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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11월30일 수요일 6 (제119호) 관향조 종친회 도학(道學)과 문장(文章)과 절의(節 義 )를 두 루 겸 비 한 큰 선 비 회 재 박 광 옥 선생을 기리기 위한 추향(秋享) 제례가 선생의 위패가 봉안된 광주광역시 서구 풍암동운리사(雲裏祠)에서봉행되었다. 이날 제례는 선생을 흠모하는 유림과 내외 후손등이 참례한 가운데 성련 음성 박씨 대종회장의 집례로 상배 정승공파 회장, 외손(外孫) 임유광, 진근 정승공파 종친회 이사 순으로 각각 헌작하고, 정채 축관의독축으로엄숙한분위기속에제례가이어지고,이채(典 祀,제사의 일을 맡아보던 책임),길근(陳設),봉춘(贊人),재홍 (奉香), 희동(奉爐), 윤택(奉爵), 경민(奠爵), 철완(司펠) 현 종 이 각 각 맡 은 바 소 임 을 다 해 제 례 를 빛 냈 다 . 운리사는 회재 선생의 영정과 위패를 모시는 사당을 비롯하 여학문의전당인숭본당,그리고유집목판각(광주광역시문화 재23호)을 소장하고 후손들에게 선생의 학덕과 절의정신을 전 승하는 교육의 장으로서 선생의 유산(遺産)과 종중의 뜻을 모 아 1999년 6월에 완공하였다. 회재 선생은 1526년 1월 26일 광주 서구 매월동에서 태어났 다. 본관은 음성(陰城), 자(字)는 경원(景援)이며 회재(懷齋) 는 호(號)이다. 선생은 타고난 효심(孝心)이 지극하여 7세(歲) 에 부친을 여의자 예(禮)에 넘도록 슬퍼하였고, 편모(偏母)를 지성으로모셔향리의칭찬이자자하였다. 10세에 유헌(遊軒) 정황(丁 )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으 며,21세에생원과진사과에합격하자더욱명성이높았다.개산 (蓋山,광주 선도면)의 서쪽에 집을 지어 개산송당(蓋山松堂)이 라 이름하고 문하생들과 함께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또 향약을 실시하고 기대승(奇大升), 박순(朴淳), 이이(李珥), 노사신(盧 思愼)등과 교유하였다.1568년 목사 유경심(柳景深)을 도와 향 교를중수하고학헌(學憲),학규(學規)를제정하였다. 1568년(선조1) 학행으로 천거되어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임 명되었으며 1574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종부시주부 (宗簿侍主簿)가되었다. 운봉현감(雲峰縣監)이 되었을 때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 를 세웠다. 1578년 전라도, 충청도의 도사(都事)를 거쳐 1579년 예조정랑(禮曹正郞), 1580년 지평(知平)이 되었으며, 그 뒤 성 균관 직강(直講), 영광군수, 밀양부사를 역임하였는데 영광과 밀양에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졌다. 뒤에 광주 전주의 교수와 사예(司藝),사첨시정(司瞻侍正),봉상시정(奉常侍正)등에 재 직하였다. 1589년 정여립옥사(鄭汝立獄事)가 일어나자 전에 정여립의 전장직 진출을 막은 이경중(李敬中)을 탄핵한 죄로 삭탈관직 당하기도 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신병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있었는데 고경명(高敬命),김천일(金千鎰)등 과 함께의병을일으켰으며 고향의의병도청(義兵都廳)에서 군 대의 장비와 양식을 조달하였다. 당시 전라감사 이광(李洸)의 무능을 탄핵하였으며 새로 감사에 부임한 권율(權慄)을 도와 많은공을세웠다. 의병활동의 공로로 다시 관직에 올라 나주목사로 재임하다가 돌아가셨다. 1602년(선조35) 광주 벽진촌(碧津村)에 세워진 벽진서원(碧 津書院)에 제향되었는데, 그 사당은 뒤에 사액 의열사(賜額 義 烈祠 )로 바뀌었다. 운봉 (雲峰)의 용암서원(龍 巖書院)에도 제향되었 다. 또, 광주광역시에서는 선생의 유훈(遺訓)을 길 이 보전하고자 광주 풍 암IC∼화훼유통단지입 구 구간을 회재로(懷齋 路)라명명하였다. 한편 이날 회재 선생 제향 직전에는 운리사 인근 선영에 모셔진 선조 31位 시향을 우천관계로 숭본당에서 거행하였으며,정승공파 종친회는 지난 7월 정기총회를 열고 신 임박상배전필순문회회장을신임정승공파회장에추대했다. 상배 회장은 1958년생으로 두산건설에서 근무하고, 운리사 신축공사 때 기획 및 공사담당으로 웅장한 모습의 건축물을 탄 생시켰고,회재로 명명에 참여하여 크게 기여하였다.특히 회재 빌딩신축공사에본부장으로기여하여매머드급종친회관을만 드는데 진력을 다하였으며, 현재 주식회사 지엠종합건설 대표 이사를맡고있다. 상배 회장은 취임 인사에서 모든 역량을 다해 종원들의 복지 와위선사업에진력할뜻을밝혔다. 음성박씨정승공파운리사추향봉행 회 재 박 광 옥 선 생 유 덕 (遺德) 기 려 같 은 날 선 조 31位 시 향 봉 행 운리사전경-광주서구풍암동769-1번지 운리사제향에참여한 제관들이 한자리에모였다. 박상배초헌관이 분향을하고있다. 박상배회장 조선중기 정치 사상의 지표가 된 의리사상의 천명 자이자, 청백리이 고, 역사저술가이 자 한문학의 대가 로 역 사 상 큰 족 적 을 남 긴 ‘눌 재 박 상’ 선생을 이해할 수 있 는 책 『호 남 의리사상의 실천가 ‘눌재 박상’』이 출간되어 화재다. 1992년 ‘조선조 도학사상과 눌재의 의리사 상’이란 학술발표회 토론자로 나서고, 이후 ‘신비복위상소’에 관련된 내용을 정리하는 등 꾸준히 눌재 선생 에 대해 연구해온 전남대학교 김동수 명예교수가 쓴 이번 책은 눌재 선생을 새롭게 정리하고 이를 널리 알리는데 크게 도움이 될것으로보인다. 김교수는글을읽는분들이눌재선생의여러모습들을보고, 그의 사상과 행적이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와 가치를 갖는 것인 가라는 점에 조금이나마 이해를 더 갖게 되고,그럼으로서 눌재 의 위 인 됨 에 대 해 조 금 더 잘 알 수 있 게 된 다 면 그 만 한 다 행 이 없겠다.라며글머리에덧붙였다. 눌재 선생은 조선조에서 이른바 사림세력이 훈구세력과 갈등 을 빚으면서 점차 정치무대의 헤게모니를 장악해 가는 과정 중 의 선두에 위치해 성리학의 ‘의리’사상을 정치윤리의 대강령으 로 수립하는데 큰 공을 끼쳐 사림(士林)들의 정신적 지표가 되 어 의리사상의 천명자라는 높은 평가를 받은 인물로서 충주박 씨를 저성명족의 반열에 들게 한 공이 있는 문중 여러 원훈(元 勳)중의한분이다. 조선 성종 때(성종5년, 1474)에 태어나 연산 임금 때에 문과 에 급제한 후 벼슬길에 났는데 주된 벼슬살이는 반정(反正)으 로 즉위한 중종(中宗) 임금 때에 지내었다. 그러나 강직한 성품 으로 인해 왕을 비롯, 종친, 훈척들에 대한 과감한 비판을 주저 하지 않음으로서 관직생활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곧 연산 임 금 때 총애를 받는 궁인의 부친으로서 향 리인 나주에서 권세와 탐학을 자행하던 우부리(牛夫里)를 처단해 버린 일, 중종 초기 언관인 사간원의 헌납(獻納) 직에 있을 때 공신호를 남수(濫收, 거두어 들 임)하는 것, 외척들을 중용(重用)하는 것 에 대해 반대하였던 일, 중종 10년(1515) 에는 담양부사로 재직하던 중 반정으로 말미암아 폐위 조처를 당한 중종의 첫 왕 비 단경왕후 신씨(端敬王后 愼氏)를 복위 시키고 왕비의 폐위를 주도한 박원종 등 반정의 3훈신(勳臣)을 임금을 협박한 죄 로 처벌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린 일 등으로 여러차례 옥에 갇혔다가 풀려 나기도하고,먼곳으로유배당하기도하였 으며,상주·충주목사 (牧使)등주로외직으로전전하였던것이다. 그렇지만 이 같은 불의에 대한 과감한 지적과 비판은 이 시기 정신적 지표가 되어 이후 의리사상을 선도한 인물로서 높은 평 가를 받게 되었다. 당시 사림의 영수 조광조(趙光祖)는 “그의 ‘신씨복위상소’는 강상(綱常)을 바로잡은 충언이었다.”고 극구 칭찬한바있다. 눌재는 또 역사적으로 「동국사략(東國史略)」을 저술하기도 하였는데이는고려시대까지의역사를정리하면서특히절의의 사적을 널리 들어내고자 하는 의도로 편찬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눌재는 외직으로 담양부사, 충주목사로 재임하 던 때에 두차례에 걸쳐 청백리로 뽑히기도 하였고,일찍 별세한 형님 박정(朴禎)을 대신하여 가사를 돌보며 아우인 육봉(六峯) 박우(朴祐)가 진사시에 합격하자 형님과 함께 기쁨을 나눌 수 없음을슬퍼하면서재산을나누어주어형제간에지극한우애심 을드러내보이기도하였다. 이밖에 문장으로도 일가를 이루어 성현(成俔)·신광한(申光 漢)·황정욱(黃廷彧) 등과 아울러 서거정(徐居正) 이후의 사대 가(四大家)중 한 사람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선생의 시문은 대략 1,200여 편에 달하는데 기력이 웅걸하고 굳세며 흥취를 붙 인것이그윽하고깊었다는평가를받는다. 이처럼 눌재는 조선 중기 정치사상의 지표가 된 의리사상의 천명자, 청백리, 역사저술가, 대 문장가 등 다양한 면에서 역사 상에그족적을뚜렷이남긴인물로평가된다.그러므로눌재선 생의 생애와 사상, 문학적 업적 등을 살펴보는 연구가 많은 학 자들로부터활발히이루어진바있다. 이번에 발간된 호남 의리사상의 실천가 ‘눌재 박상’은 동인풀 판문화원에서 펴내고 정가는 15,000원으로 대중이 함께 해볼 한책으로평가받는다. 한편 지난 15일 광주 서구 서창동 절골의 묘소에서 봉행된 시 제(時祭)에는 선생의 의리 정신을 기리기 위한 후학들과 전국 에서모인후손등60여명이참례한가운데문강공문회종표총 무이사의 집례로 종률 문회장의 초헌, 희영 일가의 아헌, 종태 직전회장의종헌과순규축관의독축으로엄숙봉행되었다. 호남의리사상의실천가‘눌재박상’출간 의리사상을정치윤리의대강령으로수립하는데큰공을끼쳐사림(士林)들의정신적 지표가되어의리사상의천명자라는높은평가받아 제례봉행후묘전에서기념촬영을하고있다. 뒷줄제복입은분 우측부터종표집례, 순규축관, 종태종헌관,희영아헌관,종률 초헌관 순 박종률 문간공문회장 이 초헌관으로 헌작하 고있다. 조선시대 충주 지역 출신 조선 통신사에 대한 역사적 조명과 그들의 활동상을 연구 발표하는 학술대회가 지난 10일 오후2시 충 주시 국립중앙문 화재연구소 국원 관에서 지역주민 과 후손등 200여 명이참석한가운데있었다. 이날 학술대회는 예성문화연구회 주관 으로 개최된 가운데 개회식과 함께 고령 박씨대종회 박병천 회장이 ‘운계 박재 부 사의 생애와 업적’, 이상규 한국학중앙연 구원교수의 ‘1617년 회답부사 박재의 『동 사일기』에나타난일본사행록기재방식’, 態本日韓文化硏究會 仁位孝雄(태본일한 문화연구회 니이다카오) 회장의 ‘조선통 신사를 둘러산 한반도와 일본의 관계’, 김호길 전 대성고교사의 ‘동명 김세렴 선 생의 생애와 사상’, 구지현 선문대 국문 학과 교수의 ‘동명 김세렴의 일본 경험과 시작활동’의 주제발표에 이어 박혜숙 건 국대 교수가 좌장이 되어 종합토론이 이 어 지 는 등 4 시 간 에 걸 쳐 진 지 하 게 진 행 되 었다. 제1주제 발표자로 나선 박병천 회장 (경인교육대 명예교수)은 박재 선생에 대한 자료는 빈약하나 고령박씨 대동보 에 수록된 묘비명과 행장이 전부라면 전 부일수 있지만 집안에 내려오던 것을 기 증해서 현재 독립기념관에 소장되여 있 는 ‘회답사일기’의 번역본과 서울대 규장 각에 소장되어 있는 ‘동사일기’, ‘송박재 봉사일본서첩’, ‘조선왕조실록’, 오죽헌 강릉시립박물관 소장자료‘를 중심으로 자료를 작성하였다고 밝히고 선생의 생 애와업적주제발표를하였다. 박재 선생은 고령(高靈)박씨 고양대군 22세손으로 조선중기의 문신(文臣)이다. 1564년(명종19년)에 태어나 1622년(광 해군14년)에59세로별세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후 자헌대부(資憲大 夫)이조판서(吏曺判書)와 지경연(知經 延) 의금부(義禁府),춘추관(春秋館) 홍 문관(弘文館) 대제학(大提學) 예문관 (禮文館) 대제학(大提學) 세자 좌빈객 (世子 左賓客) 오위 도총부(五衛 都摠 府)도총관(都摠管)에증직되었다. 묘소는 충청북도 충주시 동량면 서운 리 주 봉 산 선 영 에 있 다 . 선생께서 일본에 다녀오며 남긴 △동 사일기(東 픕日記)는 1617년 일본방문시 개인일기로 한양에서 출발하면서 광해군 을 배알하고 경기도 광주, 충청도 충주, 경상도 안동등지의 조상의 선영과 집안 을 먫 아 서 인 사 를 나 누 는 과 정 과 일 본 에 서의 일본의 지식인들과 필담으로 시를 나누는 과정과 시가 수록되어 있다.(현재 서울대학교규장각소장) △회답사일기(回答使日記)는 1617년 일본방문기 조정 보고서 형태의 일기 고 령박씨 무숙공파 천포문중 종손 집에 전 해내려 오던 것을 1980년 충남 천안 독립 기년관에 기증(현재는 독립기념관 소장) 2014년 고령박씨 문중과 충주문화원에서 합동으로번역발간하였다. △송박재봉사일본서첩(送朴 켬奉使日 本序帖)는 1617년 박재선생의 일본방문 을 30인의 문인이 전송하는 시(詩)와 서 (序)를 역은 책(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등이있다. 이상규 한국학중앙연구원교수는 ‘1617 년 회답부사 박재의 『동사일기』에 나타 난 일본사행록 기재방식’의 주제발표에 서 동사일기(東 픕日記)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조선이 일본외교에서 명분에만 집착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한편만을 강조하여 대일본 외교의 실상이 자칫 적자 외교의 연속으로 내지 명분론만 앞세웠던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라 고맺었다. 한편 이날 함께 진행된 통신사 김세렴 의 본관은 일선(一善븡善山), 호(號)는 동 명(東溟)으로 1616년(광해8) 중광시 문 과 장원급제하여 요직을 거쳐 1636년 정 사임광의부사로일본을다녀왔다. /자료제공박정하고령박씨대종회사무총장 충주의조선통신사박재븡김세렴학술대 회 예성문화연구회주관븣조선통신사의역할등새롭게조명 주제발표를 하고 있는 박 병천회장 고려수절신(高麗守節臣) 송은 박익 선생의 높은 절의정신을 추모하기 위한 추향제례 및 송은공파 종친회 정기총회가 지난 달 31일(음10.1) 경남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 보본재에서 있었 다. 이날 제례는 중식 후 개좌를 통해 헌관과 집사를 분정(分定) 하고 총회를 가진뒤 질서정연하게 거행된 가운데 먼저 충숙공 송은 선생, 그의 아들 우당공, 인당공, 손자 감헌공 순으로 각각 봉행되었다.( ▶헌관분정기참조) 총회에서는 수입과 지출 결산 및 감사보고에 이어 신임회장 에 창제 졸당공파 산천재 회장을 만장일치로 추대하고 부회장 은 우당,인당,아당,졸당 각 4파에서 추대키로 하였으며, 총무는 현희대총무를유임하는임원개선안을처리했다. 신임 창제 회장은 풍부한 종사 경험을 바탕으로 보본재 운영 에 적임자라는 평을 받고 있는 가운데 이날 수락인사에서도 최 선을다하겠다는짤막한인사로의지를다졌다. 송은 박익(松隱 朴翊)선생은 고려 말 충신(忠臣)으로 팔은 (八隱)의 한사람이다.휘는 익(翊)이며 초명은 천익(天翊)이고 자는 태시(太始)며 호는 송은(松隱)으로 은산부원군 영균(銀 山府院君 永均)의 장자이다. 1332년 (충숙왕 복위 1년)에 밀양 삽포에서태어났다. 1360년 (고려 공민왕 9년) 29세의 약관으로 입지잠(立志箴, 뜻을 세우는 글)을 지어 학문의 뜻을 세웠고,또한 지신잠(持身 箴)을 지어 수신지도(修身之道)를 깨우쳐 학문의 근본을 세웠 다. 고려 공민왕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한림문학(翰林文學)을 시작으로 소감(少監)을 지내고 1386년 (고려 우왕12년)에 동경 판관(東京判官)과 예부시랑 (禮部侍郎)을 역임하였으나 공양 왕대에 곧 관직을 그만두고 밀양으로 낙향하였다. 낙향해 있던 선생은 정몽주의 권유로 공양왕 말년에 다시 상경하여 잠시 예 조판서를역임하였으나이성계세력이정몽주를살해하고조선 왕조를 개창함으로써 절의(節義)을 지키며 이성계가 공조(工 曹), 형조(刑曹), 예조(禮曺), 이조판서(吏曹判書)와 좌의정 (左議政)을제수하며다섯차례나불렀으나나아가지않았다. 지난 2000년 9월 경남 밀양시 고법리 소재 송은선생 고분에서 벽화가 발견되어 화재를 모았다. 그 후 선생의 유택은 2005년 2 월 5일 국가 문화재 사적 제459호로 지정되었다. 한편이날헌관분정은다음과같다. (송은공/우당공/인당공/ 감헌공순) △초헌관 : 영설(永契)/ 영상(永祥)/ 홍식(洪植)/ 상훈(相 勳). △아헌관 : 채회(彩會)/ 영직(永直)/ 종식(宗植)/ 병식(炳 植). △종헌관 : 해원(海元)/ 규남(圭南)/ 종갑(宗甲)/ 종식(鍾 植). △집례 : 효근(孝根)/ 우현(祐鉉)/ 삼규(三圭)/ 용출(龍 出).△축 :영록(泳祿)/남현(南鉉)/용권(容權)/종하(鍾夏) 보본재추향및定總 충 절 의 표 상 송 은 ( 휘 익 ) 선 생 의 큰 뜻 기 려 븣 신임회장창제졸당공후산천재회장추대 송은선생시향에영록축관이 독축하고있다. 송은선생시향제관,오른쪽부터영설,채회,해원,영록,효근순 보본재전경-경남밀양시청도면고법리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