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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과 빨치산의 전투에서 2명의 군인이 전사했던 한새들이 있고 전 투5) 중에 일부 주민들이 마을 뒷산에서 정과 팽과리를 치며 빨치산을 고무하였던 사건이 있는데/ 신청언r 참고인들은 이 사건이 희생사건의 주요 원언으로 증언하였다. 장교마을이 동촌마을 들머리에 위치하였던 관계로 군연들이 동촌마 을에 들어가면서 장교마을까지 토벌대상에 포함시켰다. 양영언에 의하면 당시 5중대장은 윌야면에서 해보면 가는 방향의 들 판언 한새들이에서 전사한 두 명의 군인을 화장하고 사병들 앞에서 복 수를 다짐하였다고 하는데 그것이 4일 후 장교마을 주민 집단총살을 발생시킨 것끼으로 보언다. 신청인 서백수는 장교마을에서 안00 등이 빨치산 활동을 한 이유 로 주민이 희생되었다고 진술하였다.8) 그러나 사건당일 안o 。를 비롯 한 마을의 좌익은 마을 내에 있지 않았으며 집단총살 된 피해자들은 좌익과는 관련이 없는 동네 주민이었다. 신청인 강풍전은 당시 마을의 가구 수가 7가구였다고 기억하고 있었 다.9) 피해자 수는 22명m)/ 15명11)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위원회에 신청 한 3명은 모두 9명이 총살되었다고 진술하였다. 안종필(신청 외)은 어머니 강영주의 등에 업혀 어머니와 함께 총에 맞았지만 살아남았고 형 안종탁은 사망하였다 1기 3) 함평군 월야면 정산리 동촌마을 사건 장교마을과 안접한 동촌마을은 80여 가구가 살고 있던 큰 마을이었 5) 전투가 마을 앞 들판인 한새들에서 일어나 사건관련 유족들은 1950년 12월 2일의 국군과 빨치산 의 전투를 한새들 전투라고 부르고 았다. 6) 참고인 김석주, 진술조서 6쪽. 2006. 6. 29. 7) 양영언 증언, 김영택Ii한국전쟁과 함평양민학살.! , 사회문화원, 2001, 272쪽에서 재인용. 8) 신청인 서백수, 진술조서 5쪽, 2006. 5. 25. 9) 감산댁과 딸 2명, 우리집은 이모 이복례와 아들 어머니와 동생 등 4명, 나산댁에서 5명, 흥정댁에 서 2명, 강영주의 아들 안종탁과 그리고 김연석이 사망하였습니다.(신청인 강풍전 진술조서 3쪽, 2006. 5. 16,) 10) 강영주 증언, 김영택Ii한국전쟁과 함평양민 학살』 사회문화원, 2001, 203쪽에서 재인용. 11) 신청 인 강풍전, 진술조서 3쪽, 2006. 5. 16. 12) 형님은 고환에 총알이 관통하여 현장에서 죽었습니다. 어머니가 저를 업고 있어서 어머니 팔과 옆구리를 뚫고 제 엉덩이까지 총얄이 뚫고 나갔습니다. 어머니는 그 후로 한쪽 팔을 전혀 사용할 수 없습니다. (참고인 안종필 진술조서 3쪽, 2007. 3. 16.) - 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