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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11월30일 수요일 7 (제119호) 관향조 종친회 大同譜編纂委員會및編輯委員 △위원장박래식(010-7169-9140) △상근부위원장박상범(016-481-6552,국당공파) △부위원장 문림랑공파박진식(010-2290-1889,대구시)/난계공파박진하(010-4907-6936,옥천읍)/ 이요당공파박희삼(010-5402-1538,대전) △ 편 집위 원 ○문림랑공파박영식(010-4204-6565,제주시)/박남근(010-2079-6972,광주광역시)/ 박영동(010-2838-8384,대구)/박태암(010-3121-0635,달성군)/박태인(010-9310-4842,진주시) ○난계공파박원하(적명 임용010-3203-3172,인천)/박팔만(010-4562-1488,여수)/ 박희태(010-5484-9849,옥천읍)/박종철(010-5546-3333,구미)/박희문(010-2877-0757,대구) ○국당공파박희원(010-4122-0127,영동읍)/박근용(010-5568-1564,영동읍)/박세열(016-468-3735,황간면)/ 박재용(010-4841-0412,영동읍)/박희조(010-7756-8199,거창읍)/박종운(011-526-5648,대구)/ ○이요당공파박희복(010-3412-6903,심천면)/박의부(010-2869-2173,대전)/ 박희선(010-2423-5644,김천)/박상용(010-4456-8055,대전)/박세종(010-8108-2304,대구) 密陽朴氏僕射公派大同譜編纂委員會 밀양박씨복야공파(僕射公派 ) 대동보 편찬 안내 밀양박씨 복야공파 대종친회에서 대동보를 발간하기로 결정하였기에 공고하오 니 단기간내에수단이정비되어우수하고귀중한족보가편찬되어가보(家寶)로보 존 될수있도록협조를부탁드립니다. 특히 족보상식에 밝은 어른들이 작고하면서 이번대동보가 마지막 족보가 될 우려 가있어종원여러분들의적극적인참여로누락되는종친이없도록하여주시기 바 랍니다. ◇발행기간:2015년 12월~2017년 6월30일까지 ◇발행기준:1990년(庚午譜),1979년(己未譜) ◇수단기간:2015년 12월부터 2016년12월31일까지 ◇수단접수처:충북영동군영동읍계산로2길4.종친회사무실(영동세무서앞) ◇입금은행:농협301-0181-4871-11 ◇예금주:복야공파대종회 문의043-743-3015 FAX043-744-3015 사무국장박원용010-5487-2228 ◇인쇄처대전회상사 밀성박씨 은산부원군(휘 영균)과 그 의 차남 전객령(휘 천경)의 시향(時享) 이 지난 달 31일(음10.1) 경남 창녕군 계성면 광계리 선영에서 봉행되었다. 이날 제례는 오전 10시 은산부원군 묘 소에서용권(容權)집례의창홀에따라 성배(成倍) 초헌관, 남근(南根) 아헌 관, 재석(在錫) 종헌관 순으로 각각 헌 작하고 은현(銀鉉) 축관이 독축하였으 며, 장소를 옮겨 전객령공 묘소에서는 동수(東壽, 초헌관), 해봉(海鳳, 아헌 관), 병호(炳虎, 종헌관), 용현(龍鉉, 집례), 상술(相述, 축) 현 종이각각소임을맡아제향을봉행했다. 은산부원군파의 파조이신 휘 영균(永均~1300)은 양효공 간 의 큰아들이다. 고려조에 익대공신으로 벼슬은 판도판서와 삼 제(三帝)를 역임하였고 응천군으로 봉군되었다. 뒤에 또 은산 부원군(銀山府院君)으로 추봉되었다. 시호는 문헌(文憲)으로 사시되었다. 은산부원군의 둘째아들 천경(天卿)의 자는 자시(子始),호는 송와(松窩)이다. 려조가 기울어지자 가형 송은공과 함께 귀향 했다.조선초 정종 때 박포의 난을 평정한 공훈으로 추충익대공 신에책록되고벼슬이중정대부전객령에이르렀고 정종2년만 에 89세에 졸하니 태종(상왕)은 제문을 보내 애도했다. 밀성부 원군(密城府院君)으로 추봉하고충의(忠毅)사시했다. 한편 전날 밤 개최된 정기총회는 수입븡지출 및 감사보고에 이 어용권신임회장을추대하는임원개선안을상정처리했다. 원환 회장은 이임사를 통해 임기동안 성원해준 덕분으로 임 기동안 과오 없이 마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임기동안 하지 못한 일들은 후임 회장님께서 맡아 주실 것을 믿으며,함께 발전하는 데노력한다고하였다.원환회장은3년의임기동안선조유적탐 방을 실시하고, 경주 숭덕전, 밀성재, 원덕사 등의 각종제례에 참석종중의위상을높여왔다. 신임 용권 회장(은산부원군 26세손)은 오랜 공직경험과 아당 공파 회장을 역임하는 동안 물언재를 웅장하게 중건하는 등 역 량을 발휘하며 종회 발전을 이루어 와 종원들의 기대가 커 수락 인사를 통해 전임 집행부의 노고에 감사드리고, 훌륭한 선조님 을 모시는 추원재에 부족한 제가 중책을 맡게 되어 한편으로는 두렵고 어깨가 무거우나 존경하는 고문님들의 뜻을 잘 받들고 전 종원들의 뜻을 한데 묶어서 앞으로 추원재가 유지 발전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하고 숙원사업인 추원재지를 임기 내 에 만들어 보고, 봉성금 등 추원재에 공헌한 분들의 기록을 메 시지나카톡을이용하여안내하여투명한운영을천명하였다. 그리고함께일 할총무에는아당공종중 회장을 맡고 있는응 상,재무에는효근밀성재이사를지명했다. 밀성박씨은산부원군파추원재정기총회및시향 봉행 신 임 회 장 용 권 ( 容 權) 아 당 공 파 종 중 고 문 추 대 븣추 원 재 지 발 간 추 진 뜻 밝혀 은산부원군묘소제향광경 은산부원군묘소제관,왼쪽부터원환회장,성배,남근,재석,용권,은현順. 박용권 회장이 수락인사 를 하 고 있다. 선조의 유훈을 되새기며 후손들의 적 극적인 동참을 이끌어 온 밀양박씨 규정 공 후 참판공파 경산 문중의 가을 시향이 지난10일과11일이틀간봉행되었다. 첫째 날인 9일(음10.10)에는 경북 경산 시 진량읍 현내리 선영에서 용정 집례관 의 창홀에 따라 봉사(奉事)를 역임한 경 근당(휘 根孫)과 성균생원 지암공 휘 빈 (彬) 父子의 단소(壇所)에이어 경산 입 향조 요산공(樂山公) 휘 운달(雲達), 송 재공(松齋公) 휘 근손(謹孫) 부자의 묘 소에서 차례대로 봉행되었으며, 둘째 날 인 10일(음10.11)에는 정재공(貞齋公) 휘 번(蕃), 죽고공(竹皐公) 휘 응득(應 得)부자의 묘소가 있는 신제리 선영에서 각각봉행되었다. 이날 봉행된 경근당(휘 근손)의 부인 진성이씨는 퇴계선생의 왕고모다. 이에 경산문중의 역대 선조님 이하 현 세대에 서도 퇴계 종중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후 학양성에남다른열정을갖고있다. 경산 입향조 요산공의 휘는 운달(雲 達)이고 字는 달지(達之), 요산(樂山)은 호(號)이다.시조왕의 53세손으로 성종 2 2년(1491) 성균생원 지암공 휘 빈(彬)의 아들로 태어나 허백당 홍귀달의 문하에 나아가수학하였다. 26세 되던 중종 11년(1516) 무과에 급 제하고 31세에 선전관이 되고, 서포서 별 검을 거쳐 중종 25년(1530년) 40세에 봉 상시 주부를 지냈다. 50세 무렵 청주에서 경산 자인으로 거처를 옮긴 후 은둔하며 발분 면학하였으며, 이웃 고을인 청도의 삼족당 김대유, 소요당 박하담과 교유하 며 도학의 담론을 나누고 명종 13년(1558 년)68세로별세하였다. 아들 휘 근손(謹遜)은 성균 생원을 지 내 고 4 남 을 두 었 는 데 장 남 총 (叢 )은 일 찍 사망하였고, 차남 번(蕃)은 무과에 급제 하여 태천현감을 지냈고,손자 죽고공(휘 응 득 ) 의 貴 로 요 산 공 은 증 통 훈 대 부 통 례 원 좌통례, 송재공은 통정대부 호조참의, 정재공은 가선대부 병조참판겸지의금부 사 오위도총부부총관에 각각 증직되었 다.( 죽고공행장‘선조의행장을더듬다’참고) 경산문중은 조상의 위업을 숭상하는 숭고한 정신과 경로효친의 바탕위에 온 문중의 화목 단합을 이루고 있어 주변 사 람들에게자주회자되고있다. 특히 문중의 화목 단합과 후손들의 산 교육의 터전을 마련하고자 하는 오랜 숙 원을 문중의 합의로 진량면 시문리에 197 3년 3월 4일 정초(定礎)를 하여 역사(役 事)를 시작하면서 지역 유림들의 공론 (公論)을 얻고, 1977년 7월 자인향회(慈 仁鄕會)및 그 해 10월 2일에 경상북도 유 림도회(儒林道會)의 결의로 서기 1977년 10월 3일 율산서원을 창건하여 서원을 중 심으로결속력과화합을다지고있다. /박방무명예기자(경북경산시지부) 규정공후참판공파경산문중가을시향봉행 경근당(휘근손)이하5代븣손자요산공경산입향,5대손죽고공(휘응득)의귀(貴)로3代추증 (追贈)명문가번성 용정집례관의창홀에따라봉사(奉事)를역임한 경근당(휘 根孫)과 성균생원 지암공 휘 빈(彬) 父 子의단소(壇所)에서제향을올리고있다. 요산공묘제제관 오른쪽부터학엽집례, 병대초 헌관,승호아헌관,청길종헌관,찬균축관 순. 일본은 1592년(선조 25) 우리나 라에 침입하여 수많은 양민을 학살 하였으나 관군으로는 이를 막지 못 해 더 많은 피해가 발생하여 전국에 서 봉기한 많은 의병들은 목숨을 초 개와 같이 버리며 나라를 지키는데 앞장섰다. 그리고 선조 29년(1596) 9월 화 의의 교섭이 깨어지자 이듬해 정월 에다시재침하니이것이정유재란이다. 임진왜란에는 나이가 어려 어찌할 바를 몰랐던 소년은 어머니를 보위하였고,정유재란에 20세가 되어 분연히 일 어나 경상좌도 방어사 권응수 장군에게 달려가 많은 전투 에서 승리에 기여했고,병자호란에는 임금을 호종하여 삼 전도에서의 굴욕적인 항복을 지켜보고 벼슬을 버리고 낙 향하여 후진을 양성하는데 매진하다 생을 마감했으니 그 의 휘는 응득(應得)이고, 자(字)는 응직(應直) 호(號)는 죽고(竹皐)이다. 공(公)은 무과에 급제하여 태천현감(泰川縣監, 평안도 관할)을 지낸 위당(威堂) 휘 번(蕃)과 달성배씨(達成裵 氏) 사이에 장남으로 1578년(선조11) 7월 6일 경상북도 경산시진량읍대원리집에서태어났다. 상계를 보면 시조왕의 56세손이고, 규정공의 11세손, 호조전서 휘 침의 8세손이며, 세종 때 참판을 지낸 휘 눌 생(訥生)의 7세손이고, 단종절신으로 증(贈) 이조판서 충양공(忠襄公) 휘 경신의 6세손이며, 중종조에 중직대 부 봉상시 주부를 지내고 청주에서 경산으로 처음 입향한 요산(樂山)운달(雲達)의증손이다. 공(公)은 가학을 배우다가 선조24(1591)년 2월 14세에 사월 유시번(沙月 柳時蕃, 1569-1616)선생 문하에 들어 가 수학하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 자 어머니를 모시고 피란하였다.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이 일어나 자 2 0 세 가 되 어 4 월 에 경상좌도 방어사 권응수에게 달려갔 다. 이때에 경상우도 방어사 곽재우 장군 은 여러 고을의 관군 과 의 병 을 이 끌 고 화 왕산성에 입성하여 전원 결사의 태세를 갖추고있었다. 왜장 가등청정(加 藤淸正)이 화왕산성 밖에 이르렀다. 왜의 대군의 칼날이 빛을 가리고 깃발은 들판 을 덮는 대군을 거느 리고 산성북편에서 기 세 를 올 리 면 서 도 전하였으나 공(公)이 주둔 하고 있는 성(城)을 왜적은 감히접근하지못했다. 9월에 경상관찰사 이용순 과 병마사 김응서가 왜적을 달 성 에 서 치 려 할 때 권 방 어 사에게 동참을 청하여 왔기 에 권 장군이 정병(精兵)을 이끌고 공산성에 이르러 왜 적을 대파할 때 공(公)이 함 께참전하여공을세웠다.12 월에는 울산 도산성의 왜군 을 공격할 때 반구정(伴鷗 亭 ) 밑 에 서 많 은 적 을 화 공 할때힘을다해싸웠다. 선조31년(1598) 1월에 도 산성을 포위하여 왜적이 군량부족으로 많은 사자(死者) 를 내었으나 때마침 큰비로 인한 인마(人馬)의 동사(凍 死)때문에경주로돌아왔다. 이때에 효력부위( 力副尉, 정9품)에 제수 되었다. 8 월에 명(明)의 마귀제독(麻貴提督)이 2만 4천군으로 남 하하여 울산 도산성의 가등청정군을 공격할 때에 권 방어 사군이 이에 분속(分屬)되어 도산성을 공격하였으나 명 군의 유정이 고니시로부터 뇌물을 받고 명군을 철수시킴 으로써 일본군을 섬멸하지 못하고 퇴진(退陣)하여 돌아 왔다. 이후 승의위사(承義副尉,정8품)에 제수되었다. 11 월에 난이 진압되어 왜군이 철군하였으므로 12월에 귀가 하여 1599년(선조32)사월 유시번 선생에게 다시 가서 수 학하였고, 1600년에는 7년의 전쟁으로 무너져 내린 향교 의 재건에 앞장섰던 학자 모당 손처눌(慕堂 孫處訥, 1553 ∼1634)선생에게수학하였다. 1606년(선조39) 29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권지훈련원 참군(정7품, 權知訓鍊院 핫軍)이 되고 1608년 훈련원 주 부, 1610년(광해2) 선전관, 1613년(광해5) 부사직(종5 품), 1615년 사직, 1618년 용양위 부호군(종4품) 1615년 오위도총부경력(종4품), 1621년 통훈대부 철산군수, 162 5년(인조3) 벽동군수(평안북도의 북쪽 중앙에 위치하는 한 군), 1631년 훈련원부정(종3품), 1633(인조11) 절위장 군용양위상호군(정3품), 1634년(인조12) 가선대부(종2 품)로 승차하여 3대 추증이 되어 아버지(휘 蕃)는 가선대 부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부총관(종2품), 조부(휘 謹遜)는 통정대부 호조참의, 증조부(휘 雲達)는 통정대부통례원좌통례로각각추증되었다. 1636년(인조14) 청나라 태종은 10만 대군으로 원정군 을 조직 동년 12월 2일 친히 심양을 출발하였다. 빠른 속 도로 진격한 청나라 군사는 12월 12일 서울 근교에 도착 하였다.조정에서는 청군의 내습을 알고 주화론자인 이조 판서 최명길을 청군 진영에 보내 시간을 얻는 한편, 왕자 와 비빈종실과 남븡녀 귀족들을 1차로 강화도로 피난가게 하고 2차로 인조임금은 세자와 백관을 친히 거느리고 뒤 를 따르려 하였으나 이미 강화도로 가는 길이 청나라 군 사들에게 막혀 부득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때 공(公)은 임금을호종하였다. 그러나 군세는 1만2천여이고 군량은 50일 분뿐이어서 16일에 청군이 산성을 포위한지 45일 만에 주화론에 따라 인조가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하자 공(公)은 주전 (主戰)을 주장하다 이에 미치지 못하자 벼슬을 버리고 향 리로 돌아와 은거하며 후진양성에 매진하다 3년만인 163 9년(인조17) 별세, 가정대부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부총관에추증되었다. /박방무명예기자(죽고공 11대손) 죽고공(竹皐公)박응득선생 뱚명/예/기/자/투/고 선조의 행장을 더듬다뱚 뷺정유재란(丁酉再亂)에분연히일어나난을 진압하는데功을세우고,병자호란(丙子胡 亂)에임금을호종(扈從)하여척화론을펼치 며항거했으나주화론에굴욕적인항복을함 에벼슬을버리고귀향하여후진양성에매진뷻 죽고공묘비 배부옥체도 병자년(1636년) 겨울에 청나라 군사가 크게 우리나라를 쳐들어오니 인조(仁祖) 대왕이 남한산성으로 급히 피난하는 길 에 날 은 저물 고 바람은 차가워 길은 험하 고 얼음이 미끄러워서 인마(人馬)가 발 을 붙이지 못할 지경인데 적군은 뒤 따 라 오는 위급함을 그림으로 묘사했다. (그림풍봉공박한남문집에서옮김) 박방무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