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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으며 이를 안동부 관찰사가 수거하여 내부에 보고하였다. 1895년 9월 18일에는 대전의 유성 에서 문석봉에 의한 항일 의병이 일어났다. 문석봉은 국수보복(國讐報復)을 목적으로 봉기하 여 을미의병의 효시를 이루었다. 이와 같이 서울을 비롯하여 안동, 원주, 구월산, 유성에서 의 의병 봉기는 을미사변에서 비롯되었다. 을미사변은 갑오변란과 함께 반일 의병 투쟁의 주 요한 계기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갑오경장의 일환으로 추진된 변복령과 단발령 역시 의병 봉기의 중요한 요인으로 작 용하였다. 조선말 의복 제도는 수차에 걸친 개정을 거쳐 점차 서양식 복제로 바뀌어 갔다. 이 개정은 유생들의 주체적인 문화 인식에 충격을 가져와 반일 봉기에 중요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이와 같은 인식의 바탕에는 ‘법복’으로 상징되는 전통 문화에 대한 독존적이며 배타 적인 가치부여의 동기가 내재해 있었다. 1894년 9월에 의복 제도의 개정 문제가 제기되었다. 군국기무처에서 의제 개정에 관한 의 안을 상정하였던 것이다. 같은 해 12월에는 칙령 제17호를 반포하여 관복을 더욱 간소화 시 키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1895년부터 조신의 대례복에는 검은 색 깃인 흑단령을 입게 하고 궁에서의 통상 예복으로 흑색의 두루마기[주의(周衣)]와 조끼형의 관복인 답호를 입고 관모 인 사모(紗帽)와 화자(靴子 ; 사모관대를 할 때 신던 신발)를 착용하게 하였다. 또한 일반 백 성에게도 흑색의 두루마기를 입도록 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을미변복령의 요체로 흑색의 두 루마기를 입도록 조처한 이유를, 첫째 의제상으로라도 관민을 구별하지 않기 위해서이고 둘 째는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서 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을미변복령」은 의병 봉기의 직접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대표적인 을미의병 장 유인석이 「을미변복령」이 반포된 뒤 ‘을미훼복시립언’(乙未毁服時立言)을 발표하여 “천지 (天地)와 성현(聖賢), 선왕(先王), 부조(父祖)에 죄를 지은 것이니 살아서 장차 어찌하리요”라 고 절규하는 것으로도 입증이 되고 있다. 최익현도 ‘청토역복의제소’(請討逆復衣制疏)를 올 려 의제를 바꾸는 것이 불가함을 역설하였다. 전통적인 의복 제도를 조선 문화의 긍지로 인 식하던 수구적 지식인들은 변복령의 반포로 인해 심각한 위기의식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 들에게 복제의 개정은 그 자체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지선극미한 전통 문물의 단 절을 의미하는 것으로 귀착되었던 것이다. 특히 ‘음사(陰邪)’로 상징되는 흑색의 복제를 채택 한 데 대해서는 더욱 그러한 성향이 강하게 노정되었으니, 변복령은 을미의병의 중요한 동인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