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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1월31일 화요일 6 (제121호) 기 획 서대전여고와이웃해개천을복개한도로와이어진도솔산등 산로 입구에 위치한 영모재는 충주박씨 관조(貫祖)인 부정공휘 영을 비롯한 선대(先代) 8위(位)의 위패를 봉안한 추원사(追遠 祠)가 있고 충주박씨 대종중 종무소 역할을 하고 있어 충주박씨 문중의 대표적인 재사(齋舍)로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족보 ‘忠州朴氏內外子孫譜’가대전시지정문화재제46호로지정되어 보관하고 있다. 이에 영모재의연원과 중건기 등을 통해 알아본 다. 영모재 중건기를 보면 ‘六百年 유지(遺址)가 호리지장(狐狸 之場)이 되고 말았다.’라고 전한다. 이는 1987년 7월에 폭우가 쏟아져 하룻밤 사이에 산사태가일어나 재사(齋舍)는 온데간데 없고 백사장 속에 주련 8장 중 6장만 남아 종원들의 중지(衆智) 를 모아 중건 계획을 세워 1993년 오든 역사를 마무리하여 지금 웅장한모습의영모재를중건하는계기를소개한것이다. 영모재의 시원(始原)은 영모암(永慕菴)·도동서당(道洞書 堂)이다.영모암의정확한기록은전해지지않으나구전으로 전 해오는 바는 관조(貫祖)부정공 휘 영(英)의 9世휘 진( 풂, 참 의 공)이 1366년(공민왕15) 개성에서 태어나 성균진사에 올랐으 나 나라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알고 다시금 영달의 뜻을 두지 않고 동생 소(蘇,판서공)와 함께 개성을 떠나 호서지방 덕진현 가장동(현 대전시 도마동)에 자리 할 제 효제충신(孝·忠·悌· 信)네 아들과 인의예지신(仁興·義興·禮興·智興·信興)다섯 조 카를 거느리고 수기치인(修己治人,자신을 수양한 후에 남을 교 화해야함을이르는말)의마음으로이거하여자리를잡게되었 다.이후조선초사헌부감찰과진해와직산감무를역임하고14 22년(세종4)향년 57세에 영면하여 도마동 도솔봉 밑에신좌원 (辛座原)에 예장되니 아들들이아버지를흠모하는마음으로 암 자를지었다. 이 기록은 돈파사(遯坡祠)에 배향된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박노(朴輅)는 ‘영모암을 중수하 고 성주합하에게 글을 올림(永慕 菴重修後 奉큅 城主閤下)’라며 성주에게 다음과 같은 보은의 시 (詩)를보냈다. 뷺일찍이 옥간(玉澗)가에 서재 (書齋)를 지었는데/ 병선(兵 縫) 을 겪 은 뒤 로 중 건 할 길 없 었 네 / 많은 선비 힘에 의해 창건은 되었 지만/ 중건이야 원래에 이천(二 天①)이 있음 일세/ 정말로 문옹 (文翁②)처럼 학교를 건립했고, 모두가 언씨(堰氏③)처럼 현가 (絃歌)를 사용하네/ 훈도(薰陶 ④)를 못 끝내고 농막으로 돌아 가니/ 어떻게 와철(臥轍⑤)하여 한해라도만류할사』 내용을 보면 ① 이천(二天)은 은인을 이르는 말로 남에 대하 여 은혜를사례하는데서쓰는데여기에서는성주(城主)를가리 킨다.②문옹(文翁)은 한나라 사람으로,경제(景帝)때 촉군 군 수가 되어 교화를 숭상하여 학교를 세워 문풍(文風)이 크게 진 흥되었다. 이는 도동서당으로 지역의 학풍을 일으켰음을 뜻하 고, ③ 언씨(堰氏)는 공자의 제자 자유(子游)를 가리키는데, 그 의 성명이 언언(言偃)인데,일찍이 무성읍재(武城邑宰)가 되어 현가(絃歌)로 백성을 크게 교화시켰다. 이는 도동서당의 역할 을 뜻하는 것이고,④훈도(薰陶)는 인재를 배양 교화시킴을 뜻 하여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음을 말 한 것이다. ⑤ 와철(臥轍)은 수레를 가로막고 바퀴 앞에 누운 것을 말하는 것으로, 후한(後 漢)때후패(後 堉)가회양태수(淮陽太守)가되었다가내직으로 불리게 되니, 그곳 백성들이 울부짖으면서 사자(使者)의 수레 를 가로막고 바퀴 앞에 누워서 후패를 일 년 만이라도 유임시켜 줄 것을 간청한 고사에서 유래되었다. 이는 영모암이 유림(儒 林)의 창건으로 시작하여 성주의 중건으로 내려 왔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당초 서재(書齋)로서 지었다는 문중구전(門中口 傳)과도일치함을확인하는대목이다. 그렇다면 600년 유지라 함은 시(詩)를 쓴 박노(朴輅)는 1549 년에 태어나 1624년에 사망하였는데 만약 20대 중후반에 썼다 고가정하면영모암의중수가450여년 전의 일이고 보통 목조건 물이 100여년 이상 유지된다고 가정하면 참의공(휘 진)께서 영 면하신 직후라면 금년이 사후 594년으로 600년 유지라 할 만하 다할것이다. 영모암(永慕菴)의 규모는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보통 사당 을 크고 화려하게 짓지 않은 풍습으로 보아 아마도 삼문을 갖춘 협소한 보통의 사당으로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도동서당 은수차례 중수를거쳐1987년폭우가내려붕괴전규모는㉠자 집으로 출입문(삼문) 돈후문(敦厚門)의 방은 ‘작은 산지기’ 강 당과 돈후문 사이에 수 칸의 긴 집이 따로 있어 ‘큰 산지기’가 거 주하였고, 강당의 주련이 8장으로 보통 주련의 숫자를 짝을 채 우지않은것으로보아9칸정도로짐작해본다. 현재의 영모재는 외곽(外郭)담장을 구획(區劃)하여 두 개의 공간(空間)으로 나누어 사용(使用)한다. 앞쪽에 영모재(永慕 齋), 뒤쪽 높은 곳 에는 사당(祠堂)인 추원사(追遠祠)를 각각 배치하였다.외삼문(外三門)의 중앙 솟을 대문(大門)가운데에 는 돈후문(敦厚門)과 도동서당(道洞書堂) 충주박씨대종중(忠 州朴氏大宗中)이란 현판(懸板)이 있고, 永慕齋 안에는 忠孝를 傳해가고 敦睦을 지켜가자는 뜻의 가전충효 세수돈목(家傳忠 孝 世守敦睦)의 여덟자 가훈(家訓)이 있다.영모재(永慕齋)는 다듬은 화강석(花崗石) 기단(基壇)위에 정면(正面) 5칸 측면 (側面)3칸규모(規模)에팔작지붕구조로지어졌다. 그 가운데 중앙 3칸 동칸은 대청 좌우 각1칸은 온돌방을 두었 다.재실(齋室)우측에는 별도(別途)의 담장으로 구획되어 전사 실(典祀室)이라는 현판이 걸린 관리사가 있다.영모재(永慕齋) 뒤로 첨송문(瞻松門)을 지나 계단을 올라서면 추원사(追遠祠) 란편액(扁額)을단사당이있다. 추원사(追遠祠)는 맞배지붕에 전면 3칸 측면 2칸 규모이며, 이곳은 충주박씨의 관조인 고려부정(高麗副正) 박영(朴英)을 비 롯 참 의 공 휘 진 ( 풂)의 아버지인 의랑공(議郞公) 휘 광리(光 理)까지 八世 先祖의 位牌를 모신 곳이다. 위패는 西에서 東으 로 부정공(副正公), 장군공(將軍公) 휘 신(臣), 우사공(右使 公) 휘 원숭(元崇), 평리공(評理公) 휘 득승(得升), 판원사공 (判院事公) 휘 덕린(德麟), 상서공(尙書公) 휘 지성(之誠), 첨 의공(僉議公)휘 세량(世梁),의랑공(議郞公)휘 광리(光理)의 순서로 모셔져 있다. 재실 외삼문(齋室外三門) 밖에는 참의공 (휘 풂)의 유허비(遺墟碑)를 비롯한 충청병마절도사 박형무 (忠淸兵馬節渡使 朴衡武),상주판관 박원창(尙州判官 朴原昌), 의사 박사진(義士 朴士振), 의금부도사 박로(義禁府都使 朴 輅),충원군 박동형(忠原君 朴東亨)등 그들의 행적을 기리는 비 와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성화보)를 알리는 한국최고보필보급 가승기적비(韓國最古譜筆譜及家乘紀蹟碑)가 세워져 있다. 좌 측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새로 만든 강릉공 박효함신도비가 있다. 호서(湖西)덕진(德津)옛 고을에 한밭 신도(新道)가 들어서 고 상전벽해(桑田碧海)여러차례세상이바뀌었어도 오직하나 불변의명소가있으니충주박씨도동재실(道洞齋室)이다. 이 당에 임립(林立)한 제가분암(諸家墳庵)이 누구인들 소중 하지 않으랴마는 우리 선조 참의공(參議公) 휘 진( 풂)의 제숙 소(齊宿所)를 유달리 일컬어 오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 이다. 공(公)이 려말(麗末)진사(進士)로 아우 소(蘇)와 함께 개성 을 떠나 이곳에 자리할 제 효제충신(孝忠悌信) 네 아들과 인의 예지신(仁義禮智信) 다섯 조카를 거느리고 수기치인(修己治 人)의 덕(德)으로 창업(創業)수통(垂統,좋은 전통을 자손에게 전함)하였으니 가전충효 세수돈목(家傳忠孝 世守敦睦)의 가훈 과 현존하는 한국 최초의 족보가 나오게 된 것이며,도학(道學) 문장(文章)과 충효(忠孝) 절의(節義)가 계세배출(繼世輩出) 하여 우뚝하니 해동저성(海東著姓)이 된 것도 결코 우연한 일 이아니다. 더욱이 이 집이 애시당초 다사(多士) 의 협동에 의하여 서당 교육의 장(場)으로 세워졌고, 후에 특별히 성주(城主)가 중건 했던 기록(記錄)을 보면 사람들의 입에 회자(膾炙)되는 것도 당연한일임을알수있는것이다. 자자손손(子子孫孫) 내려오며 흥폐(興廢)가 무상(無常)타 가 최근 정묘(丁卯, 1987년) 7월에 호우(豪雨)가 대작(大作)하 여 하룻밤 산사태(山沙汰)에 구옥(舊屋)이 붕괴(崩壞)되니 육 백년(六百年) 유지(遺址)가 호리지장(狐狸之場)이 되고 말았 다. 초목(樵牧)도 차탄(嗟嘆)커든 하물며 후예의 심정이야 오죽 하리요. 곧바로 일으키려 하였으나 공원부지로 설정되어 건축 을불허하는지라임원이앞장서서종교용부지로허가를취득하 는데 수년이 걸렸고, 경오(庚午, 1990년) 겨울부터 개토(開土) 초공(招工)하여 먼저 부정공(副正公) 以下 팔세사당(八世祠 堂)을 세우고 재사(齋舍)가 완공되어 조경(造景)까지 필역(畢 役)하는데는 무려 육년(六年)이라는 긴 세월이 소요되었으니 저간(這間)간사(幹事)자(者)의 현노(賢勞)가 자못 크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돈종족 후풍속(敦宗族厚風俗)을 마음속에 다지 면서 돈후문(敦厚門) 삼칸(三間)을 경건(敬虔)히 들어서면 전 사 실 (典 祀 室 ) 육 간 ( 六 間 )이 한 옆 에 절 결 (淨 潔 )하 고 1 5 칸 (十 五間) 영모재(永慕齋)가 날아갈 듯이 우람한데 낭랑(琅琅)한 글소리는 행인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화강암(花崗巖) 장원 (墻垣)을 따라 좌우로 돌아드니 정성어린 헌수(獻樹)사이사이 로 토향(吐香)하는 화초(花草)요 송도(松都)를 우러러 첨송문 (瞻松門) 삼칸(三間) 지나 추원사(追遠祠) 정삼칸(正三間)이 높다랗게좌정(坐定)했다. 도솔봉(兜率峯) 우뚝솟아 명기(明氣) 어린 신좌(辛坐) 언덕 에 옥토망월천작(玉兎望月天作)으로 공(公)과 숙부인(淑夫 人) 보안임씨(保安林氏)의 만년장(萬年藏)이 아직도 무양(無 恙,건강하다)하고 풀 한 잎 새 조 약 돌 하 나 까 지 도 장 구 (杖 넓,이 름난사람이머무른 자취)의흔적(痕迹)아닌 것이없는데춘로 추상(春露秋霜) 봉제사(奉祭祀)만으로 어찌 자손(子孫)의 도 (道)를 다한다 하리요.우리 더욱 조상의 얼을 계승발전하여 이 곳 도동(道洞)을 명실상부(名實相符)한 도의진흥(道義振興) 의 본산지(本産地)로 승화(昇華) 시켜야 할 것이다. 고락(告 落)하는 날 나에게 사실(事實)을 쓰라 하기에 내 스스로 재주 없음을 알아 굳이 사양(辭讓)타가 끝내 이기지 못하고 그 경개 (梗곕)를적어후손으로하여금보고느끼게하노라. 15대손수섭(장수향교전교)지음. 由五思須致存著(유오사수지존저) 뱚五思 ※五思(오사) = 思其居處 (사기거처-그의 계시던 데를 생각하 며)/ 思其笑語 (사기소어-그의 웃음과 말씀을 생각하며)/ 思其志意 (사기 지의-그의 뜻을 생각하며)/ 思其所樂 (사기소요-그의 좋아하시던 바를 생 각하며)/ 思其所嗜 (사기소기-그의 즐기시던 바를 생각함) 로 말미암아 모름지기 계신듯하고 나타나심 ※계신듯하고나타나심을(存著)~사 랑을 이루면 계신듯 하고, 정성을 이루면 나타남(致愛則存(치애칙존) 致慤 則著(치각칙저)[祭義]을 이 루 고 閱千秋當奉苾芬(열천추당봉필분) 뱚千秋를지나도록마땅히재유(齋儒)를받들지라 慕羹墻宛見容儀(모갱장완현용의) 뱚갱장(羹墻) ※羹墻-舜이堯를사모하여앉아계시면요가담장에계 신듯하고, 밥을對하시면요가국그릇에비쳤다함 의 사모로 완연히 용의(容儀)를뵙고 썼封塋深藏衣履(소봉영심장의리) 뱚墓域을살피자니깊이체백(體魄)을모셨도다 學張翁忍之敦睦(학장옹인지돈목) 뱚장공예(張公藝) ※張公藝(장공예)-장공예가 九世同居하더니 高宗 이 泰山 에 祭를 올 리고 그 의 집에 이 르러 睦族의 道를 묻 자 공예가 忍字 百 餘를 써 올 렸다 함 를배워참고참아돈목하고 干公善以昌榮(효간공선이창영) 뱚간공(干公) ※干公-漢나라 干公이 縣의 獄事(옥사)가 되어 治獄(치 옥)을 公平히 하였는데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治獄하면서 음덕(陰德)이 많았으니 반드시 흥(興)할 자손(子孫)이 있으리라 문려(門閭)를 조금 높고 크게하여 駟 馬(사마)가 들 수 있도록 하라” 하더니 定國에 이르러 승상(丞 相)이 되어封侯傳世(봉후전세)하였다함.을 본 받 아 착 하 게 살 아 昌 榮 하세 /참의공14대손상석지음 재실탐방 충주박씨영모재(永慕齋) <대전광역시서구배재로197번길56> 영모재전경①추원사②영모재③돈후문④참의공묘소⑤전사실⑥참의공유허비등⑦참의공의장남강릉공신도비 뱚재사(齋舍)연원(淵源)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박노(朴輅)의 편지를 나무에 새겨 영모재에 보관 하고있다. 충주박씨 가훈-忠孝를 傳해가고 敦睦을 지켜가자는 뜻의 가전충 효세수돈목(家傳忠孝世守敦睦), 영모재안에걸려있다. 뱚영모재중건기 영모재(永慕齋) 돈후문(敦厚門, 영모재 삼문)-돈후문은 종족간에 돈목하여 풍속을 두텁게 하기를바라는뜻이 있다. 추원사(追遠祠)-충주박씨의 관조인 고려부정(高麗副正) 박영(朴英)을 비 롯 참의공 휘 진( 풂)의 아버지인 의랑공(議郞公) 휘 광리(光理)까지 八世 先 祖의位牌를모신곳이다. 뱚영모재주련(柱聯) 참 의 공 휘 진 ( 풂)은 관 조 휘 영 (英)의 9세(世)로 개성소윤을 역임 하고 사복시정에 증직된 휘 광리(光 理)와 합천이씨(陜川李氏)의 아들 삼형제중 둘째로 1366년(공민왕 丙 午)에태어났다. 진사(進士)가 되어 나라가 어지러 짐을 알고 공명의 뜻을 버리고 동생 소(蘇, 판서공)와 함께 호서 덕진현 유성리에 은거(隱居)하여 후학을 가 르치며 여생을 유유자적(悠悠自適)하다 조선조에 이르 러 사헌부 감찰에 제수되고, 이어 진해·직산감무가 되어 많은 치적을 남기고 1422년(세종 4, 壬寅)년에 하세하니 향년 57세로 손자 형무(衡武)의 귀(貴)로 인하여 병조참 의(兵曹參議)에 추증되었으며, 본리(本里) 도솔봉(兜率 峯) 아래 신좌원(辛坐原)에 예장(禮葬)되고, 참 의공파 (參議公派)의문호를열었다. 부인 보안임씨(保安林氏)와의 사이에 아들 넷을 두었 으니 효함(孝誠) 충함(忠誠) 제함(悌誠) 신함(信誠)으 로문중은크게번성하였다. 뱚참의공(參議公)휘진(풂 )은? 참의공묘소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