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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11월30일 수요일 2 (제119호) 특 집 대전 동구 효평동 당살미 ‘박장골’에서 순천박씨 시조 박영규 장군의 묘역으로 추정되는 고총(古塚)이 발견 되어 화제가 되 고 있다. 묘소 발견은 1990년대 초반으로 수년째 후손들의 묘제 봉행이이어진가운데지난6일에도후손10여명이참례한가운 데제례가거행되었다. 묘소 보존회장을 맡고 있는 풍동(豊東븡광주 남구) 회장은 구 보(舊譜)에도 기록되어 전해오고 구전으로 전해져오고 있음에 도이를인정하지못하는종원들이있어아쉽다고말한다. 1765년 발행된 순천박씨 을유보(乙酉譜)에 의하면 ‘在 公州 儒城 東漢山 黃氏塚 上村 寶文山(재 공주 유성 동한산 황씨총 상촌보문산)’으로기재되어있다. 공주(公州)는 오늘날 충청남도 공주목(公州牧)을 표현하는 것이다. 고려 성종2년(서기983) 12牧을 설치하는데 공주는 조 선시대까지 목(牧)으로 존재되어 2군 8현 4군 8현 등 시대에 따 라 다소 관할 구역이 늘었다 줄었다 할 뿐 조선시대 말(末)까지 계속되어왔다.유성은공주목의관할속현인것이다. 동한산(東漢山)은 유성 동쪽의 큰 산이다. 옛이나 지금이나 치소(治所)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지형을 설명하는 것이다. 서 울의 한강(漢江)도 큰 강이라는 뜻이다. 대전은 한밭이라 하니 븮한=크다븯를 차용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대전지명지 361쪽에 함각산(函角山)이 한산(韓山)으로 설명되어 있으니 한산(漢山)은 곧 함각산이니 동한산(東漢山)은 고유명사 한산 (漢山)으로서 동쪽 한산(漢山)으로 풀이하니 함각산=한산(韓 山)=한산(漢山)이니 세보의 한산(漢山))은 바로 함각산임을 알수있다. 바로박영규장군묘소와는1㎞거리에있다. 황씨촌 상촌(黃氏 塚 上村)은 박장골 넘 어 회덕황씨 시조 황 윤보(黃允寶, 고려 말 공민왕 때 회천군 지 문성부사 호부전서) 의 묘소와 재실이 있 다 . 즉 황 씨 촌 은 이 시 조의 묘역을 말한다. 지금은 대청호 조성으 로 현재는 다른 곳으 로이장되었다. 보 문 산 ( 寶 文 山 ) 이 라 함은 오늘날과 같 이 산봉우리마다 이름 을 알 수 없 는 시 절 이 었고, 지금도 누가 얼 마나 산봉우리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가? 보문산은 광주 무등 산 처럼 지역의 대표 명산이다. 오늘날 유성쪽에서 보아도 동쪽 큰산은 보문산이다. 우리 선 조님들은 합리적인 사 고 속에 기록들을 하 였기 때문에 지역의 옛 이 름 들 을 들 추 어 찾아가다보면 실전된 다른선조들의묘소도찾을수있을것으로기대된다. 묘소에 세워진 묘표를 보면 ‘麗乾德六年十二月英規卒墓(려 건덕육년12월 영규졸묘)’라 쓰였다. 아마도 상단 ‘고(高)’자는 풍화작용으로 지워진 듯 하다. 묘소는 1천년의 세월을 소나무 숲에서 버티며 오늘에 이르렀다.처음엔 묘(墓)를 3기(基)로 하 였으나 비가 세워진 곳은 상하장으로 2기로 추정이 된다. 도굴 되고 무너져 내려1기로추정하였으나 배위(부인)견씨묘가 함 께 상하장으로 되어 있다.묘비를 여러 사람들이 판독결과 건덕 (乾德)은 중국 송나라 연호(年號)이니 려(麗)는 고려라는 뜻이 니 고려 건덕이라는 것이다. 즉 고려 광종 19년 서기 968년이니 박영규장군의활동과사망년도로추정된다. 이곳 당살미 마을 촌로들의 이야기는 약 200여년 전 도포입고 말을 탄 양반들이 묘소를 찾으러 왔는데 양반들이 들락거리며 임자 없는 농토를 지어먹고 사는 그곳 양민들은 농토를 빼앗길 까 보아 박장골 박장군 묘를 모른다고 가르쳐주지 않았다는 말 이전해내려오고있다고전해준다. 묘소의 문인석은 뽑혀져 나가 양쪽 계곡에 뒹굴어 방치되어 있다. 이는 한산이씨 후손인 대전지역 국회의원 및 계룡장학재 단 이사장의 조부께서 자기집안의 기를 누른다 해서 1950년경 문인석을 뽑아 양쪽 계곡에 버렸다는 당살미 마을의 노인들의 증언이다.인부로 참여하는 분의 증언도 있다.이후 기(氣)를 회 복하였음인지 자손 대에 이르러 대전지방 유력인사로서 모든 방면에서두각을나타내고있는지모르겠다. 묘소 보존회 풍동 회장은 우리 순천박씨는 역사서에 기록된 삼중대광공의 후손임이 분명할 진데 묘소 실전을 매우 부끄럽 게 여겨야 할 것이며, 묘 비문을 부정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긍 정적인 사고로 바라보아야 한 다 고 지 적 한 다. 그리고 세 보 의 기 록 과 묘 소 위 치 의 주변상황이 일 치하고 더욱이 묘비의 연대가 삼중대광공 할 아버지의 활동 기였고, 희미 하게나마 ‘英 規’ 두글자가 분명하니 우리 순천박씨는 우 러 러 받 들 어 년년세세 가례에 의한 조상숭배를 강화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 한다. 한편 박영규 장군의 묘비에 대한 고증은 前 성균관 전의 이상 학, 전남 장흥군 대덕읍 원로학자 박문수, 순천 황전면의 허영 재,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진인호, 순천향토사학자 이 현모, 前 순천향교 전교 황규중 선생 등이 확인해 주고 있어 묘 소를답사한전문가의답사기를실어이해를더해본다. 【대전광역시 동구와 옥천군 군북면, 군서면 등 세 지역에 걸 쳐있는식장산맥이북으로견두산(犬頭山)을 이루고 다시동북 으로 기복(起伏)을 하여 노고산(老姑山)이 되었고, 이 노고산 을 가기 전에 효평동 당살미 마을 막바지에 예부터 전해져 오는 ‘박장골’이 있다. 박장골 넘어는 동쪽에 회덕황씨 촌(村)으로 전해지는 회덕황씨 시조묘와 사당 등이 전해오고 있는 곳이며 대청호가 경치를 이룬 가운데 첫째 박장골이라는 고을 이름이 그렇고,둘째그후손인박우동(朴禹東,전남순천)이제공한그 족보와 강남악부(江南樂府·順天古記)에서 그 자료를 취(取)했 고, 셋째 박노달(朴魯達, 청주시)과 박철규(朴哲圭, 청원군 북 이면)가 꿈에 박 장군의 묘를 찾아본바와 박장골이 꼭 같다는 신비스러운 설(設)에도 고증(考證)에 도움이 되었고, 이밖에 고려사열전에서 보인 박영규 전(傳)에서도 자료를상고하고 사 육신의한분이신성삼문의후예성열신(대전)氏가제공한자료 에도 포함되어 지난 1992년 12월 20일부터 수차례에 걸쳐 본 시 사편찬위원회 연구원 송인협(本市史編 纂委員會 硏究員 宋寅 協), 양승율(梁承律)과 함께 현지 답사(踏査)에 착수(着手)하 였던 것이다. 그 후 대전 동구 유병하(兪炳夏) 청장(廳長)도 김 행남(金幸男)공보실장을대동하고 나와함께답사에 동행한바 있다. 순천박씨 족보에 의하면 박영규의 고총(古塚)은 「공주(公 州)유성(儒城)동한산(東漢山)의 黃氏塚上村」이라고 한바 황 씨총이란바로회덕황씨(懷德黃氏)일 것으로 단정하고 이를 근 거(根據)로 하여 회덕황씨(懷德黃氏) 시조묘의 근처인 「박장 골」을 의심(疑心)하여 본것이다.왜냐하면 본래순천박씨의 선 세(先世) 유적(遺蹟)이 있는 곳이다. 취금헌(醉琴軒) 박팽년 (朴彭年) 선생이 대전 동구 가양동 더퍼리에서 살았다는 유허 비(遺墟碑)가 지금도 전해오고 있고 또 박팽년의 증조부인 박 원상(朴元象)선생의 묘가 대전 동구 대별동(大別洞)에 있으니 박 원 상 선 생 과 박 영 규 장 군 의 사 이 는 대 수 (代 數 ) 가 멀 지 않 아 서 더욱 확신(確信)을 하게 되었다.그러기에 박영규 장군의 고 총은 박장골이 틀림없다고 심증(心證)하지만 아직 물증(物證) 에 확정(確定)할 수는 없고 우선 의심(疑心)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그 고총을 조사한바 4尺石碑가 묘 앞에 세워졌고 상석 (床石)이 있으며 묘는 언제인가 앞쪽에서 도굴(盜掘)해간흔적 (痕迹)이 있으며 비문(碑文)은 거의 마멸(磨滅)되어 글씨가 알 수가 없지만 그가 후백제 견훤(甄萱)의 사위로서 비전면(碑田 面)에는 鄕자 甄자로 의심되는 솺변과 瓦변이 한쪽으로 남아 있고 비후면(碑後面)에는 乾德六年 十二月 日이라는 글자가 완 연하게 남아 있어서 乾德六年이란 중국 요(遼)나라 천조제(天 祚帝) 乾德六年 고려(高麗) 예종(睿宗)1년 서기1106년 병술년 에 해당(海棠)하는 해라고 볼 때 박영규 장군이 죽은 지 백년이 내의 일이라고 보는 바이다. 본 비(本碑)는 옥개석(屋蓋石)이 없는 높이 四尺정도의 작은 碑로서 앞뒤로 글자가 새겨졌으나 거의 九百年이 지난 오늘에 이르러 마멸(磨滅)되고 비 앞에는 거 치 른 상 석 이 3 尺 × 4 尺 程 度 두 께 2 0 ㎝정 도 로 된 바 누 가 살 펴 보아도오래된고총인것만은쉽사리알수있었다.거칠게마석 (磨石)한 얇은 상석이 있는 위는 墓 앞쪽에 언제인가 오래전에 도굴(盜掘)해간 흔적(痕迹)이 있어 움푹 파여 있다. 묘(墓)의 외향(外向)은 해좌사백(亥坐巳白)으로 주위가 오리(五里) 범 위로 잘 쌓여 있어 명당(名堂)으로 보이지만 지금까지 묵어있 으니 청룡(靑龍)날이 죽어 있어서인가도 싶다. 어쨌든 이 墓는 보통 사람의 고총이 아니며 더구나 박장골이라는전설(傳說)이 름 과 함 께 조 사 하 여 본 바 확 실 한 고 증 (考 證 )은 희미하지만 심 증(心證)할 여지가 없다고 볼 때 우선 실증(實證)해보고 자세 한것은후일을기대(期待)할뿐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박영규는 승주(昇州) 사람이며 견훤(甄萱) 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며 견훤의 막하(幕下)의 장군으로 되었 다.신검(神劒)이 반역(叛逆)을 일으키자 견훤이 귀순(歸順)하 여 왔을 때 박영규는 자기 아내에게 말하기를 뷺대왕께서 40여 (餘)년간의 권고(勸苦)로써 공훈(功勳)과 업적(業績)이 거의 이루어지고 있다가 일조(一朝)에 집안사람의 화(禍)로 인하여 국토(國土)를 잃고 고려에 투항(投降)하시였소 열녀(烈女)는 두남편을섬기지않고충신은두임금을섬기지않는법인데만 고(萬苦) 우리 임금을 버리고 적(敵)을 섬긴다면 무슨 면목으 로 천하의 의(義)로운 사람을 만나보겠소 더구나 듣건데 고려 의 왕공(王公)은 인후(仁厚)하고 근검(勤儉)하여 민심을 얻고 있다하니 이것은 아마도 하늘의 계시(啓示)로다 반드시 삼한 (三韓)의 군주가 될 터이니 어찌 사지(使紙)를 보내서 우리 왕 을 위문(慰問)하고 겸(兼)하여 왕공에게 우리의 은근한 성의 (誠意)를 알리여 주어 장부(丈夫)의 행복(幸福)을 도모(圖謀) 하지 아니하리오뷻라고 하니 그의 아내는 대답하기를 뷺당신이 한 말이 바로 나의 뜻에 맞습니다.뷻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태조 (太祖)19년(936)2월에 박영규는 드디어 사람을 파견(派遣)하 여 귀순(歸順)할 뜻을 표시하고 또 말하기를 만고(萬苦) 의 (義)로운 군대(軍隊)를 이곳에 보내시면 제가 미응하여 관군 (王師)을 영접(迎接)하겠습니다. 라고 하였더니 태조가 크게 기뻐하여 그가 보낸 사람을 후(厚)하게 상(賞)주고 돌아가서 박영규에게 다음과 같이 전달(傳達)하라고 말하기를 「만고(萬 苦) 당신의 혜택(惠澤)을 입어 길이 막히지 않고 가게 되면 먼 저 장군을 방문할 것이요 댁에 가서 부인에게 배례(拜禮)하되 형수(兄嫂)처럼 섬기고,누님처럼 존경(尊敬)하겠고 반드시 끝 까지 후(厚)한 보답(報答)을 하겠소 천지귀신(天地鬼神)들은 모두나의이말을들었을것입니다」라고하였다. 9월에 태조(太祖)가 신검(神劍)을 토벌(討伐)하고 멸망(滅 亡)시키고 나서 박영규에게 말하기를 견훤이 나라를 잃어버리 고멀리와서있는데그의신하들이한사람도그를위하지않았 다. 그런데 홀로 그대 부부(夫婦)가 천리(千里) 밖에서 소식을 전(傳)하여 성의(誠意)를 표시하였고 겸하여 나에게 귀순(歸 順)할 뜻을 표시하였으니 이 의리(義理)를 잊을 수 없는 일이 다. 라고 하면서 좌승(佐丞)으로 임명하고 전답(田畓) 일천경 (一千頃)을 주고 역마(驛馬)35匹로써 그의 가족들을 맞아오게 하였으며 그의 두 아들에게 벼슬을 주었다. 박영규는 후일(後 日)에벼슬이삼중대광(三重大匡)에이르렀다.라고하였다. 고려사절요에도대개이와같은말로적혀져있다. 강남악부(江南樂府 趙顯範 1784지음)에 보면 평양구지(平陽 舊誌)에 이르기를 박영규는 강남군(江南君)의 후손(後孫)이 다. 견훤의 사위가 되고 이 땅에 군장(君長)이였다. 도리(道里) 해룡산(海龍山) 아래 홍안동(鴻雁洞)에 웅거(雄據)하였는데 뒤에 고려에 항복(降伏)하여 좌승(佐丞)의 벼슬을 하사(下賜) 받았다. 죽어서는 해룡산 산신(山神)이 되었고 순천박씨 중시 조(中始祖)가 되었다. 라고 하였다. 순천박씨 세보(世譜)에 의 하면 박영규의 자손은 아들 형제(兄弟)는 기록이 없어 고증(考 證)할 수 없고 딸은 고려사에 기록하기를 뷺고려 태조의 동산원 (東山院) 부인 박씨는 승주인(昇州人)이니 삼중대광(三重大 匡 ) 영 규 (英 規 ) 의 딸 이 다 뷻라 고 하 였 고 또 이 르 기 를 고 려 정 종 (定宗)의 문공왕후(文恭王后)라 시(諡)하여 안릉(安陵)에 장 하고 정종묘(定宗廟)에 부제하였다. 목종(穆宗) 5년(西紀 100 2) 4월에 숙절(淑節)을 가(加)하고 현종(顯宗) 5년(1014) 3월 에 효온(孝 )을 加하고 18년(1027)4월에 경신(景信)을 加하 고 뒤에 또 선목(宣穆) 순성(順聖)을 加하였으며 문종(文宗) 1 0년(1056) 10월에 정혜(貞惠)를 加하고 고종(高宗) 40년(1253 년)10월에는 안숙(安淑)을 加하였다.라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고려정종(高麗定宗)의 문성왕후 박씨도 역시 영규(英規)의 딸 로 경춘원군(慶春院君)과 공주(公主) 一人을 낳았다. 라고 하 였다. 이와 같이 박영규는 당시 아들 둘과 딸을 두었는데 맏은 태조 (太祖)부인(夫人)이요 둘은 정종(定宗)의 왕후(王后)이다. 박 영규 장군은 견훤의 사위로서 견훤과 함께 고려태조에 투항(投 降)하여 고려 개국공신이 되어 벼슬은 삼중대광(三重大匡)이 되었고 승평군에 봉(封)해졌으며 사후(死後)에 시호(諡號)는 정양공(貞襄公)이었다고 순천박씨 세보(世譜)에 적혀있지만 그 족보(族譜)에는 또 이르기를, 을보(乙譜) 曰 尼城刊譜 공봉 승평군(公封昇平君) 시(諡) 정양공운이려조이성봉군지법(貞 襄公云而麗朝異姓封君之法) 시어충선왕시칙공이려초인사(始 於忠宣王則公以麗初人似) 무봉군지리(無封君之理) 시호역무 고거처병미상(諡號亦無考據處幷未詳) (乙巳譜에 의하면 尼城 刊譜에는 公이 승천군(昇天君)으로 봉군(封君)되였고 시호는 정양공(貞襄公)이라고 이른다. 그러나 고려조에서는 이성(異 姓)에게 봉군(封君)하는 법제(法制)는 충선왕(忠宣王)때 1275 ~1314에서 비롯되었으니 公은 고려 초 사람인 까닭에 봉군(封 君)할 이치(理致)가 없을 것이며 시호도 또한 고증할 근거(根 據)가 없으니 모두 자세한 것이 못된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말은 잘못된 말이다. 왜냐하면 태조(太祖)의 시호가 신성(神 聖)이고 태조의 아들 정종(定宗)의 시호는 문명(文明)인데 모 두 公의 사위가 되니 公은 개국공신인 까닭에 봉군과 시호가 없 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여 이에 훨씬 앞서 신라(新羅)의 효공왕 (孝恭王)은 도선국사(道詵國師)에게 요공선사(了空禪師)라는 시호를준바있는것으로미루어보아그이전부터도봉군과시 법(諡法)이 있었던 것으로 판명(判明)될 때 박장군의 봉군과 시호는분명한사실(事實)로비정(比定)된다. 특히 더 확실한 사실은 당시의 당진(唐津 沔川) 박씨 시조 박 술희(朴述熙(希)도 태조를 도와 개국공신으로서 삼중대광이 되었고 면천군에 봉군되고 시호는 엄의공(嚴毅公)으로서 면천 박씨 시조가 된다.이것으로 보아도 박영규 장군과 같은 시대에 같은 공적(功績)으로 훈공(勳功)을 받은 인물들인데 박영규의 봉군과 시호가 확실한 것인데 어찌하여 이성(異姓) 봉군법과 시호는 고려 충선왕 때에 시작되었다고 하면 부정(否定)한단 말인가 이와 같이 모든 근거(根據)를 종합할 때 박영규 장군은 승천 군이며시호는정양공이며 묘소(墓所)는 효평동 박장골임이 틀 림없다고 보는 바는 그 사적(事跡)이 족보에 나타났고 강남악 부나 고려사에 인물(人物)을 보였고 박장군 고총에서 비문(碑 文)을부정했으나 죽은자는말이 없다 천고(千古)의 비장을캐 어보는 후인(後人)들의 통합적(統合的)인 근거로 추정(推定) 하고 비정(比定)하였지만 더 자세한 것은 후인(後人)을 기대 (期待)하여더확실히비정(比定)되기를기다린다.】 1983년1.17. 대전시사편찬위원회상임위원권영달 순천박씨시조박영규장군묘소 추정봉분발견 족보기록에전해져븣매년묘제봉행 박풍동회장이 묘소를찾아묘비에대해설명하고있다. 순천박씨을유보 뽑혀버려진문인석 촉망받는 공직자로 출발하여 재무부 국고국장,청와대 사 정비서관,국보위재무분과위원,입법회의 경제전문위원,조 달청 차장 등 요직을 거치고 환경청장으로 재임시 무연휘발 류와 저공해자동차로 자동차 수출의 길을 열고, 김포에 650 만 평에 달하는 대단위 해안쓰레기 매립장을 확보하여 수도 권 쓰레기 문제를 해소하였으며, 공병수거 등의 재활용 등 지 금 누 구 도 할 수 없 는 일 들 을 3 0 여 년 전 시행하는 등 우리 나라환경사에큰족적을남기고공직을마감한다. 21세기로 건너오는 길목에서, 이 시대의 화두가 된 ‘환경에 이어 국 제디자인대학원대학교 총장을 맡 아 100대기업 CEO를 통해’ 디자인 강국의 꿈을 실현해 낸다. 한평생 스 스 로 부 끄 럽 지 않 게 소 신 껏 엄 중 하고헌신적인삶을살아낸다. 박 전 청장은 '창의적인' 공직자 의 길을 지향하여 새로움에 도전할 때 가장 즐거웠다고 회고한다.소년시절부터 호기심이 생기 면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해보고 마는 기질이 못내 늘 새 로운 일에 도전하는 존재가 되어야 했고, 국가 백년대계를 생각하며 멀리보고 일을 하는 자세를 키웠다. 돈과 권력 앞 에 휘둘리지 않고 원칙을 지키며 소신 있게 일을 한 공직자 로 기억된다. 한 인간으로서도 각고의 의지로 스스로의 한 계를 넘어서는 반면 인간적인 면모도 놓치지 않는다. 평생 에 걸쳐 공부하고 성현의 말씀을 통해 거울을 삼는 선비의 모습을 견지하는 그가 철학과 경륜을 갖춘 진정한 의미의 공직자로살아갈수있었던것은우연이아님을알수있다. 박 전 청장은 이날 인사말에서도 관료의 부정부패가 백성 을 봉기하게 만들어, 그것을 보고 자라면서 반드시 관료가 되어 부정부패를 없앨 꿈을 키웠다고 말하고 사심이 없고 원래원칙을 고수하다보니 적이 많아졌다며 조달청차장 재 임시 이권과 청탁을 멀리하기위해 매일 도시락을 가지고 출 근했던일을소개했다. 한편 이날 기념회에는 문규용 IDAS 총동문회장, 이규용 전 환경부장관, 이정섭 환경부차관, 박원탁 전 국회의원, 이 동호 전 내무부장관, 이남식 객원예술대 총장, 이인수 이승 만 대통령 기념사업회 이사장, 최영철 전 국회부의장 이기 남 전 법무부장관, 이만희 전 환경부장관 등 전현직 정관계 인사들과 박채회 졸당공파 대종회장을 비롯한 임원진,박종 도 졸당공 재경종친회 등 500여명이 행사장을 가득 메워 행 사를빛냈다. ▶ 1면 븮박판제 환 경청 장 회 고 록븯에서 이 어 짐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