의 원인으로 꼽고 있다.16) 더욱이 사건 전날인 12월 5일 밤 좌익들이 마을 뒷산 고개에서 모닥 불을 피워놓고 팽과리를 치며 3일 전에 한새들 전투에서 5중대 군인 2 13) 새벽에 군인들이 마을에 들어와서 주민들을 모두 동네 앞(현재 마을회관 건너 논)으로 나오라 고 했습니다. 마을 앞으로 나가보니 군인들 일부는 길가에 모여 있고 일부는 서촌에서 논을 건 너 동촌마을로 건너왔습니다. 군인들은 여자와 어련이를 제외하고 남자들은 모두 일어서서 논 으로 들어가라고 하고 논으로 들어간 남자들에게 기관총으로 사잘했습니다.(신청인 곽상덕 진 술조서, 2006. 7. 26,) 14) 김영택, r한국전쟁과 함평양민학살J , 2001, 사회문화원, 95쪽. 15) 당시 저는 만 17세였는데, 아침 7시 반 정도에 일어나서 마루에 나가보니 건너편에서 군인들이 우리 마을로 오는 것을 보고는 겁이 나서 옷을 갖춰 입고 뒷산으로 도망을 쳤습니다.(신청인 곽상태 진술조서, 2006. 5. 25.) 16) 빨치산이 월야지서에 총을 쏘고 한새들을 거쳐 시목마을 쪽으로 도주했고, 월야지서에 주둔하 고 있던 5중대는 이들을 추격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시목마을 쪽에서 빨치산이 사격을 했고 군 인 2명이 사망하였습니다. 이튿날 아침 주민들이 시체를 보니 이미 옷을 벗겨 갔고 시선에다 죽창을 말뚝처럼 2, 3개씩 박아 놓았습니다. 아마 보도연맹 등 군, 경에 의해 가족을 잃은 사람 들이 원한으로 그랬던 것 같습니다. 당시 한새들 옆 옛가는 모래사장이었는데, 그 곳에 한 명이 죽어 있었고, 한 명은 시목마을 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 죽어 았었습니다. 제가 보았는데 모래사 장에 있던 군인은 목 뒤에 총을 맞았습니다. 교전 당시 빨치산은 세 군데에 매복해서 총을 쏘 았습니다. 시목, 내정, 그리고 선기마을 뒷산 등 세 곳에서 한새들을 내려다보며 총을 쏘았습니 다.(참고인 이행하 진술조서, 2006. 6. 28,) 신기마을 앞에 한새들이 있는데 그 중간에 물을 공급하는 지하보가 있었습니다. 그 곳에 군인 들이 몸을 숨기고 전투를 하는데 빨치산이 저수지 물을 터서 지하보에 물을 넣어버리니까 논 위로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와중예 군인 2명이 죽었습니다. 지하보에 물을 넣은 것으로 봐서 동촌마을 사정을 잘 아는 빨치산들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새틀 전투가 있고 2, 3일 후에 군인들이 마을에 불을 질렀습니다.(참고인 장두병 진술조서. 2006. 6. 28,) - 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