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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10월31일 월요일 6 (제118호) 관향조 종친회 수단유사명단 ※수단이접수되지않은종원은인터넷족보에서자동삭제되며추후등재시상당액의비용이뒤따를예정입니다 . △고직당공박갑곤(010-3769-1055),박흥기(전남순천,010-5496-9798),박행순(곡성겸면,010-5523-2367),박 종남(전남나주,010-9983-8794),박현준(곡성010-8801-8497),박일성(전주010-9477-4968),박진규(보성화 순010-8607-2075),박근호(순창 팔덕010-2681-3874),박일환(순창인계010-4846-8868)△진재공박상섭(01 0 -3268-7300)△정재공박상문(011-9612-6252),△극재공박정규(011-621-4298),박흥식(010-2683-9398)△인 재공박연규(010-9882-7845)△무은공박화석(전주010-3654-1505),박순옥(전주010-2545-4786),박순완(남원 010-4605-5187),박학석(경기010-9054-9876),박순정(전주 010-4359-0370),박상준(구례 010-7733-0321),박 해석(성주010-6399-9935),△석파공박수(011-641-5230)△동은공박영우(대구010-8254-1486)△취죽헌공 박영하(안동 010-7513-6511),박해운(안동010-3520-7353)△주부공박두식(안동 010-8578-1170)박해주(안동 010-3522-2393)△봉직랑공박만기(담양010-2607-4526)△제학공박영기(강원 삼척010-8613-1575) ※상기명단은지금까지수단유사회의에참석한유사로서아직수단유사가정해지지않은종중은즉시추천하 여발간에차질이없도록하여주시기바랍니다. 밀성박씨좌성공파대동보편수위원장 박화석 부위원장박영하박장환박정규 밀성(밀양)박씨좌상공파(左 相公派)대동보편찬안내 밀성박씨 좌상공파 대종회는 대동보를 발간하기로 하고 2014년 9월부터 수 단을 접수 하여 현재 마무리 단계에 있어 최종 접수기한을 아래와 같이 마감 예정임을 알려 드립니다. 단기간에 수단이 정비되어 우수하고 귀중한 족보 가 편수되어가보(家寶)로보존될수있도록많은협조를부탁드립니다. ○수단접수기한:2016년12월31일. ○세덕편(首編)묘소·재실·공적비등사진및비문접수마감동일 ○분 질:2016년4월중(서석단춘향) ○수단접수처:광주북구서하로352,2층201호(문흥동1006-1) 문의 010-3268-7300fax062-265-6053 총무이사박 상 섭 ※혹주변에좌상공후손이거주하고있으면대동보발간소식을알려주시기바랍니다 문향과 예향이 살아 숨 쉬고 우리나라 청백리교육의 메카로 떠오르며 주목받 고 있 는 전 남 장 성 의 수 산 사 추 향 이 지 난 5일(음9.5) 지역유림과 본손 등 100여명 이 참례한 가운데 배향된 6현(賢)의 정 신을기렸다. 이날 제례는 지역한학자 나천주(羅天 柱)선생의 집례로 이영만(李永滿)장성 군교육장이 초헌관으로 수좌(首座)에 배향된 돈재공 박연생 선생, 교리 김개 선생, 돈암 박자온 선생의 신위에 각각 분향과 전폐, 헌작과 공영갑(孔泳甲) 장 성문화원장의 독축에 이어 아곡 박수량, 백우당 박상의, 눌헌 박상지 선생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초헌례가 이어졌으며 이 후 유관종(劉官鍾) 지역 교육계원로, 김 홍립(金洪立) 황룡면장이 각각 아헌과 종헌으로 제례를 봉행하고,분포례(分脯 禮)를가졌다. 이날초헌관으로헌작한이영만교육장 은 우리의 전통문화와 예절을 답습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으며, 자라나는 학생들 에게 이 같은 문화를 전파하는데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하고 참석한 지역 유림 과본손들에게도고마움을잊지않았다. 한 편 수 산 사 본 손 대 표 노 강 박 래 호 선 생은 제물봉진에 앞서 제사를 잘 지내고 못 지내는 것은 제물의 화려하고 성대함 보다 경건한 마음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이날 제례에 대한 자세에 있어 헌관은 삼 상향을 할 때는 향을 눈높이만큼 받들어 올린 후 봉로에 놓을 것과 신도를 지날 때 합족 후 허리를 숙이고 지나야 한다는 제례 예절(禮節)에 대해 강조하고, 제례 를 모두 마친 뒤에는 본손들에게 별도의 분포례를갖고 돈재공의종손 경열,돈재 공파 도유사 래환, 부도유사 래지, 재무 유열 등에게 제수를 전달하고 고마움을 전달했다. 수산사는 지역의 여러 선비들이 돈재 박연생 선생과 교리 김개 선생의 학덕과 절의를 추모하기 위해 1833(순조33)년 황룡면 수산리에 창건하여 춘·로 향사하 다 1868년(고종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으로훼철되었다. 1977년 지금의 신호리 신촌의 밀성박 씨 도평의사공 후 돈재공 종중의 제당 (祭堂)뒤로 옮겨 사우(祠宇)를 복설(復 設)하고 아곡 박수량, 백우당 박상의, 눌 헌 박상지 선생을 추배(追配)하여 향사 를 모셨다. 복설하면서 기존(旣存) 강당 은 숭의당(崇義堂)이라 명명하고 전면 에 경앙문(景仰門)을 세워 外三門을 삼 았으며, 강당 동편에 지경재(持敬齋)라 이름한 동재격인 집과 변소를 지었으며, 수산사(水山祀)라 이름한 사당(祠堂)과 강당 사이에는 신문(神門)을 세우고, 19 86년 돈재 선생의 족제(族弟)이자 돈재 선생과 살아온 길이 같은 돈암 박자온 선 생을추배하여지금에이른다. 배향된 6현인(賢人)의 학덕과 인품은 장성지역의 문풍과 선비정신이 드러나 게 하는 근원지가 되어 장성은 선비정신 의 본고장으로 조선시대에는‘문불여장 성(文不如長城)’이라고 해 ‘학문에수산 사가 지난해 3월 강당 숭의당을 비롯한 외 삼 문 중 건 사 업 의 첫 삽 을 뜬 지 1 년 여 만에 마지막 공사인 외삼문(경앙문)이 완공되어 이제 담장 축조만 남아 조만간 산뜻한 모습으로 새롭게 선보일 예정이 다. 대해서는 장성만 한 곳이 없다’라고 하기도한다. 조선시대의 3대 청백리를 보면 충남 아산의 고불 맹사성(古佛 孟思誠, 1360 ∼1438) 경기 파주 반구정의 방촌 황희( 1363~1452), 전남 장성의 아곡 박수량 (莪谷 朴守良) 선생을 꼽아 우리나라 고 위공직자 1만여명이 아곡 선생의 청렴한 정신을이어받으려장성을찾고있다. 수산사 추향제례 봉행 배향된6현인(賢人)의절의와청백리정신기려.븣수산 사중건사업외삼문완공으로담장축조만남아 제례후 제관들이 강당 숭의당에 모여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이영만 초헌관, 유관종 아헌관,김홍립종헌관,나천주집례,공영갑축관 순. 제물봉진에서 제수의 이상유무를 확인하는 이 영만 초헌관 제례후분포례를갖고있다. ‘오늘은 속여도 내일은 못 속인다.’ 백 발이 지긋한 박경수 前 의원의 좌우명으 로 지금 살아가는 우리에게 삶의 방향을 제시할때온몸에힘이들어간다. 꿈을 갖고 살면서 모든 이에게 은혜를 입었다면 꼭 보답을 해야 한다.만약 그렇 지 못하면 속죄하는 뜻에서 반환해야하 기에 탄탄대로라 여겼던 3선 고지를 버리 고 스스로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천직인 농사꾼으로 돌아왔다며 위정자(爲政者) 들에게도 일침을 가하는 박경수 前 국회 의원을 강원도 원주시 소초면의 송어횟 집야외테이블에서만났다. 6·25 전쟁을 겪으면서 부모를 잃고 고 아가 되어 어린 두 동생을 끝내 부양하지 못하고 헤어져야 했던 아픔과 농사꾼으 로 재선의원에 오르기까지 그리고 다시 농사꾼으로 되돌아오기까지의 인생여정 은한편의드라마인듯싶다. 1938년 강원도 평창에서시조왕의67세 (世)로 밀성박씨 충헌공 후 판서공파 봉 사공 문중의 후손으로 비록 넉넉하지는 않지만 아쉬울 것 없는 집안에서 태어난 박 전의원의 삶은 6·25를 만나면서 피난 길에 봉화에서 전염병으로 어머님을 잃 은후보름만에또아버지를잃었다. 그리고 다시 찾은 고향에서는 고아가 된 삼남매의 양육에 대해 고민하고 걱정 하였으나 친척의 회유에 넘어가 전답을 팔고 따라가 의지하였으나 결국 쫓겨나 는 배신의 상처를 안고 큰댁으로 와서는 큰댁식구를 돌보아야하는 소년가장으로 홀로서야했다. 나무를 해서 팔고 숯을 구워 팔았다.그 리고 짐꾼으로, 설움 많은 천덕꾸러기로, 꿈 많은 유년기를 지냈다.그래도 착한 성 격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신임을 얻은 것 은 큰 위 안 이 되 었 다 . 결혼 후 잠시 시골을 떠나 서울에서 정 착하였으나 언제나 농촌을 잊을 수 없어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귀향을 결심 했다.귀향 첫해에는 집도 없이 남의 빈집 에서 거적을 덮고 자야만 하는 험난한 생 활의연속이었다. 빈손으로시작한농촌생활은믿음과신 용으로 개척해 나갔다. 농협의 융자로 농 토를 마련하여 담배농사를 짓기 시작하 면서어느정도안정을찾아갔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 려 하였으나 만25세에 몇 달이 부족하여 연령미달로 접어야 했다. 그리고 7대와 8 대 때는 941표, 810표를 얻어 꼴찌로 낙선 되었다. 국졸학력으로농사꾼에서여의도입성 ‘일어나라 농민이 부른다.’ 환상처럼 들 려 온 이 말 에 눈 을 뜨 고 결 심 을 하 였 다 . 어려운 농촌현실을 알리어 개선해 볼 심 산이었다. 그러나 공탁금이 문제였다. 출 마 결심을 굳히고 평소 존경하는 문창모 박사를 찾았다. 문 박사는 원주에서 이비 인후과 병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 박 사 는 말 도 안 되 는 소 리 라 며 귀 담 아 듣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통일민주당 공 천을받아오면생각해보겠다는것이다. 즉시 통일민주당 문을 두드렸다. 그러 나 총재 비서실 직원들은 실성한 사람 취 급을 했다. 그럴 것이 국졸학력에 농사꾼 이니 문전박대는 당연했다. 이른 새벽 교 회를 찾아 생면부지의 목사와 예배를 보 는데 목사는 ‘구하라 그러면 구할 것이요 븣 ’ 라는 성경구절을 인용하며 기도를 하 는데귓전에와닿았다. 곧바로 다시 통일민주당 총재권한대행 의 개인사무실(변호사 사무실)을 찾아 “저는 강원도 원성군 부론면 정산리에 사 는 농민 박경수 올시다.어려운 실정에 처 한 우 리 농 촌 현 실 을 위 해 현 직 농 부 인 제 가 이번에 출마해서 국회에 나고자 합니 다.그래서 통일민주당 공천 좀 받을까 해 서 온 겁 니 다 .”라 며 공 천 을 받 아 야 할 이 유를 설명했으나 총재 비서들이 이 사람 이미쳤나하고나가라는것이다. 이에 사무실을 나와 가는데 갑자기 여 직원이 김 권한대행이 부른다하여 가보니 공천은 끝났으나 일단 당사에 한번가보자 고 해 함께 걸어가는데 기자들의 공천 질 문에 갑자기 김 권한대행은 “기자 여러분! 우리 통일 민주당에서는 여기에 있는 농 민과 같은 진솔한 인물들을 공천할 것이 외다.”라고 말해 깜짝 놀랐다. 공천장을 받고 표밭을 누비는데, 마땅한 선거사무 소도 없고 가진 돈도 없었다. 그리고 당시 상대는 김용대 민정당 재정위원장으로 상 대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당선될 수는 없 겠으나 이번 기회에 어려운 우리 농촌 실 정을실컷호소해볼작정이었다. 선거가 막판에 이르면서 점점 희망이 보였다. 그리고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22 5표차로 13대 국회의원에 당선이 되었고, 1988년 7월 7일 임시국회 첫 대정부질문 자로 나서 당면한 농촌 현실 문제를 질문 해 당시 김영삼 총재는 “내가 여덟 번 국 회의원을 하는 동안 이렇게 감명 깊고 눈 물 나는 연설을 듣지 못했다.”라며 극찬 을아끼지않았다. 국회 입성 후 농·축협 조합장 직선제 실 시, 농촌폐비닐, 빈병 유상 수거제 실시, 경로우대증 제도 개선 및 경로수당 신설, 농어촌 청년문제 연구회 설립 운영, 횡성 군민회관 조기완공, 농촌 가로등 설치 등 농촌의 현안을 해결해 가며 논두렁 국회 의원,농민당총채등수식어가뒤따랐다. 1980년 초 농촌에는 청년들이 장가를 가지 못해 자살하는 등 결혼은 심각한 문 제였다. 박 전의원의 마을 부론면 정산3 리 57가구의 농가가 오순도순 살고 있었 는데 혼사가 끊긴지 7년째로 어린애 울음 소리가 들리지 않은 농촌으로 다른 마을 역시마찬가지다. ‘농촌에 산다는 이유로 장가를 못 가다 니, 이건 부당하다 짚신도 짝이 있다는데 신의 선물인 인간이야 말해 뭐하리, 그렇 다 그들에게 짝을 찾아주자’라고 결심하 고 ‘농사 농(農)자, ’벗 우(友)‘자 농우회 라는 조직을 탄생시켜 많은 일들을 했다. 기 금 을 마 련 하 기 위 해 칡 을 캐 가 루 를 내 어 서울에 내다 팔았고, 신문사, 방송사 문을 두드려 결국 단체 미팅을 열어 2쌍 의 첫 결 실 을 본 이 후 로 이 사 업 을 계 속 되 어 국회의원이 되고서는 더 활발하게 추 진하게 되었다. 중국의 조선족 여성들을 주선하기위해 중국을 수차례 다녀오면서 성과도 있었다. 그리고 키우던 송아지를 정착지원으로선물했다. 아마도 지금 인구 감소로 모든 경제가 주춤하고 있는 현실을 미리 예견하는 듯 신명나게 주선해 126쌍의 농촌부부를 탄 생시켰고그사업은계속추진되었다. 박 前의원은 농민의 대변인을 자처했 고,그에 걸맞은 정치활동을 이어갔다.그 리고 청빈한 국회의원으로 최선을 다했 다. 국회의원의 품위는 안중에 없었다. 회 기가 끝나면 시골집으로 가서 농사를 지 었다. 자동차가 없어 보좌관의 차를 이용 하기도 하고, 서울에 거처가 없어 의원회 관 집무실에서 야전침대에 쪽잠을 자고 식사는 구내식당에서 먹었다. 세비 외에 는 별 다 른 수 입 이 없 어 집 에 는 월 2 0 만 원 정도생활비밖에줄수가없었다. 국회의원이면누구나갖고있는후원회 조차 없었다. 그러다가 언젠가는 후원회 를 만들어 첫 행사에 겨우 150만 원이 들 어오고, 이후 후원회를 통해 들어오는 돈 이 월 2 0 만 원 정 도 될 까 말 까 하 는 데 이 또한대가성이라아예없애버렸다. 중고 티코자동차를 타고, 귀한 외화를 낭비하는 커피를 마시지 않은 그의 철학 은오직농촌현실타개였다. 1993년 공직자 재산등록 때 총액 6천5 백18만원을 등록했다. 농협에서 빌린 돈 2 천 만 원 을 빼 면 4 천 5 백 만 원 쯤 이 것 이 당시 박 의원의 전 재산이었다.전체 국회 의원중꼴찌에서두번째다. 청렴결백을 정치가의 최고선으로 여겨 왔던 박 전의원으로서는 ‘청렴 더하기 가 난’의 의미 인 ‘청빈’이라는 덕목이 새삼 스레 부각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나 당시 언론들은 박 의원의 청빈요소에 큰 의미를 부여하였고, 동아일보는 ‘진정한 애국자’라는 표현으로 대서특필하였다. 물론 뛰어난 의정활동이 있었기에 더욱 부각되었던것이다. 그리고우리나라신문기사를본미국의 교포들에게도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가 든글로브시의 부시장겸 시의원인 정호영 씨와 김태수 교민회장은 박 의원 부부를 초청하기에이른다. 그러면서 정호영씨는 “우리 교포들은 조국의 많은 국회의원들이 부정과 축재 에 눈이 멀어 있다는 평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박 의원의 의정활동을 보고서는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아,우리 한국에 도 이런 청빈한 국회의원이 있구나 모두 들 이렇게 입을 모아 찬탄하고 있어요.그 래서 우리가 그 자랑스런 분을 모셔 와서 격려도 하고 도움도 좀 드리자,이런 합의 를 봤던 겁니다.박 의원을 우리 가든그로 브시(市)에 초청하려고 방문했던 것입니 다. 라고 초청 배경을 설명하고, 박 의원 이 추진 중인 농촌총각 장가보내기 운동 에 적극 동참하는 의미에서 송아지 구입 자금을모금하여큰도움을주기도했다. 그리고 1994년 한국일보 정치부 기자가 선정한 ‘94년 국정감사 10걸’ 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당시의 기사를 보면 ‘현 직 농민임에도 불구하고 전문가 못지않은 분석력을 보였다는 점, ’야당 속의 야당‘ 역할을한인물로평한점이눈에띈다. 13,14대 국회의원을 지낸 동안 착실한 의정 활동으로,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적 극 후원자로 나서 15대 국회의원에 나서 줄것을강력히촉구하였다. 그 러 나 박 의 원 은 내 가 서 야 할 곳 을 알 고 있었다. 1996년 총선이 오기 전 불출마 를 선언했다. 금배지를 위해서라면 명분 도 소신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는 철새 정치인들의 행태에 대해 진절머리가 난 다며박차고나온것이다. ‘지금의 국회가 진정 민의의 전당입니 까?’,‘수단과방법을가리지않고당선만 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국 회의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국졸출 신의 박 의원이 두 차례의 의정생활을 마 감하면서 내린 결론이다. 그리고 우리 사 회가 이대로는 안 된다는 그의 강력한 메 시지이다. 현재의 정치현실 또한 마찬가 지여서 우리의 위정자들이 깊이 새겨 보 았으면한다. 국회의원에서농부로전업한박前의원 은 평범한 삶을 살면서도 농촌 현실을 타 개하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후학양성에 도 남다른 열정을 보여 모교인 평창군 대 화면 대화초등학교에 각종 도서 5천여 권 을 기 증 하 는 등 한 결 같 이 남 을 위 해 봉 사하며 열정을 쏟아 왔기에 지금 이 순간 한 번도 후회하질 않는다.청빈한 삶 속에 80을 바라보면서 건강이 좋지 않아 지난 해에는 사경을 헤매는 순간까지 이르러 조용히 삶을 정리해보기도 했단다. 그리 고 지금은 화,목,토 3일간 혈액투석을 받 으면서도 ‘농우회’ 마크가 선명한 모자를 쓰고 다니고 있어 농촌 현 실이 녹록하지 않음을 온 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아무쪼록 건강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남 아더많은지도를당부해보고싶다. 국졸학력으로농사꾼에서재선의원까지 박경수 전 국회의원 종/친/탐/방 의정활동 중에도 회기를 마치면 시골에 내 려와농사를짓는박경수전(前)의원 국졸학력으로농사꾼에서여의도입성 농촌총각장가보내고소한마리씩주어 븮청렴븯국정감사10걸에뽑힌농민당총재 농촌行븣진정한농사꾼으로거듭나 기자를안내한 박병일현종(左)이 박경수전의원 (右)과 포즈를 취한다. 병일 현종은 당초 박 의원 의 청빈함에 반해 지금은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박의원이 쓴모자에‘農友會’마크가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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