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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11월30일 수요일 12 (제119호) 기획 훌륭한위인의뒤에는훌륭한어머니와가문의배경이뒤를잇는다.점필재김종직선생은우리나라조선초성 리학을이룬대학자로평가를받는다.그런그 를낳고키워준분이밀양박씨라는사실을알고있는일가분은드물다.부인은밀양의지동리에서사재감정을 지낸박홍신의무남독녀외동딸로태어나17 세에어머니를여의자예제(禮制)에지나치도록너무슬퍼하다가병을얻어위독하게되리만큼효녀이다.그 리고아버지사재감정공이대마도정벌에종군 하였다가 전몰(戰歿)하자 홀로 남겨져 부인의 외조모는 유자(儒者)의 행의(行義)가 있는 사람을 사위로 삼고 자 선산인 김숙자에게 시집보내 김종직을 낳았 다.김종직의외조부박홍신은밀성대군후(后)12중조의한분이신영동정공(휘원광)의후예로그후손들이지 난10월김종직의생가를방문하여김종직선 생과밀양박씨에대해새롭게조명하고있어이번호에는김종직이지은어머니밀양박씨의행장과외조부박 홍신에대해소개해본다. ▲점필재김종직 경상남도 밀 양 출 신 이 며 본관은 선산 (善山;일선 一 善)이다. 자는 계온(季 종) · 효 관 ( 孝 꿍) , 호는 점필재 (탕畢齋), 시 호는 문충(文 忠)이다. 1431 년 경 상 남 도 밀양에서 부 친 김 숙 자 의 막내로 태어 났다. 성리학 에 밝았던 부 친에게서 학 문을 익히며 남다른 재능 을 보 였 다 고 전해진다. 145 3년(단종1) 2 3세 때 과거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459년(세조 5)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사가독서 (賜暇讀書)를 했으며, 정자(正字)·교리(校理)·감 찰(監察)·경상도병마평사(慶尙道兵馬評事)를 지 냈다. 성종(成宗) 초에 경연관(經筵官)이 되고, 함 양군수·참교(參校)·선산부사(善山府使)를 거쳐 응교(應敎)가 되어 다시 경연에 나갔다. 김종직의 벼슬은 도승지·이조참판·경연동지사(經筵同知 事)·한성부윤·공조참판(工曹參判)·형조판서·중 추부지사(中樞府知事)에까지 이르렀다.문장과 경 술(經術)에 뛰어나 이른바 영남학파(嶺南學派)의 종조(宗祖)가 되었고, 조선초 성리학을 이룬 대학 자로 평가되었다. 문하생으로는 정여창(鄭汝昌)· 김굉필(金宏弼)·김일손(金馹孫)·유호인(兪好仁) ·남효온(南孝溫) 등이 있다. 정치적으로는 성종의 특별한 총애를 받아 자기의 문인들을 관직에 많이 등용시켰으므로 훈구파(勳舊派)와의 반목과 대립 이 심하였다. 김종직은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을 실 현하는 도학정치를 펼치기 위해 급진적인 개혁을 요구하였으며 결국 훈구파 세력과 대립할 수 밖에 없었다. 그가 죽은 후인 1498년(연산군4) 그가 1457년에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관(史官)인 김일손 이 사초(史草)에 적어 넣은 것이 훈구파의 거물급 이었던 이극돈(李克墩)에게 발각되었고 같은 훈구 파 세력이었던 유자광 등이 주도하여 조선시대 최 초의 사화인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게 되었 다.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은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고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단종을 애도하는 글이었다.이사건으로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 였으며, 그의 문집이 모두 소각되고, 김일손 ·권오 복(權五福) 등 많은 제자들과 사림파들이 죽음을 당하였다.중종(中宗)이즉위하여훈구파가몰락하 고 사림파가 다시 정권을 잡게되자 김종직의 신원 이회복되고숙종(肅宗)때에는영의정에추증되었 다. 밀양의 예림서원(禮林書院), 구미의 금오서원 (金烏書院), 함양의 백연서원(栢淵書院), 금산(金 山)의 경렴서원(景濂書院), 개령(開寧)의 덕림서 원(德林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점필재집( 탕 畢齋集),저서에유두유록(流頭遊錄),청구풍아(靑 丘風雅),당후일기(堂後日記)등이있고,편서에동 문수(東文粹),일선지(一善誌),이준록(彛尊錄)등 이있다.<네이버지식백과(두산백과)에서옮김> 부인(夫人) 밀양 박씨(密陽朴氏)는 중직대부 (中直大夫) 사재감정(司宰監正) 휘 홍신(弘信)의 딸이다. 증왕부(曾王父) 휘 인기(仁杞)는 첨지중 추원사(僉知中樞院事)에 추증 되었고, 왕부 휘 천 경(天卿)은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추증 되었다. 비( 삽) 여흥 민씨(驪興閔氏)는 삼사좌윤(三司左 尹) 휘 위(暐)의 가운데 딸이며, 고려 때 판도판서 (版圖判書)에 추증된 휘 일천(日阡)의 증손이다. 건문(建文)2년 경진년(1400, 정종2)에 부인이 밀 양의 지동리(池洞里) 집에서 태어났는데, 딸이 하 나인 관계로 부모 및 왕모(王母)인 정부인(貞夫 人)위씨(魏氏)의사랑을독차지하였다. 그러다가 영락(永樂) 14년 병신년(1416, 태종1 6)에민부인이작고하자,부인은그때나이17세로 예제(禮制)에 지나치도록 너무 슬퍼하다가 이로 인해 병을 얻어 위독하게 되었으므로,감정공이 매 우 힘써 치료하여 마침내 병이 나았다. 그 후 감정 공은 서천리(西天里)에 재취(再娶)하였으나 금실 이 좋지 않았고, 또 벼슬살이 때문에 서울로 가버 렸다. 그러자 부인은 외조모(外祖母) 손부인(孫夫 人)에게 의탁하여 살았는데, 서모(庶母) 소련(小 蓮)이 항상 부인을 보호해 준 가운데 이따금 서천 (西天)으로 가서 계모(繼母)를 찾아뵙기도 하였 다. 기해년 6월에 감정공이 좌군 지병마사(左軍知兵 馬使)로 대마도의 토벌에 종군했다가 이로군(尼老 郡)에서 전몰(戰沒)하자, 그 다음해에 손 부인이 감정공이 무예(武藝)로 등용되어 이역(異域)에서 죽은 것을 대단히 가슴 아프게 여긴 나머지, 유자 (儒者)의 행의(行義)가 있는 사람을 사위로 삼고 자 하여 마침내 부인을 우리 선공에게 시집보냈다. 또 다음해에는 선공이 성균학유(成均學諭)가 되어 서울로 가자 부인도 따라갔는데, 계묘년에 선공이 출처(出妻)의 아비인 한변(韓變)의 무함에 의해 파직되자,마침내함께고향으로돌아왔다. 신해년 가을에는 선공이 고비(考 삽)의 상(喪)을 당하여 여묘 살이를 하였고, 상을 마친 때로부터 2 년 뒤인 을묘년에 선공이 부름을 받고 서울에 올라 가 학 록 (學 錄 ) 이 되 었 다 . 그 후 20년 동안 중외(中外)의 관직을 역임할 적 에부인은반드시세아들과두딸을데리고따라다 녔다. 경태(景泰) 4년(1453,단종1)에는 선공이 성균사 예(成均司藝)로 있다가 성주교수(星州敎授)로 나 갔는데 부인은 밀양에 있었고,막내딸의 혼례를 마 치고 나서는 선공 또한 벼슬을 그만두고 집에 있었 다. 병자년에는 우리 백형(伯兄)이 과거에 급제하여 미처 돌아와서 뵙기도 전에 3월 2일로 선공이 작고 하였다. 선공의 담제( 딨祭 )를 마 친 그 다 음 해 인 기 묘년에는 종직 또한 과거에 급제하여 이해 10월에 우리두형제가함께조정에하직인사를올리고정 위(庭 쭘)로 돌아와서 영연(榮宴)을 열어드렸다. 이 때 선공에게는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중직대 부(中直大夫) 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이 추 증되었고, 부인 또한 영인(令人)에 올려 봉해졌다. 영연을 열던 날에 미쳐 먼저 선롱(先壟)에 분황(焚 黃)하고,이어서 부인을 판여(板輿)에 모시고 우리 두 형제가 앞에서 길을 인도하였는데 이 때 부사 (府使) 강숙경(姜叔卿)과 청도군수 이약동(李約 東),영산 현감(靈山縣監)최계동(崔繼潼),교수관 (敎授官) 유효담(柳孝潭)이 공당(公堂)에다 영연 의 자리를 크게 설치하고 친히 술잔을 받들고 들어 와서 부인께 축수를 드리니 온 고을 사람들이 모두 영화롭게여겼다. 성화(成化) 6년 경인년(1470, 성종1)은 바로 금 상(今上)이 즉위한 해인데 종직이 외람되이 경악 (經幄)에서 상을 모시다가, 이때 부인의 나이 71세 가 되었는지라 사직하고 돌아가서 부인을 봉양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자 상이 특명으로 함양군수 (咸陽郡守)를제수하였다. 병신년에는 종직이 조정에 들어가서 지승문원사 (知承文院事)가 되었다가 또 돌아가서 부인 봉양 할 것을 요청하자 상이 명하여 선산도호부사(善山 都護府使)를 제수하였는데 두 번 다 부 임 ( 赴 任 )한 곳으로 부인을 맞아다가 봉양하도록 윤허하였다. 그런데 선산은 바로 우리 향관(鄕貫)이라서 선조 (先祖)와 선공이 살았던 집이 성서(城西)와 밀접 해 있었으니 여기가 실로 부인께서 옛날 선영에게 제사를받들었던곳이다. 그리고 강씨(康氏)가문에 출가한 자씨(姉氏)도 여기에 산 지 30년이 되었는데 원림(園林)과 당실 (堂室)이 완연히 옛날과 같았다. 그래서 부인은 매 양 봄, 가을마다 풍일(風日)이 맑고 아름다울 적이 면 자 씨 집 에 나 가 있 으 면 서 후 원 (後 園 ) 으 로 걸 어 가서송죽(松竹)을돌아보곤하였다. 그리고 그 이웃에는 본래부터 서로 좋게 지내던 한 노파가 있어 그 또한 건강하였으므로 반드시 그 를초대하여옛날의일을얘기하곤하였다. 자씨의 아들 백진(伯珍)은 정유년에 과거에 급 제하였고, 백형의 아들 치(緻) 또한 진사(進士)에 합격하였으므로 종직이 태수(太守)로서 향중(鄕 中)의 부로(父老) 및 제족(諸族)의 부인(婦人)들 을 모 아 놓 고 크 게 풍 악 을 베 풀 어 영 연 (榮 宴 ) 을 벌 이니 구경하는 사람이 마치 담장을 친 것처럼 매우 많았다. 그로부터 3년 뒤인 기해년 10월에 부인이 병으로 누워 오래도록 낫지 않으므로, 중형(仲兄)은 청송 (靑松)으로부터 와서 모시었고, 치(緻) 또한 거창 (居昌)으로부터 왔다. 이 때 막냇누이는 밀양(密 陽)에 있었는데 부인께서 막냇누이를 더욱 불쌍히 여겨 사랑하였으므로 종직이 누이가 만일 와서 부 인을뵈면기쁨으로인해병이나을수있으리라희 망하는 뜻에서 사람을 보내 누이를 맞아왔다. 그래 서 5인이 함께 모였는데 마침내 12월 21일에 공아 (公衙)의 중당(中堂)에서 작고하시니, 향년이 80 세였다. 이달28일에 애자(哀子)들이 널[柩]을 받들고 밀 양으로 돌아와서 경자년 정월 3일에 지동(池洞)의 분저곡(粉底谷)에 초빈을했다가,3월17일에선공 및민부인의두산소사이에장사지냈다. 부인은 어려서부터 지극한 성품이 있어 모든 옷 짓고 음식 만드는 일들에 대해서 애써 가르쳐줌을 받지않고스스로익히었다. 감정공이 빈객(貧客)을 좋아하여 밤낮으로 빈객 이 문 에 그 득 했 고 , 또 백 부 (伯 父 ) 인 절 제 공 은 누 차 대진(大鎭)의 장수가 되어 계속하여 와서 위 부인 을 뵈었으므로 거기(車騎)가 매우 성대하였다. 그 때마다 부인께서 손수 음식을 준비하여 대접하였 는데음식이정갈하고풍후하지않은것이없었다. 기해년 7월에 동정원수(東征元帥) 장천군(長川 君) 이종무(李從茂)가 군사를 거느리고 돌아오면 서 지동(池洞)의 앞길을 지나자 부인이 울타리 안 에서 부르짖어통곡하면서 여종[女僕]으로 하여금 길옆에 나가 서서 부인의 아버지는 어디에 계시는 가를 물어 보게 하였다. 그러자 장천군이 말고삐를 당기고 서서 길게 탄식하다가 옷소매로 얼굴을 가 리고 가면서 말하기를 “나의 죄가 아니라 여러 장 수들이 함부로 진격한 때문이니 원컨대 낭자(娘 子)는 나를 허물하지 마시오.”하였다. 그러자 길가 는 사 람 들 과 이 웃 사 람 들 이 모 두 그 광 경 을 보 고 눈 물을뿌리며울었다. 부인이 우리 가문에 시집와서는 공순하고 겸손 하며 어른들의 명을 잘 받들어서 친정에서 하던 효 도를시부모에게옮겨행하였으므로,우리왕부(王 父) 진사공(進士公)과 유부인(兪夫人)이 부인을 공경하고 중히 여기어 매양 남들에게 ‘우리 효부 (孝婦)’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선공이 봉엄(鳳嚴) 에서 여묘살이를 할 적에는 삭망(朔望) 때마다 부 인이 친히 제수(祭羞)를 준비하여 가서 분묘(墳 墓)에 전(奠)드리는 일을 돕고 절하고 엎드려 호곡 (號哭)하였는데 소상(小祥)과 대상(大祥)에도 한 결같이하였다. 선공이 서울에서 벼슬할 적에는 벼슬은 낮고 녹 봉은 박한데다 시골집 또한 멀어서 생활비가 제때 에 이르지 않아 조석(朝夕)거리가 항상 떨어지곤 하였는데 그때마다 부인이 이웃에서 양식을 꾸어 다가 조석 끼니를 공급하면서도 선공에게는 그 사 실을 모르게 하였다. 그리고 선공은 가묘(家廟)의 사시(四時), 속절(俗節), 기일(忌日)의 제사와 삭 망(朔望)의 참알(參謁) 때에는 반드시 가례(家禮) 를 상 고 해 서 하 였 고 , 그 찬 구 (饌 具 ) 는 이 천 (伊 川 ) 의 법식을 사용하였는데 비록 객지에 우거하고 있 을적에도또한조금도소홀히함이없었다.부인은 그때마다 반드시 힘을 다해 마련하여한 가지도 빠 진 것이 없게 하였다. 부인이 만년(晩年)에는 시골 에살면서친척중에나이많은여러부인들과서로 왕래하면서 맛있는 음식 한 가지만 있으면 반드시 나누어 먹고 조그마한 잔치라도 있으면 반드시 초 대하였다. 그리고 미천(微賤)한 사람들이 문안드 리고 물품을 가져올 경우에는 비록 채소나 과일 따 위일지라도 반드시 그에 대한 보답을 하되 오는 것 은 간략하게 받고 보내는 것은 많이 주어 돌려보냈 다. 선공이 작고한 이후에는 집 뒤 정원의 깨끗한 곳 에 당(堂)을 마련하고 삼신(三辰), 오제(五帝)에 게 배례(拜禮)를 했는데 그 첫날에는 두 차례로 정 해서했다가뒤에는세차례로하였다.그리하여아 무리 춥고 더운 때나 큰비가 오고 큰 눈이 내리는 날일지라도 빠뜨리지 않았으므로 고(孤)등이 풍한 (風 寒 ) 을 쐬 어 건 강 을 해 치 게 될 까 염 려 하 여 그 리 못 하시게 간(諫)하여도 듣지 않았고, 간혹 노비 (老婢)를 통해서 넌지시 뜻을 말씀 드리고 이따금 눈물을흘리면서간하기도하였으나듣지않았다. 그러다가 병이 위독해짐에 미쳐서는 일어나 배 례를 할 수가 없자 탄식하며 이르기를 “내가 배례 를빠뜨리는것이아닌가.”라고하였다. 일찍이 종직에게 이르기를, “네가 전성(專城)으 로 나를 봉양하게 된 것은 주상(主上)의 은혜이다. 그러나 다만 고원(故園)은 항상 마음속에 있으니 어느 날인들 잊을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 그래서 종직이 마침내 노복들을 시켜 시골집을 수리하게 하고 명년에는 벼슬을 그만두고 내의(萊衣)주1를 입고서 향리(鄕里)로 돌아가 어머니의 평소의 회 포를 이루어 드리려고 꾀하였는데 이 뜻을 미처 이 루지못한채 겨우 세시(歲時)를격해서이 크나큰 참혹한일을당했으니저푸른하늘이여어찌이한 이다함이있으리오. 평생 동안 뜻 받드는 일에는 이미 부끄러운 점이 있거니와 재력(財力) 또한 부족하여 초상 장사의 예도 의식대로 하지 못한 것이 많았고 뛰어난 행실 과 훌륭한 덕 또한 만분의 일이나마 칭도해서 후인 (後人)들에게 일깨워 주지 못하고 있으니 고(孤) 의죄악이큰것이다. 아무리 천지에 슬피 하소연한들 어떻게 죄악에 서도피할수있겠는가. 아,슬프다. [주1] 내의(萊衣) : 춘추 시대 초(楚) 나라의 효 자(孝子)인 노래자(老萊子)가 나이 칠십 세에 채 의(彩衣)를 입고 부모 앞에서 장난을 하여 부모를 즐겁게 했다는 데서 온 말로, 즉 부모에게 효도하 는것을비유한말이다. 공의 성은 박씨(朴氏)이고 휘(諱)는 홍신(弘信) 이며 관향은 밀양(密陽)이다. 공의 먼 윗대 선조 (先祖)는 영동정(令同正)박원광(朴元光)인데, 선 대부터벼슬살이로인해송경(松京)에서살았다. 공은 중조 영동정공의 8세이다. 계축년(癸丑年, 1373년 공민왕 22년)에 태어나, 모습이 보통 아이 와 달랐으나, 그의 형 박 사자가 학문을 좋아하다 가 일찍 죽었기 때문에 부모가 경서(經書)와 사서 (史書)를 읽지 못하게 하였다. 홍무 17년(1384년 우왕 10년)에 공의 나이 12세였는데, 이미 활쏘기 와말타기에능하였고장성하자검교중랑장(檢校 中郞將)을 거쳐 산원(散員)으로 승진하여 서경 도 원수(西京都元帥) 박공(朴公)의 막부(幕府)에 예 속되었다가 병인년(丙寅年, 1386년 우왕 12년)에 별 장 (別 將 )으 로 승 진 하 고 그 뒤 에 형 절 제 공 (節 制 公, 박언충)과 같이 향리로 돌아갔다. 절제공은 박 씨의 딸에게 장가들어 귀령(龜 룁)에서 살았고 공 은 삼 사 좌 윤 (三 司 左 尹 ) 민 위 (閔 暐 )의 딸 에 게 장 가들어지동(池洞)에서살았다. 조선(朝鮮)이 개국(開國)하자 법제(法制)를 일 신(一新)하여 무예가 뛰어난 사람을 특별히 뽑아 갑사(甲士)로 만들어 금병(禁兵)에 예속하였는데, 공 도 참 여 되 었 다 가 그 뒤 누 차 승진되어 사직(司 直), 호군(護軍)이 되었다. 영락(永樂) 12년(1414 년 태종 14년) 4월에 제물량만호(濟物梁萬戶)에 임명되었다가 9월에 병산포( 빅山浦)에 전임되었 고, 12월에 부름을 받아 행사직(行司直), 삼군진무 (三軍鎭撫)가 되었다. 그 뒤 얼마 안 되어 위 부인 의 상(喪)을 당하여 삼년상을 마쳤다.무술년(戊戌 年,1418년 태종 18년)에 중직대부(中直大夫)사재 감정(司宰監正)에 임명되었고,그이듬해1월에좌 사금(左司禁)이 되었는데, 바로 우리 세종대왕(世 宗大王)께서 즉위하신 원년(元年)이었다. 이해 5월에 명(明)나라의 강절(江浙)지방에 들 어가 노략질을 했던 대마도(對馬島)왜인(倭人)들 이 우리 서해(西海)에 침입하여 비인(庇仁)븡해주 (海州)의 지방에서 노략질을 하였다. 황해도절제 사(黃海道節制使) 이사검(李思儉)이 그들에게 포 위되었다가 그들에게 쌀과 술을 주니,그들이 포위 를풀고돌아갔다. 6월에 삼군(三軍)이 두지포(豆知浦)에 정박하 자, 적(賊) 5천여 명이 나와서 항전하다가 버틸 수가 없자 달아나 험악한 지대로 들어갔다. 그러 자 이종무가 길을 나누어 수색하다가 노약자들을 만 나 면 그 때 마 다 잡 아 죽 이 고 그 들 의 부 락 ( 部 落 ) 및 선박(船舶)을 불태우고 전답의 곡식을 모두 베어버린 다음, 훈내곶(訓乃串)에 목책(木柵)을 세우고 지켰다. 이렇게 7일간 지키다가 이로군 (尼老郡)으로 진군(進軍)하여 좌군(左軍), 우군 ( 右 軍 ) 을 독 려 하 여 먼 저 하 륙 ( 下 陸 ) 하 게 했 는 데 , 적들은 이미 일기(一岐)의 상송포(上松浦)에 구 원병을 요청하여 험난한 곳에 웅거해서 복병(伏 兵)을 해 놓고 우리 군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박 실(朴實)이 먼저 적과 만나 적병의 숫자가 적은 것을 보고 높은 곳으로 올라가 공격하려고 하다 가, 적의 복병이 뛰쳐나와 앞에서 돌격해 오자, 우리 군대가 크게 혼란해져 모두 병기(兵器)를 버 리 고 배 가 있 는 곳 으 로 달 아 나 우 리 군 대 끼 리 서로 짓밟고 배에 오르다가 배가 엎어져 죽었다. 이 보 다 앞 서 공 은 배 안 에 서 활 을 당 기 다 가 줄 이 갑자기 끊어지자, 매우 불길하게 여겼었다. 그런 데 이 날 박 실 이 군 대 를 수 습 하 여 물 가 로 돌 아 갈 적에 적들이 추격하자, 공이 뒤에 남아 힘을 다해 싸워서 적을 매우 많이 죽였으므로, 적들이 공을 지목하여 상발도(上拔都)라고 하였다. 공이 화살 이 떨어지자, 손으로 사졸(士卒)들을 지휘하면서 말 하 기 를 , 뷺 여 기 가 바 로 내 가 죽 을 곳 이 니 , 너 희 들은 속히 배를 타고 떠나라.뷻 하고 마침내 박무 양(朴茂陽)븡김해(金該)븡김희(金熹) 등과 함께 적에게 살해되었다. 7일 만에 이종무 등이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돌 아왔다. 이때에 공의 휘하(麾下)인 손맹(孫孟)븡박 종(朴種)은 모두 살아서 돌아왔고, 공의 노복 황은 (黃隱) 또한 군대의 짐들을 싣고 돌아오니, 조정에 서 쌀8곡(斛)을 부의(賻儀)로 지급하였다. 공의 얼 자(孼子븡서자) 박근생(朴根生)이 공의 의복을 부 (府)의 동쪽 단양리(丹陽里)에 장사지냈는데, 그 뒤 얼 마 안 되 어 박 근 생 이 또 자 식 도 없 이 죽 은 바 람 에 마침내 그 묘역(墓域)을 잃어버렸다. 민부인(閔 夫人)은 나이 40세로 공보다 3년 앞서 세상을 떠나 지동(池洞)의 서쪽에서 1리쯤 되는 분저곡(粉底 谷)에 장사지냈는데,모든 속절(俗節)에 부인의 묘 소에올라가공의제사도함께지내고있다. 점필재김종직의어머니밀양박씨와외 조부박홍신편 선조 유지를찾아븣 추원재(追遠齋)-경남밀양시부북면재대리(경상남도문화재자료제159).강호산인김숙자가처음거처를정한곳이며,그아들 점필재김종직이생장하고별세한곳이기도하다.두부자는모두문과에급제하여관인으로활약한업적도적지않지만,길재(吉 再)의학통을이어성리학의도통을세우고뿌리를내리게한사상적역할이특히중요했던역사적인물이다.그로인하여이곳은 조선시대사림파유학자들의정신적고향과같은곳으로간주되었으며,많은유학자들이이곳을찾아두분의학문적정신을추 모하고기렸던것이다.그러나여러차례전란과세월이흐르면서두분의유적은그대로보존되지못하고집채도많이낡거나허 물어지게되었다.이후1810년에사림과후손들이건물을개조하고중건하였으며,그것이지금전해지고있는것이다.재사(再思) 를추원재,당호를전심당(傳心堂)으로정한것은그때였다.전심은도학의의리정신을전하였음을기리는의미를담고있다. 지난10월영동정공파무숙공종중에서선조유적지탐방코스로추원재를들러권곤간사로부터설명을듣고있다. 부북면추원재건너편야산에있는정부인밀양박씨묘소. 정부인 밀양박씨 묘소아래에 있는 사재감정 묘소이다. 현재 까지외손봉사를받고있다. 선비 박 영인(朴令人) 행장(行狀) 외조 사재감정(司宰監正) 박공전(朴公傳)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