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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1월31일 화요일 12 (제121호) 기획 사람의 도리는 인의보다 더 큰 것이 없고,인의의 행위는 충효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이것은 하늘의 경륜이고 땅의 의리이며 인간사의 법칙이다. 본시 그 본성은 처음에는 후박(厚薄)이 없고,때나 세태에 따라서도 차이가 없으며,또 한 고금(古今)이 없었 다.대저 천명의 진리란 기품이나 물 욕에 따라 옮겨지거나 박탈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후세에 사람들을 보면 이러 한 이치를 진실로 답습하려는 것이 너무허황해서그참뜻에부합되는일이드물다이어찌소위후박이없고고금이없다는것이겠는가?아니다 어떠한괴리가있어사태가이에이 르렀는가?마침내‘죽산박씨오충전’을얻어읽어본연후에야나는무릎을치며부러워하고칭송하면서천리 (天理)라는것을사람에게있는것이 지 때나 세태에 따르는 것이 아니고, 민몰(泯沒)되거나 후박의 이론으로 용납되는 것이 아님을 희미하게나 마 까달았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것은 그것을 알려고 노력하는 것을 모르는 것인지, 노력하지 않은 것인지 어떤가를 특별히 얻었다.<1899년 안동후 인 김병창의 ‘죽산박씨오충전’의 서 문에서옮김>-지난호에이어- 공의 휘는 신룡(信龍)이요 자는 이택(而澤), 호 (號)는 택수(澤쑴)로 송암(松菴)의 방 8세손이시 며, 영상 만절당(晩節堂) 시 문헌공(諡文憲公) 휘 원형(元亨)의 5세손이시다. 공은 만력(萬曆) 을해 (조선조 선조8년, 서기1575년) 9월 10일에 태어나 시다. 공은 도량이 크고 넓으셨으며 충효가 출천하 시고 지용과 의분심을 겸비하시어 큰 절의가 계셨 다.당시 좌의정 박홍구(朴弘耉)가 역신 이이첨(李 爾瞻)등과 결탁하여 바야흐로 혼미한 조정(*광해 군<光海君>의 조정)에서 혁혁한 세도를 잡아 휘둘 렀다. 공은 홍구와는 시복촌(*3개월간 상을 입어 야 하는 촌수로 3종간<8촌간>) 형제지간이지만 그 의 행동을 보면 야비하고 먹은 마음이 음험해서 공 은 이미 그와 절교하고 상종하지 아니 하셨으며, 그와 똑같은 항렬이라는 것이 부끄러워서 그 휘자 를 고치셨다. 그리고 혹은 공을 위해하거나, 혹은 공에게아첨하도록권할것같아서공은홍구측사 람들을 보시는 것을 꺼리시면서 더욱 확고하게 분 수를지키셨다. 그러다가 마침내 홍구가 망하자 사람들은 공의 선견지명이 뛰어나시고. 충신과 역적, 의리와 이해 관계의 분별을 재빨리 하시며 영욕이나 이해득실 에 따라 동요되는 일을 조금도 아니 하시고 개탄스 러운 자들과는 상종하시지 않은지가 오래인 것에 비로소탄복하였다.만력 무오년(광해군10년,서기 1617년)에 공은 의분심으로 자원하시어 무과에 오 르시니사람들은모두공을장차큰그릇이되실것 으로 보았고, 공 자신도 역시 그다지 허약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자부하셨다. 당시 집안의 성룡(成 龍)과 명룡(命龍) 등과 서로 깊이 결의하시기를 “나라에 어려움이 있으면 우리 세 사람은 같은 마 음 과 한 힘 이 되 어 물 불 을 피 하 지 말 자 ”고 하 셨 다 . 그런데 천계(天啓) 인조4년(서기1626년) 봄에 오 랑캐가 기병하여 세차게 일어나 우리나라의 서쪽 이 위태로워지자 삼남(*충청도,경상도 및 전라도 의 3개도를 말함)의 무사들을 징발하고 충성스럽 고용맹하며믿을수있는사람을뽑아장수로삼아 이들을 지휘하도록 하였는데 모두들 “박신룡이 바 로 그 적격자”라고 하였다. 임금님이 즉시 공을 인 견하시자 그 용모가 거대하고 그 지혜가 뛰어나 보 이셨다. 임금님은 공에게 특별히 선전관을 제수하 시자 공은 병정의 무리들을 지휘하여 국경 수비대 의진지로가셨다. 방어진지의 일이 끝나 공이 돌아오려고 하시자 의주부의 부윤인 이완(李莞) 공은 “성에는 반드시 의지할 근거지가 있어야 하고 반드시 지켜야 할 사 람이 있어야 하는데 이때 이곳에는 이 분이 없어서 는 안 됩니다”라고 하면서 공을 임시 중군으로 삼 아 함께 방어의 일을 맡도록 해 주실 것을 청하는 장계를올려윤허가내렸다.이에공은뜻과기개를 발동해서 국경사수의 계획을 세우셨다. 그런데 다 음해 정묘년(인조5년, 서기1627년)에 역신 강홍립 (姜弘立) 등이 적을 이끌고 졸지에 이르러 마치 산 이계란을누르듯하였다. 당시 그것은 창졸간에 깜깜한 밤의 어둠 속에서 당한 일이라 장졸들이 놀래어 흩어지는 바람에 어 떻게 수습할 길이 불가능하였다. 공은 사태가 구제 될 길이 없음을 아시자 큰 소리로 “남아는 죽음이 있을뿐이다”고외치시면서마침내홀로검하나를 들고곧바로나가투구쓴목과갑옷을두른허리통 을치시니철석하고떨어졌다.그것은마치뛰고춤 을 추 듯 한 번 치 면 열 개 가 없 어 지 는 것 같 았 다 . 그 러자 적은 더욱 분통이 터져 날카로운 기세로 활을 집중해서한꺼번에어지럽게쏘아댔다. 공은 힘이 빠지고 세가 궁했으나 끝까지 굴하지 아니 하시다가 마침내 순사하시니 이때가 정월 14 일 밤 5경(새벽 3시~5시)이었다. 이 일이 알려지자 조정에서는 공에게 병조참의(兵曹參議)를 증직하 고 그 자제를 특채하였다. 숙종조에 이르러서는 다 시 그 실적을 ‘해동충의록’(海東忠義錄)과 여지승 람(輿地勝覽)의 ‘청무읍지’(靑武邑誌)에 상세히 게재하도록 하는 포상의 은전을 더하였다. 그런데 그 시신은 분실되어 거두지 못했으므로 공의 의류 와 신발로써 청양(靑陽)의 비파재(瑟峴)에 장례를 모셨다. 그리고 조정에서는 공의 의복을 사당에 모 시도록 은전을 내려 여러 대를 내려오면서 그를 향 사하였다. 그러다가 금조(*순조조를 말함) 을유년 (순조25년, 서기1825년)에 그 의류를 매몰할 것을 의론하면서 공의 8세손인 형순( 刺淳)이 울면서 “유 의를땅에묻는것은차마견딜수가없으니 묘앞에 비각을 세우고 ‘유의각’(遺衣閣)이라 하고 거기에 그의류를안치하고1년에두차례씩제례를향사하 도록 하자”고 하여 그렇게 하였다. 그리고 그 전각 앞에는 비를 세우고 ‘유의각비’라고 하였다.이 비는 전 수 사 이 정 필 (李 正弼 )과 전 대 사 성 김 복 한 (金 輻 漢)이 유 의 각 의 기 록 을 쓰 고 , 전 승 지 이 설 (李 싫)이 유의각비의명(銘)과묘지(墓誌)를썼다. △증병조참의박신룡공의유의각기 우리 조선조로 넘어와서 인조5년(서기1627)년 정월 병을 일으킨 오랑케가 밤에 의주부를 침범하 였다. 다시 박신룡 공은 선전관으로서 상감의 뜻을 받들어 의주부에 예속되어 힘껏 싸우시다가 적을 무수히죽이고마침내순사하셨는데시신을찾았으 나 찾지 못하고 초혼만 하고 그대로 돌아가 장례를 모셨다. 그 소식이 알려지자 조정에서는 공에게 병 조참의를증직하고겸하여그자제를특채하였다. 아아 선비가 배워서 벼슬을 하면서 누가 충성을 다해 나라에 보은하고 죽더라도 변치 않기를 바라 지않겠는가? 대저 시퍼런 칼날이나 삼대 같이 몸이 지쳐도 산 과 같 이 부 동 하 고 공 처 럼 목 숨 보 다 는 충 성 과 의 리 를 택하는 이는 하나하나 세어도 고금을 통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공은 진짜 충신이요 진짜 장부 이며진짜로배운바에어긋남이없으셨다. 공의 종손이 공의 남은 옷가지를 받들어 신주를 삼아 공을 사당에 모신 곳은 인정과 의리의 인연에 서 출발하고 예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여러 세대동 안 그대로 방치된 지 오래 되어 매안(埋安)의 의논 이 있 었 다 . 8대손 형순이 줄줄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저의 선조님의 높으신 충성과 뛰어나신 설의는 해 와 별처럼 밝으시어 수양( 쓰陽)의 문산사(文山祠) 와 같이 사당을 모시더라도 하나도 부끄러울 것이 없을것입니다.불초저는아무런기록도없이옛유 서가황황히무너진다면이것은송구스러운일이라 공의 영의(靈衣)를 흙에 매몰하는 것을 어떻게 견 딜 수 있겠습니까? 그리하여 마침네 상의를 해서 재물을 모아 공의 묘를 바라보는 몇 칸 되는 지점에 각을 세워 유의를 받들고 계절에 따라 절사를 올려 영원히 추모하는 곳으로 하기로 하였습니다.”고 하 였다.그리고나에게그기록을부탁하였다. 아아 형순의 선조를 받들고 효를 생각함이 곡진 하여 정에서 우러나는 글은 이러하다. 대저 시경에 이르기를‘시는료를생각함이다’고하였다. 효를 생각하면 서기(書記)에 이르되 ‘예(禮)는 효를 생각하지 않는 예는 없다’고 하였는데 바로 그런감동가운데에형순이있는것이다.대저공을 생각하면 가신 후에 사라질 수 없는 존재로서 꽃다 운명예가나온것이다. 공은 타계하셨어도 그 영기(英氣-뛰어난 기운) 는사라지지않았다.그이름은국사에있으니사람 들은 모두 그것을 볼 것이다. 그러나 그 영기가 왕 래한것은누가다시알겠는가? 그 영 기 는 장 차 하 늘 로 올 라 가 별 이 되 어 우 리 동 쪽 땅을 비칠 것이고, 산악으로 맺혀져 우리 나라 를장하게해줄것이다.분기하면바람과우뢰가되 어요기를쓸어낼것이다. 묘는 사의 남쪽에, 유의각은 묘의 북쪽에 있으니 그 영기가 바람을 타거나 구름을 타고 엄숙하게 이 곳에 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 유의각에 올라와 우주를 떠받들고 우주에 뻗이는 공의 절의를 우러 러 보려거던 지극히 옳고 순수하며 강직한 공의 영 기(英氣)가 격렬한 여울 소리를 내고 노호하는 음 풍의늠름한소리를내는것을상상할지어다. 이곳 북쪽의 적막한 것(유의각 있는 곳을 말함) 으로 발길을 옮기는 이는 연산군(燕山君)과 같은 사악한 뜻을 찧어 없애버려라. 아아 장렬한지고 대 체 누가 감히 그런 마음을 갖게 하겠는가? 후세의 초동과목동들에게이르노니“그대들은혹시그근 방에 머뭇거리면서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일이 없도록 하라,옛날 황제의 나라 명나라의 충신이며 조선국의 열사이신 박 장군의 영혼이 편히 쉬고 계 시는것이니라”고 숭정 후 5병술(고종23년 서기 1886년) 한여름(5 월)하순 수군절도사완산후인이정필은기록하다. △의마총(義馬塚) 이 의마총은 택수공 박신룡 장군의 애마의 무덤 으로 공의 자손들이 마련한 무덤이다. 만주지방에 서 일어는 금군(金軍, 후일의 청국군)이 우리나라 에 대 한 지 배 권 을 확 보 하 기 위 해 자 주 국 경 을 침 범 함으로서 서북국경이 위급한 상황에 놓이자 공은 선전관의 제수를 받고 서북국경의 수비를 위해 그 지역의 요새인 의주로 달려가셨다. 그리고 그해 인 조5년(1627년) 정월 금군이 반역자 강홍립(姜弘 立)을 길잡이로 앞세워 다시 의주를 참략했을 때 공은 의주부윤 이완(李莞) 공과 함께 온 종일 분전 하셨으나 중과부적으로 역진하고 화살도 소진된 가운데 백병전을 벌이시다가 마침내 정월 14일 새 벽5시경 무렵에 이완 공과 같이 최후를 마치셨다. 이때공의애마는아마도공을등에태우고그처절 한 전투의 장면을 함께 달렸거나, 그렇지 않으면 마구간에서 공의 분전 장면과 전사의 광경을 애처 롭게지켜보면서눈물을흘렸을것이다. 전투가 끝나자 그 말은 선혈이 낭자한 택수공의 피 묻 은 융 의 (戎 衣 ) 를 물 어 뜯 어 입 에 물 고 고 향 인 충남청양땅의본가를향해달리기시작했다.의주 에서 청양까지는 무려 1천7백리(약680㎞)나 되는 거리인데도조금도쉬지않고달린듯하다. 그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꼬박 1주야를 달리지 않았나 싶다. 다음날 새벽녘 에 청양의 본댁입구에 당도한 말은 크게 울부짖으 며 자신이 온 것을 알렸다. 말의 울음소리에 놀라 가족들이 나가 봤더니 그 말은 택수공이 평소 즐겨 타셨던 말이 분명한데 온 몸이 기름땀으로 흠뻑 젖 어 있고, 말의 입에 물려 있는 피 묻은 융의(戎衣) 도공의것임이분명하였다.배위와자손들은그말 이공의전사하신것을알리기위해머나먼길을한 숨에달려온것을이내깨달았다.말은가족들을보 자 몹 시 슬 픈 듯 이 다 시 한 번 크 게 울 부 짖 더 니 가 쁜 숨을 몰아쉬며 이내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1천 7백리길을단숨에달려오느라너무나지쳐서숨을 거두었는지, 자신을 애지중지 사랑하던 주인의 처 절한 전사의 모습에 충격을 받고 함께 순사(殉死) 했는지는 말 못하는 짐승의 일이니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마는 주인의 죽음을 가족들에게 알린 그 갸 릇한 행동은 인간도 하기 어려운 의리와 충성과 절 의를 다하고 말은 주인을 위해 충성과 의리를 다했 으니그주인에그말이라아니하려. 날이 새자 맏 아드님이신 휘 상현 공이 의주로 달 려가 선고의 시신을 찾았으나 도저히 찾지 못하자 그곳에서 초혼(招魂)만 하고 돌아와 선고의 의대 만으로 장례를 올리고,남은 의대를 보관하다가 후 일 그 후손들이 유의각을 짓고 연 2회 춘추로 향사 를 봉행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택수공의 전사를 알리고 함께 순사한 말도 따뜻한 양지에 묻 고 무덤을 써서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있었으나 얼마 후에는 택수공의 묘 아래 100m 지점에 이 의마의 무덤을 옮겨 새로 마련하고 그 유래비를 세워 그를 영구히기념하고있다.오늘날이의마의무덤은의 마총(義馬塚), 또는 충마총(忠馬塚)이라 칭하며 속칭으로는그저‘말무덤’이라고부르고있다. 2011년 10월 후손 광은 박한수 적다. 공의 휘는 성룡(成龍)이요 자는 견백(見伯)으로 송암(松菴)의 방손이시다. 만력(萬曆--명나라 신 종<神宗> 때의 연호) 병술년(조선조 선조19년, 서 기1586년)에 태어나시어 무신년(선조41년,서기16 08년)에 무과에 오르셨다. 인조 갑자년(인조2년, 서기1624년)의 이괄란(李适亂)에서 공훈을 세우 시어 귀성부사(龜城府使) 겸 청북병마방어사(淸 北兵馬防禦使)로 특별 제수되셨다.얼마되지 않아 참소를 입으시고 의주로 유배되셨는데 갑자기 정 묘년(인조5년, 서기1627년)에 금나라 오랑캐의 난 리를 당하셨다. 공은 즉시 유배지로부터 나오셔서 의주부윤 이완(李莞)공과 중군 박신룡(朴信龍)공 등과 더불어 역전하시다가 동시에 순절하셨으며 그 시해는 분실되어 반장(返葬)하지 못하였다. 그 러자조정에서는호조참판을증직하고정려하도록 명을 내렸다. 그러나 공의 사적은 병화로 소실되어 그자세한내용은전해지지않는다. (*본기록의연월일과집필자는기록이없음) 공의 휘는 명룡(命龍)이요 자는 견숙(見叔)으로 만력(萬曆,명나라 신종<神宗> 때의 연호) 무자년 (조선조 선조21년,서기1588년)에 출생하시어병진 년(광해군8년, 서기1616년)에 무과에 오르시고 형 님이신 성룡(成龍)과 뜻이나 취향이나 기개와 절 의가같으셨다.인조조의 갑자년(인조2년,서기162 4 년 )에 이 괄 란 (李 适 亂 )을 평 정 하 신 후 특 별 히 고 부군수(古阜郡守)에 제수되셨는데, 병인년(인조4 년, 서기1626년) 겨울에 마침 용무로 서울에 올라 와 계시다가 북쪽에 우환이 있다는 소식을 들으시 자 상소로 자청하시기를 “무인은 강장한 한창때를 놓쳐서는 아니 되옵는 바 국가의 위급한 때를 당하 여국내에서자신만편하게지낸다는것은옳지못 하오니 원하옵건대 국경의 방어막을 지킴으로써 국은에 보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하셨다.임 금님께서는장하다고하시면서그를윤허하시면서 안주우후(安州虞侯)를 제수하시고 또한 가선대부 (嘉善大夫)로승차시키셨다. 그리하여 공은 마침내 말 한 필에 월척 장검 한 자루를 들고 홀로 임소로 가시어 병사 의춘군 남 (兵使 宜春君 南)과 함께 일어나시어 거만한 적과 힘껏 싸우시다가 그날 순절하시니 곧 정묘년(인조 5년,서기1627년)정월 21일이다. 이 일이 알려지자 조정에서는 병조판서를 증직하 고 현종조에서는 정려하라는 명을 내리시어 안주에 사당을 건립하였다. 숙종조에서는 ‘충민’(忠愍)이 라는 사액을 내렸으며 영조조 경진년(영조36년, 서 기1760년)에는 충민(忠愍)이라는시호를내리고그 사적을‘충의록’과‘공신록’에게재하도록명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고려 말에 의를 지키고 절개를 세 운 신하가운데 두문동 72인 같은 사람들이 없나니 송암 박공(松菴朴公)을 위시하여 그 당시 이름을 나란히 한 분들과 포은 정선생(圃隱 鄭先生) 같이 오로지 일심으로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 하시고 그 지조가 살신성인에까지 이르렀으니 그 행적은 다 를지라도 그 의는 같다고 할 수 있 다 . 이 것 은 땅 을 바꾸어 생각하면 가위 옛날에 백이숙제(伯夷叔齊) 가 오직 구했던 수양산의 절의나 도연명의 시상산 (柴桑山)의 절개와 다 같다고 할 것이다.그 후 7~8 세를 지난 뒤에 그를 이어 4공의 충성이 있었으니 그들이 충성하고자 하는 바는 오직 국왕과 국가에 대해서 뿐이었다. 이것은 밤티재(栗峙)와 의주와 안주의 난리에서 모두 의를 위해서 용맹을 떨치다 가 순절하신 것으로 바야흐로 뜻을 자기희생에 두 고 목숨을 홍모같이 가볍게 여긴 것이다. 역사적으 로 고금을 보면 오직 당나라의 장순(張巡)과 허원 (許遠)이나 우리나라의 요동백이었던 김장군 등과 가히 백중지세를 이루었다고 하겠다. 무릇 4공의 충의는 모두 송암공에게서 이어받으신 바로 이 또 한 우리나라 열성조에서 배양한 교화가 아니겠는 가? 조용히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가 본디 동방예 의지국이라고 호칭되는 것은 때를 당하여 절의를 위해죽은사람이전후해서매우많기때문이다.사 람마다집집마다능히이렇게할수있는것은천집 백집 가운데 겨우 한 사람만이요,박씨 한 집안의 5 충같은예는천백세가지나도드문일이다. 그 어찌 장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 후손인 형순 ( 刺淳) 군이 일찍이 ‘오충유사’(五忠遺事)를 모아 서 나에게 보이면서 그 실적을 세상에 전하고 싶다 고그것을엮어줄것을요망하였다.나는쇠약하고 심히 게을러서 그것을 감당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또다시 근자에 지난번의 청을 말하면서 서신을 보 내 왔다. 나는 늙고 병이 들어 조석으로 죽기만을 바랐으나 생전에 이 글이 이루어져야 죽어서 조상 님들의 혼령을 뵈옵고 그 충정에 감동하여 붓을 들 었다고 여쭈리라고 생각하고 이것을 기록한다. 그 리고 명에 이르기를 “오충전,아아 이 글을 읽고 충 의의 마음이 생기지 않는 자는 진실로 가위 사람의 마음이없는자이다”그러나요즈음세상에는충의 가 없어진 지 오래 되었고, 바야흐로 오랑캐 같은 방자함이 횡행하며 문란하고 반역하는 행위가 이 어져 혹 충성스러운 격분이 있고 그것을 말하는 자 는 있어도 의리의 인간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니 어찌하랴? 이것이 형순군이 세상의 도의에 대해 깊이 개탄 하 고 세 상 의 덕 을 함 부 로 늘 어 만 놓 지 말 고 먼 저 밝 고 아름답게 할 뿐이라고 생각하는 소이인 것이다. 그리고 두문동의 여러분을 생각하니 박포(朴苞)공 이동시에의절을지킨사실이있고이와같이송암 일가에는생각해야할분이없지않다.진주전투에 서 전 사 하 신 박 승 성 (朴 承 成 ) 즉 , 초 곡 (草 谷 )의 제 씨는 후사가 없어 그 행적을 자세히 알 수가 없다. 부사(귀성부사 휘 성룡<龜城府使 諱 成龍>을 말 함)와 함께 2공의 충절을 아울러 나란히 기재한다 면 박씨 일문은 오충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후 세의유지자들은널리자료를찾아그전기를서술 할것을기대한다. 통훈대부 홍문관 응교 겸 경연시강관 춘추관편 수관시강원 사서지제교 동양 신응선(東 陽申應善)은 삼가 쓰다. ※‘죽산박씨칠충열’이 필요 한 성손 여러분은 본보에 연락 주시면받아보실수있습니다. 죽산박씨칠충렬(七忠烈)傳 선조 유지를찾아븣 5.이택휘신룡공전(而澤諱信龍公傳) 박신룡장군묘소. 유의각-충남문화재자료제153호.충남청양군운곡면위라리. 택수공박신룡장순충신정려편액. 의대박신룡장군증직교지. 의마총. 광은박한수 6.부사휘성룡공전(府使諱成龍公傳) 7.우후휘명룡공전(虞侯諱命龍公傳)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