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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1월31일 화요일 7 (제121호) 특집 大同譜編纂委員會및編輯委員 △위원장박래식(010-7169-9140) △상근부위원장박상범(016-481-6552,국당공파) △부위원장 문림랑공파박진식(010-2290-1889,대구시)/난계공파박진하(010-4907-6936,옥천읍)/ 이요당공파박희삼(010-5402-1538,대전) △ 편 집위 원 ○문림랑공파박영식(010-4204-6565,제주시)/박남근(010-2079-6972,광주광역시)/ 박영동(010-2838-8384,대구)/박태암(010-3121-0635,달성군)/박태인(010-9310-4842,진주시) ○난계공파박원하(적명임용010-3203-3172,인천)/박팔만(010-4562-1488,여수)/ 박희태(010-5484-9849,옥천읍)/박종철(010-5546-3333,구미)/박희문(010-2877-0757,대구) ○국당공파박희원(010-4122-0127,영동읍)/박근용(010-5568-1564,영동읍)/박세열(016-468-3735,황간면)/ 박재용(010-4841-0412,영동읍)/박희조(010-7756-8199,거창읍)/박종운(011-526-5648,대구)/ ○이요당공파박희복(010-3412-6903,심천면)/박의부(010-2869-2173,대전)/ 박희선(010-2423-5644,김천)/박상용(010-4456-8055,대전)/박세종(010-8108-2304,대구) 密陽朴氏僕射公派大同譜編纂委員會 밀양박씨복야공파(僕射公派 ) 대동보 편찬 안내 밀양박씨 복야공파 대종친회에서 대동보를 발간하기로 결정하였기에 공고하오니 단 기 간내에수단이정비되어우수하고귀중한족보가편찬되어가보(家寶)로보존될수있 도 록협조를부탁드립니다. 특히족보상식에밝은어른들이작고하면서이번대동보가마지막족보가될우려가있 어 종원여러분들의적극적인참여로누락되는종친이없도록하여주시기바랍니다. ◇발행기간:2015년 12월~2017년 6월30일까지 ◇발행기준:1990년(庚午譜),1979년(己未譜) ◇수단기간:2015년 12월부터 2016년12월31일까지 ◇수단접수처:충북영동군영동읍계산로2길4.종친회사무실(영동세무서앞) ◇입금은행:농협301-0181-4871-11 ◇예금주:복야공파대종회 문의043-743-3015 FAX043-744-3015 사무국장박원용010-5487-2228 ◇인쇄처대전회상사 우리 역사에서 천년 왕조(실제 992년 왕조)라 일컬어지는 왕 조가 있다.이른바신라가그것이다.언필칭신라왕조에선박씨 로서 왕이 된 도합 10명의 인물이 있다. 신라를 처음 건국한 박 혁거세(B.C57~A.D4)를 필두로 8대 아달라 니사금(154~184)에 이르기까지,신라초기를통틀어7명의박씨왕이있다. 이후 728년 동안 박씨는 왕위 계승에서 배제되었다가, 912년 느닷없이 박씨왕의 시대가 재개됐다. 김씨왕들의 치세 내내 중 앙에서는 왕위쟁탈전과 반란이 발꿈치를 뒤이었다. 정치는 도 를 잃었고 백성들은 굶주려 자식을 팔며 하늘과 땅을 원망할 지 경에까지 이르렀다. 박씨왕들의 등장은 김씨 왕들의 실정이 극 심하였음에 대한 반동이며, 또한 그럼으로써 왕위를 빼앗긴 김 씨세력들의적잖은반발이상존하기도했다. 53대 신덕왕(경애왕의 부친븡912~917), 54대 경명왕(경애왕 의 동복형븡917~924),55대 경애왕(924~927)에 이르는,15년간 3 부자(父子)에 걸쳐 박씨왕 시대의 등장에는 이러한 슬픈 현실 이 담 겨 있 는 것 이 었 다 . 신라 왕조에서 나타난 10명의 박씨 왕 가운데 경애왕은 ‘Last king븯, 박씨왕 시대의 피날레를 마감한 비운의 군주였다. 견훤 에 의해 옹립된 김부(56대 경순왕)를 포함하였을 때,신라 왕은 도합 56명이며,그 중 경애왕은 55대왕이었다.견훤이 난신적자 이기에 견훤에 의해 옹립된 김부는 정상적인 신라왕이라 할 수 없다.결국 경애왕은 박씨 일문의 최후왕이기에 앞서 신라 최후 의왕이라 해도과언이아니다.경애왕에대해더욱비감을느끼 게 하는 까닭은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는 것, ※필자가 경애왕 부모 의혼인연대를추적한 결과 경애왕의사망당시연령은30대초반으로 밝혀 졌다.이에대한 내용은다음기회에설명하기로 한다.그 것 도 다 른 누 군 가의 압박에 의한 최후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씻을 수 없는 세 상의온갖질시와거센비난을천년이상한몸에오롯이받아온 인물이라는 데에 있다. 기록에 의하면, 927년 한겨울 경애왕은 포석정에 유행(遊行)하여 주흥(酒興)에 빠졌고,때마침 신라에 침입한 견훤에게 체포되어 견훤의 강요로 자살하는 비극적 최 후를 맞이했다는 것이다.당시 견훤은 경애왕을 죽인 것은 물론 경애왕의 왕비를 강간했으며 군사들을 풀어 궁중의 비빈마저 집단 강간하는 등일대난행을일삼았다고되어있다.※『삼국사 기』권12신라본기12경애왕4년11월조 경애왕의 죽음은 1090년 전에 일어난 오래 전의 일이었다. 하 지만 현재의 박씨 일문은 모두 경명왕(54대 신라왕) 소생 여덟 아들들의 혈맥임을 자처하고 있다. 그 경명왕의 동복아우가 경 애왕이다.박씨일문이뿌리나다름없이여기는경명왕,그의친 아우가 경애왕이라는 사실은, 경애왕과 관련하여 제기된 모든 추문과 비행(非行)에서 박씨 일문이 결코 한 발자국도 자유로 울 수 없 음 을 뜻 한 다 . 경애왕의 최후와 관련한 기록을 정리하면, 1)명색이 신라왕 이면서 난신적자 견훤에 의해 죽임당한 점 2) 국사를 팽개치고 술독에 빠져 죽음을 재촉한 점, 3) 견훤에 의해 경애왕 자신의 왕비가 강간당한 점,4)견훤의 군사들에 의해 궁중의 비빈마저 집단 강간당한 점, 5)나라를 누란의 위기로 몰고 간 점 등으로 요약된다. 박씨 일문이 신라 왕가의 혈통을 내세우는 한,그와 비례하여 위의 내용들은 결코 지울 수 없는 ‘주홍글씨’가 아닐 수 없다.쉽 게 말해 박씨 일문은 오래 전의 역사를 더듬을 때, ‘작은 할머니 가 ‘여자로서 씻을 수없는 치욕을 당한’집안’이며,술독에빠져 왕의 자리를 빼앗겼으며, 신라 왕조를 역신에게 내어주고 쇠락 을 자초한 멸국의 집안이라는 질시와 조소에서 벗어나기 어렵 다는 것을 함의한다.까닭에 경애왕과 관련한 제 문제는 과거만 의 일이 아니며, 현재, 그리고 미래를 고려할 때 진중하게 곱씹 고엄밀히대조,탐구해봐야할사안이아닐수없다. 경애왕이 자만과 독선에 빠진 혼군(昏君), 일족과 군신, 비빈 모두가 괴멸하는 단초를 제공한 장본인이라는 프레임을 벗지 못한다면,박씨 일문의 욕됨은 가히 인구에 회자되며 천지에 두 루미치고도남음이있다고하겠다. 경애왕의 죽음과 관련하여, 『삼국사기』는 작심이라도 한 것 마냥 책의 3곳에 걸쳐 경애왕의 향락과 무능을 집중 조명하고 있다. 『삼국사기』에서 경애왕의 죽음을 논한 것으로는 1)경애 왕조,2)경순왕논왈조,3)열전견훤조등세곳이있다. 감수국사 김부식을 필두로 한 일군의 고려 역사학자들은 『삼국사기』속에서, ‘황락(荒樂)’ ※『삼국사기』 권12 신라본기12 경순왕 사론 ‘연간(燕갹) ※『삼국사기』 권12 신라본기12 경순왕 사론 , ‘출유(出遊)’ ※『삼국사기』 권12 신라본기12 경순왕 사론, ‘유 ( 遊’)’ ※『삼국사기』 권12 신라본기12 경애왕 4년조, ‘연오(宴娛) ※ 『삼국사기』 권12 신라본기12 경애왕 4년조 , ‘치 주 (置 酒 ) ※『삼국사 기』 권50 열전10 견훤 ’ , ‘오락(娛樂) ※『삼국사기』 권50 열전10 견훤 등으로 압축되는 일련의 문구들을 잇달아 사용하였다. 그리하 여 , 경 애 왕 의 죽 음 을 ‘ 최 후 의 술 판 , 주 연 ’과 떼 려 야 뗄 수 없 는 관계로 철저히 못 박았다. 경애왕은 무능, 황음, 난정의 대명사 이자나라를망친망국의군주로정죄되었다. 그 결과 경애왕은 고려, 조선을 거치며 숱한 시인묵객, 지식 인, 유학자 등의 줄기찬 조소와 지탄을 받아 왔다. 숫자조차 헤 아리기 힘든 절대 다수는 다투어 포석정의 주연을 목청을 돋우 어 힐난하였고, 경애왕 자신의 죽음, 혹은 신라 멸망의 원인과 어김없이 결부지어 왔다. ※김영숙,『詠史詩의 신라멸망기 븮鮑石亭宴 븯 史話수용 양상과 의미』,대동한문학회지22, 2008,12 경애왕을 망국의 군주라 지탄한 인물로서 우리가 잘 아는 인 물이 또 하나 있다. 1433년 10월 28일, 조선의 4대 임금 세종은 중신들을모아놓고술의폐해에대하여다음과같이교시했다. “옛날 신라가 포석정에서 패하고, 백제가 낙화암에서 멸망한 것이 술 때문이 아닌것이 없다”,“술이야말로 패가망신,망국의 첩경이며,나아가 그 장본인이 다름 아닌신라 경애왕과 백제 의 자왕뷻이었다.(븮조선왕조실록븯세종15년10월28일) 경애왕은 세종의 입을 통하여 의자왕과 더불어,‘망국의 왕’이 란 사슬에 영락없이 묶여졌다. 그리하여 고려에 이어 조선 왕조 내내경애왕은가장무능하고타락한왕의전형으로여겨졌다. 조선 멸망 이후에도 경애왕은 역사 속의 멍에를 벗지 못하였 다. 일본은 나라를 벼랑의 위기로 몰고 가 망치게 한 ‘포석정 사 건’의 면모를 더욱 생생히 들춰내고자, 포석정을 『고적 1호』로 삼아회한의신라역사를뚜렷이부각시켰다. 조선의 멸망 원인을 당쟁에서 찾은 일본은,신라 멸망의 가닥 을 포석정 사건에서 찾으려 했다. 그 이면에는 ‘적이 쳐들어와 도 아랑곳하지 않고 임금과 중신들이 질탕하게 퍼마시고 놀았 으니 망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에는 식민지로 살 수밖에 없다.’ 는 패배주의를 조선인들에게 은연 중 심어주기 위해 이 비운의 장소를정비하고복원한뒤고적1호로지정했다. 지금은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사적1호로 포장된 포석정을 찾 아 뒤엉킨 천년 왕조의 씁쓸한 종말을 감상하려는 일본인들의 발걸음이 분주히 이어지고 있다. 경애왕을 향한 비난과 조소는 여 전 히 현 재 진 행 형 인 셈 이 다 . 한국 정부의 행태는 더욱 가관이다. 중학생들이라면 누구나 의무적으로 공부하는 대한민국 국정 역사 교과서의 일단을 보 자. 불과 얼마 전까지도 대한민국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된 국정 교과서,그 뒤를 이어 지금까지도 사용되는 검인정 교과서의 내 용은경애왕관련서술이얼마나심각한지깨닫게한다. 경 애 왕 이 술 잔 치 에 빠 져있다가견훤의침입조 차 몰 랐 고 , 결 국 체 포 되 어죽었다는친절한설명 과더불어포석정사진까 지 싣고 있다. 중학생이 라면한창감수성이예민 할 나이의 청소년들이다. 이 시 기 한 번 형 성 된 지 식과 경험은 평생을 간 다. 그들을 대상으로 경 애왕의 주연을 기정사실 화하여 세뇌, 학습시키 고있는셈이다. 한데 위의 사진에선 씁쓸한 역사 왜곡의 증거가 어김없이 확인된다. 경애왕이 견훤 에게 체포되었다는 시점은 음력 11월이었다. 한데 해괴하게도 위의 교과서에는 ‘한여름 포석정’의 사진이 실려 있다. 견훤의 침입은 음력 11월이었다. 그럼에도, 위의 국정 교과서 및 그 뒤 를 이은 검인정 교과서에서는 하나같이 ‘한겨울 포석정’사진을 게재하지 않고 있다. 눈 덮인 포석정 사진이 실렸을 때, 학생들 은 스스로 생각하고 추단하여 포석정 술잔치가 얼마나 허구와 악의에가득찬기만인가직관으로깨달을수있다. 상식을 가진 누가 보더라도 매서운 칼바람이 부는 한겨울, 남 산의차디찬곡풍이불어오는포석정에서술잔치가있었음에일 차 의구심을 가지게 된다. 게다가 경애왕의 치세는 안으로는 왕 위를빼앗긴김씨일족의일부가앙앙불락하며내란을선동하던 때였다. 밖으로는 견훤이, 경애왕 타도를 외치며 심리전을 펼치 고영천에서서라벌로의침구를호시하던백척간두의때였다. 경애왕의 우군이라던왕건조차 경애왕의 위기에 철저히 방관 하고 있었다. 경애왕에게 있어, 보이 는 것은 모두 적뿐이었다. 은인자중 안팎의 위기 속에 군기를 점검하고 활을 쏘고 말을 달려야 할 시기,시종 신료와 여자를 데리고 경애왕이 질 펀한 연회를 열었다는 것은 전대미 문의 사건이자, 당시 상황에서 있을 수 없는 사건으로서 누가 봐도 괴이 하다. 경애왕이 맞이한 절체절명, 위 기의 시간 속에서 따뜻한 구중궁궐 도 아닌,사방이 적에 의해 노출된 포 석정에서 술을 퍼마시고 해롱거렸다 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으로서, 심 각한언어도단이아닐수없다. 한데 현재의 한국 정부와 역사가 들은 학생들이 경애왕의 주연에 대 해 가 질 수 있 는 합 리 적 의 심 의 기회마저 철저히 박탈하고 있다. 엄 연 히 일 어 날 수 없 는 사 실 을 목전에 두고서도 박씨 일문은 그 간 침묵해 왔다. 진정 철저히 눈 을 막 고 귀 를 막 아 사물을 분변 하지 못했던 셈 이 된다. 이야말 로 박씨 일문에 사람이 있으되, 사람이 없다고 이를 까닭이다. 숭덕전 제례에서 정녕 아름다운 축문을 읊어댄들, 발뒤꿈치를 들어 걸음을 옮기는 찰나 짙게 드리워진 경애왕의 우수에 무색 해지고마는 것임에랴.아!사변에는고금이없고 충의에는 선후 가 없다. 이제 고하나니 북을 울려 이런 삿된 왜곡과 만행 따위 떨쳐 공격해야 한다.삼가 필자는 외칠지니,눈 있는 자 보고,귀 있는자는듣고,입있는자는말하라. 경애왕에 대한 폄훼는 점입가경이다. 대학 교재 ※“경애왕대에 도정사는돌보지않고포석정에서잔치를벌이며놀다가비참한 최후를맞 이하기까지 하였다.” ( 전수병 외 븮주제별로 본 한국역사븯 서경문화사, 200 5, p 85.) 뿐만 아니라 학위논문 ※“신라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경애 왕대(924~927)에도 정사는 돌보지 않고 비빈ㆍ군신들과 더불어 포석정에 서 잔치하고 놀다가 결국에는 비참한 최후를 맞기까지 하였다.” (김갑동, 븮나말 려초의 호족과 사회변동 연구븯,고려대 박사학위논문. 1989, p. 10) , 대백과사전 ※“927년 견훤은 신라를 공격하여 포석정에서 놀고 있던 경 애왕을 자살하게 하고, 궁궐을 노략질하면서 경순왕을 세우고 돌아갔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븮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븯 경애왕조). 해방 이후 한 국학 연구 성과를 집약했다고 자부하는『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조차 이러한 인식은 계승되고 있는 셈이다. 연구의 저변, 근간 역할을 한다 고 자처하는 대백과사전의 기술조차 이럴진대, 향후 이런 인식의 확대ㆍ재 생산은 불을 보듯 명백하다. 에조차 포석정 사건의 묘사는 다르지 않다.경애왕이 흥청망청 주연을 베풀었고 그런 와중 후백제 견 훤에게 피살되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서울 용산 용산동 국립중앙박물관의 동영상에 곁들여져 일반에게 상시 상영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경애왕 ‘위응’이야말로 신라의 쇠락을 자초한 무책임한 왕이란 질타가 공공연히 언론을 장식하기도 했다. ※ 김종성, 「신라 재앙의 날, 박씨는 연락 두절 상태였다.」, 오마이뉴스, 201 4.8 또 KBS 드라마 『태조 왕건』(2001,9,30일 방영)에선 경애왕 이, 견훤이 거느린 반군을 지척에 두고 질펀한 주연을 벌이던 중 왕도가 함락되었으며, 경애왕 자신은 견훤에게 무릎을 꿇고 죄인처럼 목숨을 구차하게 구걸하는 등 온갖 수모 끝에 비극적 죽음을맞이한것이방영되었다.이후KBS는박씨대종회를위 시한 일문의 거센 비난에 휩싸여 공식 사과 성명을 발표하는 등 난맥상조차 연출했다. 한데 이런 내용은 아직도 유투브에서 공공연 히시청가능하다 ※유투브에서 ‘경애왕’으로 검색하면 경애왕의 비루한 최후가 가감 없이 방영 되고 있다. ‘견훤의 서라벌 공격1, 2’ ‘신 라 경애왕을 무릎 꿇린 후백제 견훤왕’ ‘ 태조 왕건 155회’ 등이 그 것이 다. 시간은 바람처럼 흩어지지만, 역사는 꿈결처럼 사라지지 아니한 다. 최근 일각에선 경애왕이 포석정 에 행차하여 전몰장병 추모와 관 련이 있는 팔관회, 남산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 국가의 안녕을 빌었 던 일련의 불계( 삔긔), 제천행사 를벌였다는주장이나왔다. 하지만 이것도 사실이 아니다. 경애왕이 보인 행적을 훑어보 면 매우 적극적, 호전적, 저돌적 성정이 확인된다. 그러한 성정 의 경애왕이, 뜬금없이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자세로 제사를 지 내며 신의 가호만 빌었다고 하는 것은 논리적 정합성이 떨어진 다.전몰자의 진혼을 위한 팔관회라는 주장도 진혼은 대개 전쟁 이 종료된 직후 행해졌다는 점, 이전 수백 년 동안 팔관회가 개 최된예가없다는점에서설득력이떨어진다. 오호라! 오직 지혜로운 이들만이 경애왕과 관련한 저간의 사정을 문달(聞達)할 수 있을 것임에랴. 진실로 말하건대,경애 왕을둘러싼모든것은가히미망에가려있다고하겠다. 필자는 신라 왕위 계승을 주로 연구하여 왔다.석사논문이 김 씨로서 최초로 신라왕이 된 미추였으며, 박사논문은 김씨로서 백제를 멸한 태종무열왕 김춘추였다. 김씨를 시종 연구했던 필 자가 새삼 경애왕 관련 사실을 되짚어 보게 된 데에는 2008년 어 느박씨일문의느닷없는강권과부탁에서였다. 이래 8년 여, 필자는 역사학에서 동원되는 모든 기법을 총동 원하여 역사 속에 파편처럼 산일된 자료들을 해석하고 구명하 였다.돌이켜보니 종래 연구의 본령을 넘어 새삼 박씨를 살피게 된 것은 역설적이기도 하려니와, 박씨의 입장에서 대립했던 김 씨들의 미세한 움직임을 포착하여 나간다는 것은 역사적 운명 처럼 다가오기도 한다.박씨가 박씨를 반드시 연구해야 할 필요 는 없다.허나,만의 하나 박씨의 역사 중 오류가 있고,사라지는 세상의 옛 이야기, 전적 속에서 그 열쇠를 필자가 찾고 제시할 수있다면,그몫은필자의것이라생각한다. 시경에이르기를‘너의조상을생각하지않느냐.먼저그덕을 닦으라.’하였다.경애왕이 죽고 1090년이 지났다.영겁의 시간이 흘렀어도 경애왕 영령의 신원(伸寃)은 요원하기만 하다. 사시 나무 가지에는 소소리 바람 불고 도깨비 불빛은 도래솔 숲속에 서 구슬피 반짝이는 듯하다. 아! 그 뉘라서 경애왕의 함원을 풀 어나가겠느뇨. 경애왕이 하염없는 피눈물을 흘리며 삼킨 통곡 을 누 가 있 어 노 래 할 수 있 으 랴 . 이에 2017년 연중, 필자는 연재의 형식으로 열린 마음을 지닌 지혜로운 이들을 위하여 경애왕과 관련된 당시 상황을 축차적 으로설명하여나갈예정이다. 역사비정(1) 경애왕(신라55대왕.재위924~927) 뱚Ⅰ.경애왕과포석정의술판 뱚Ⅱ.1090년전경애왕의죽음을들추는까닭 뱚Ⅲ.경애왕을둘러싼과거,현재의평가 7차(2002~2010 발행) 교육인적자원부 국 정 중학교 국사교과서(국사편찬위원회 국 정도서 편찬위원회 발행)『통일신라와 발 해』단원. P,82 A는신라의수도서라벌, B는 견훤이 주둔했던영천. C는 현재의대구(달구벌) (사진 김종성의 글 인용 ) 서울 용산 용산동 국립중앙박물관 상시 상영 동영 상 장면. 오른쪽 세로 행으로 경애왕이 술판을 벌였 고 견훤이 쳐들어온 줄조차 몰랐다는 자막이 보인 다.(오마이뉴스,김종성기자의글,2014에서발췌) 뱚Ⅳ.경애왕폄훼는현재진행형 유투브에서경애왕검색화면 뱚Ⅴ.필자와경애왕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신라왕위계승을주로연구하 여 왔다. 한국사전ㆍ역사스페 셜 패널 및팩션 작가로 븮외교의승부사,김춘추븯,븮화산군 리용상 븯 , 븮연개소문과김춘추븯,븮역사속경북의혁신인물븯,븮준봉고종후 의수평적리더십븯등험난한시대속운명을개척한인물의삶과 족적에관한글들을집필했다. ▶박순교박사는븣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