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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9월30일 금요일 7 (제117호) 종합 大同譜編纂委員會및編輯委員 △ 위원장 박래식(010-7169-9140) △ 상근부위원장 박상범(016-481-6552, 국당공파) △ 부위원장 문림랑공파 박진식(010-2290-1889, 대구시)/ 난계공파 박진하(010-4907-6936, 옥천읍) 이요당공파 박희삼(010-5402-15 3 8,대전) △ 편 집위 원 ○문림랑공파박영식(010-4204-6565,제주시)/박남근(010-2079-6972,광주광역시) /박영동(010-2838-8384,대구)/박태암(010-3121-0635,달성군)/박태인(010-9310-4842, 진 주 시 ) ○난계공파박원하(적명 임용010-3203-3172,인천)/박팔만(010-4562-1488,여수) /박희태(010-5484-9849,옥천읍)/박종철(010-5546-3333,구미)/박희문(010-2877-0757,대구) ○국당공파박희원(010-4122-0127,영동읍)/박근용(010-5568-1564,영동읍)/박세열(016-468-3735,황간면) /박재용(010-4841-0412,영동읍)/박희조(010-7756-8199,거창읍)/박종운(011-526-5648,대구) ○이요당공파박희복(010-3412-6903,심천면)/박의부(010-2869-2173,대전) /박희선(010-2423-5644,김천)/박상용(010-4456-8055,대전)/박세종(010-8108-2304,대구) 密陽朴氏僕射公派大同譜編纂委員會 밀양박씨복야공파(僕射公派 ) 대동보 편찬 안내 밀양박씨 복야공파 대종친회에서 대동보를 발간하기로 결정하였기에 공고하오 니 단기간내에수단이정비되어우수하고귀중한족보가편찬되어가보(家寶)로보 존 될수있도록협조를부탁드립니다. 특히 족보상식에 밝은 어른들이 작고하면서 이번대동보가 마지막 족보가 될 우려 가있어종원여러분들의적극적인참여로누락되는종친이없도록하여주시기 바 랍니다. ◇발행기간:2015년 12월~2017년 6월30일까지 ◇발행기준:1990년(庚午譜),1979년(己未譜) ◇수단기간:2015년 12월부터 2016년12월31일까지 ◇수단접수처:충북영동군영동읍계산로2길4.종친회사무실(영동세무서앞) ◇입금은행:농협301-0181-4871-11 ◇예금주:복야공파대종회 문의043-743-3015 FAX043-744-3015 사무국장박원용010-5487-2228 ◇인쇄처대전회상사 울산 여천문중은 휘 문령의 동생으로 휘는 손(孫) 으로 울산 여천으로 이거 후 임란이 발생 왜적이 부산 포에 상륙한지 불과 수 일만에 울산읍성(蔚山邑城)과 울산병영성(蔚山兵營城), 경주성(慶州城)이 함락되 고 민생이 무참히 짓밟히는데 분기하여 아들 문(文) 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많은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1592년 4월부터 1595년 2월18일 순직까지 청죽공이 4년 동안 수많은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는 동안 아들 문(文) 또한 아버지의 뒤를 따라 함께 분전하며 아버지와 함께 순절하니 청죽공에게는 선조 38년(160 5) 선무원종 3등공신(宣武原從 三等功臣)에 녹훈되 고 이후에 형조참판(刑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아들 문(文)은 창의의사(倡義義士)에 녹훈되고 통정 대부(通政大夫)에추증되었다. 여천문중이 1,200여세대로 번성하였던 것은 청죽공 의 아들 문이 세 아들(宗立, 宗益, 山立)을 두면서 크 게번성하게하였다. 장자 종립(宗立)은 호가 만암(晩菴)으로 인조 기축 년 4월 출생하여 선조의 공훈과 학행으로 공조참의에 증직되었고, 차남 종익(宗益)은 호(號)는 만당(晩堂) 으로 선조때 수자(壽資)로 통정대부, 삼남 산립(山 立)은 호(號)가 운헌(雲軒)으로 역시 선조 때 학행으 로사림으로부터추앙을받았다. 함안문중은 휘 문령(文齡)의 차남으로 정묘호란에 창의를 준비하다 굴욕적인 화의 소식을 듣고 함안 군 북의깊은산속으로은거했다. 이렇듯 세 문중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헤어지게 되었으나 집안마다 국가를 위해 충절을 다 바쳤음을알수있다. △소감공파(少監公派)는 소감공의 아들 행(行)은 감무(監務), 증손 동운(東雲)은 판도판서, 현손 수경 (守敬)이 문림랑을 지내는 등 대대로 벼슬이 이어졌 으며 그의 후손들이 밀양 단장, 전남 함평 흥룡, 전남 신안 도초, 경북 영천 릉계에 거주한 것으로 전해지나 찾아보지못해아쉽다. 도평의사공 후손 중 종중을 찾지 못한 문중의 집성 촌은 위에서 기술한바와 같고, 돈재공 후손들은 대대 로 서울(한양)에서 벼슬을 이어온 관계로 조선 초 한 양에서 살다 전남 장성으로의 입향은 돈재공의 아버 지 사정공(휘 덕명)께서 전남 장성군에 최초 입향한 선조이다. 이후 전남 장성을 중심으로 담양, 전북 고창, 전북 남원, 등지에 큰 집성손을 이루고 있으며, 산재해 있 다. 그리고 정혜공의 손자 학산공 언복이 울산 울주군 으로이주해그곳에큰집성촌을이루고있다. 돈암공의 후손들은 경남 사천, 함안, 울산으로 각기 이거해 각기 집성촌을 이루고 있어 이들 돈재공과 돈 암공의 후손들은 비록 호남과 영남지역으로 나누어 거주하고 있으나 전남 장성군의 수산사를 중심으로 돈목하며도평의사공파의문중을대표하고있다. 註사마광(司馬光): 중국역사를다룬 븮자치통감븯을편찬했다. 그는 고결한 도덕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학문에 조예가 깊었을 뿐만 아니라뛰어난 정치가이기도했다. 뱚▶6면에서계속 청죽재-울산광역시남구야음동산324-1 울산입양조 청죽공을 비롯한 후손들의 제향과 종원들의 종의 (宗儀)을모으는재실이다. 뱚집성촌및유적 국 악 인 청 계 박 태 주 선 생 공 적 비 제막식이 지난 20 일 오전11시(화) 충무공원내 국악원 현 지 에 서 김 생 기 정읍시장, 강광 추 진위원장, 오오근 (예총지회장), 김 영수(문화원장)을 비롯 기관단체장. 문 화 예 술 관 계 자 지인 등 1백20여명 이 참석한 가운데 있었다. 이날 식전행사에 는 온세미로(단장.박현송), 정촌예술단(단장.염 연희) 설장구명인 배란경. 트로트가수 박미자 의 축하공연이있었다. 이어 기념식에서 강광(前븡시장)추진위원장은 평생을국악인을위해헌신하며살아오신청계선 생의 공을 기리는 공덕비 제막식을 갖게되어 감 회가 세롭다고 기념사를 했고 김생기 시장은 축 사에서 국악계 거목 청계 박태주 선생의 공적비 제막은 국악을 사랑하는 모든 분들의 뜻을 모아 결실을 맺게 되었다며 예술의 고장 정읍은 문화 와 예술이 살아 숨 쉬는 예향으로 영원히 빛나는 국악발전의 계기가 될 것이라고 믿고 그 뜻과 공 적을기리자고축사를했다. 한편 박창규 정읍시 종친회장, 박근후 전 회장, 박성순 여성회장,종친회 부회장 임원,회원등 여 러분들이 참석하여 축하와 함께 성황을 이루었 다. △청계박태주선생은 (사)한국 국악협회 정읍지부장/ 정읍 국악원 원장/ 무형문화제 7-2호 정읍우도농악 보존회장 / 대사습놀이 보존회 이사/ 정읍시민의 장(문화 장)수상/(사)한국 전통예술 진흥회 정읍지부장 / 전국 국악경연대회 유치(현재 26회)/ 전국 농 악경연대회유치(현재17회) /박기섭정읍시청년회고문(광주일부전북취재본부장) 청계박태주선생공적비제막 평 생 을 국 악 인 을 위 해 헌 신 지난해 정읍시종친회총회시전 행사에서 판소리를 하는 박태주 선생 푸른 벼, 청도(靑稻). 박승(80) 전 한국은행 총재의 호다. 스스로 지었다. 두 글자엔 그의 80 년 인생이 함축돼 있다. 어린 시절의 가난과 주 경야독의 고단함이, 그 기억들이 거기에 있다. 경제학을 공부해 강단에 서고 나랏일을 하게 되 는 인생 항로의 출발점도 거기다. 어린 시절부 터그는농사를지었다.‘청도’는아련한그시절 의 기억으로 그의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 다. 푹푹 찌는 무더위에 논바닥의 흙냄새와 농 부들의 땀 냄새, 거기에 더해진 푸른 벼 냄새는 그에게 고향의 원형 같은 것이다. 세월을 따라 고향의 외형이 바뀌어도 그 원형은 마음속에서 영원한 것이다. 그는 “지금도 그 냄새를 기억한 다”고 했다. 자택 서재에서 그의 인생을 논하는 자리. 시작은 그래서 청도 향기 가득한 그 시절 의추억이었다. -농사를언제까지지으셨나. “대학도 농사지으며 다녔지. 등록만 하고 고 향김제로내려와농사를짓다가시험때만올라 가 동기들에게 노트를 빌려 시험을 봤다. 그런 식으로 2년을 보냈는데 도저히 안 되겠더라. 일 단군대를갔고복학하면서논을절반정도팔아 서울 마포에서 자취를 시작했지. 복학하면서 제 대로강의를듣고성적도좋아지기시작했다.” 소작농의 아들인 그에게 농사는 가족을 부양 하는 생업이면서 가난의 굴레였다.농사철엔 학 교에 가지 못했고 수업료를 내지 못해 시험도 못 치르고 귀가하기도 했다. 대학도 원래 해군 사관학교에 지원해 합격했다. “돈을 들이지 않 고 갈 수 있 는 곳이었기 때문”이다.그러나 경제 학자의 꿈을 버릴 수 없었고, 또 가족 부양문제 가 걸려 재수를 택했다. 낮에 농사짓고 밤에 등 잔불 아래서 공부하며 1년을 보내고 들어간 곳 이서울대경제학과였다. -주경야독하며 서울대 가기가 쉽지 않았을 텐 데. “틀림없는 주경야독이었지. 그해 쌀 다섯가 마를 저축했는데 서울대 등록금이 그 정도였다. 그런데 정작 시험을 잘 보지 못했다. 틀림없이 떨어졌다고생각했는데희한하게합격했다.” 그가 경제학을 선택한 동기도 가난이었다. 수 업료를 내지 못해 시험도 보지 못하던 시절 소 년 박승의 머릿속엔 거대 담론이 똬리를 틀었 다. ‘가난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그는 “빈곤 을 해결하는 문제가 나의 최대 관심사였다”고 말했다. -경제학을 공부해 교수, 청와대 경제수석, 건 설부장관,중앙은행총재까지지내셨다.가난이 준선물인셈인가. “학 창 시 절 내 가 장 관 하 고 한 은 총 재 하 리 라 고 생각도 못했다. 내가 기대한 것보다 훨씬 잘 된 건데,왜 그런가 생각해본 적이 있다.나는 개 인보다 사회를 먼저 생각하는 사고가 어려서부 터 확고했다. 소외된 사람, 약자에 대한 배려심 도 많았다. 내가 어렵게 자라서 그랬겠지만 그 게큰자산이었던것같다.” 이런 품성을 엿볼 수 있는 일화. 한은 행원시 절 대학 동기들과 용유도 을왕리 해수욕장에 놀 러갔다가태풍을만났다. 지금은 인천대교로 연결돼 있지만 당시는 인 천에서 배로 두 시간 거리. 돌아갈 배는 한 대밖 에 오지 않았다. 서로 올라타려고 난리가 났다. 밧줄을 잡고 기어오르는 위험한 상황. 청년 박 승은 승선을 포기하고 ‘교통정리’에 나섰다. 이 미 배에 올라탄 친구들은 그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봐야했다. -교수와관료,어느쪽이‘천직’인가. “교수다. 내 지식을 젊은 제 자들에게 전달 하는 것, 그것이 아주 좋았다. 열 강을 했지. 제자 들도 빨려들어 오고, 제자들과 하나가 되는 그 런 시간이었다. 지금은 보편화 했지만 그때만 해도 교수가 제 자들에게 평가 받는 일은 없었 다. 그런데 난 모든 과목에 대 해 제자들에게 평가를받았다.” 그는 자서전 ‘하 늘을 보고 별을 보고’에서 “강단에 서면 굿판의 무당처럼 신이 났다”고 회고했다. 그런 그를 학생들은 후하게 평가했다. “학생들에게 A학점을 받은 셈”이다. 강단에서 보낸 시간이 가장 길기도 하다. 중앙 대 교수로 지낸 시간이 26년. 이에 비해 한은에 서 19년을 보냈고 정부에 몸담은 건 2년에 불과 하다. 교수는 그에게 평생의 꿈이었지만 사회생활 의 시작은 한은이었다. 한은은 그에게 삶의 새 지평을 열어줬다.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고 방 황과 불안에서 안정과 도약의 길로 인도하는 계 기가 되었다”고 그는 회고했다. 교수가 되는 과 정은우연적이다. “1968년인가 필화사건이 터졌다. 당시 국제 수지가 막대한 적자였는데 환율 때문이었다.원 화가 너무 고평가되어 있었던 거다. 총재가 재 무부 장관을 초청해서 브리핑을 하자면서 나더 러 준비하라는 거다. 급히 원고를 쓰고 서봉균 당시 재무장관 앞에서 브리핑은 잘 끝냈다. 그 런데 이 내용이 다음날 동아일보 톱기사로 나와 버렸다. 우리는 건의한 것뿐인데 당장 환율을 인상하는 것처럼 썼더라.아니나 다를까 중앙정 보부에서 들이닥쳐 부총재보까지 줄줄이 잡아 갔다. 남산분실로 끌려갔는데 들어가자마자 주 먹질부터 하더라. 여기저기서 신음소리 나고. 그 사람들 참. 누가 자료를 동아일보에 줬냐는 거다.” 그는 일주일 조사를 받은 끝에 ‘하지 않은 일’ 에 대해 “내가 그랬다”고 시인하고 말았다. 누 군가는 유출 책임을 져야 다들 풀려날 것이기 에. 그 일로 한은을 그만둬야 할 처지가 되었는 데이후유출경위가밝혀졌다. 기자가 대학 친구인 행원을 만나러 한은 사무 실을 찾았는데 거기에서 자료가 유출된 거였다. 죄 없 이 모 든 걸 뒤 집 어 쓴 꼴 이 된 건 데 , 한 은 집 행부는 한은 최초의 해외 학술연수 프로그램에 그를 선발하는 것으로 마음의 빚을 갚았다. 뉴 욕주립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고 강단에 서 게 되는 인생의 전환점은 그렇게 우연히 찾아왔 다. -정부에계실때도큰일들을하시지않았나. “청와대 경제수석이 됐는데 어떻게 발탁된 것인지는 모른다.당시 노태우 대통령과는 일면 식도 없었다. 내게 맡긴 최대 임무가 노 대통령 공약, 주택 200만호 건설이었다. 그런데 서울에 땅이 있나. 광화문 측량원표 기준으로 25㎞ 지 점에 신도시를 건설하는 발상이 그래서 나왔다. 분당, 일산, 산본, 평촌, 인천 중동 다섯개다. 이 계획을 경제수석 때 세웠는데 계획을 세웠으니 집행하라며건설부장관으로임명하더라.” -한편으로토지공개념을도입했는데. “부동산값 상승이 국민생활 빈곤화의 근본원 인이라는 생각에 이 제도의 도입을 대통령에게 누차 말씀드렸다.노 대통령이 보수적 군인이지 만 민생에 필요하다는 개혁엔 적극적이었다.토 지공개념이 토지소유자에게 불이익을 준다는 것을 알지만 주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하 다고 판단한 것이다.”보수정권에서 역대 가장 진보적 정책을 추진한 것인데, 그런 그의 눈에 “빚내서 집 사라”는 현 정부 정책은 어떻게 비 칠 것인가. 그는 “가계부채를 늘리고 집값을 올 리는 정책은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지는 나쁜 정 책”이라고 말했다.“앞으로 남는 건 일시적으로 경기가 좋아진다는 것이고 뒤로 밑지는 건 집값 상승으로 서민가계의 부담을 키우고 후손들이 집을 갖지 못하게 하며 국민 생활수준을 떨어뜨 리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부동산 중심사회에 서 벗어나야 선진국이 될 수 있다”는 건 그의 지 론이기도하다. -부동산중심사회는뭐가문제인가. “사람들이 불필요하게 넓은 땅과 큰 집을 차 지하려 하기 때문에 땅과 집이 부족하게 되고 땅값, 집값이 오르게 된다. 이는 생산소득이 아 니고 후세들의 부담으로 이뤄지는 비생산적 소 득인 만큼 오를수록 삶의 질은 나빠진다.”2001 년 2월 말 그는 중앙대에서 정년 퇴임했다.3월1 0일 전윤철 청와대 비서실장에게서 전화가 왔 다. “한은 총재에 내정됐다. 19일 국무회의에서 의결하는 대로 발표할 거다.” 그는 자서전에서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한은은 내 인생의 고 향이다. 66세에 이런 곳에서 마지막 봉사를 할 수 있 게 된 것 은 더 할 수 없 는 영 광 ”이 라 고 회 고했다. - 한 은 총 재 시 절 독 립성 을 강 화 한 것 으 로 평 가 받는데. “중앙은행은 발권력을 갖고 있다. 늘 바뀔 수 있는 정부에 이를 맡겨 놓으면 정치적 목적으로 남용하거나 당장의 편익 때문에 물가안정을 소 홀히 할 우려가 있다. 그래서 독립성이 필요한 데 1950년 창립 이래 독립성은 없었다. 재무부 남대문 출장소라고 하지 않았나.그래서 독립성 을 강화하는 한은법 개정을 밀어붙였다.인건비 를 제외한 한은 예산에 대한 재경부 장관의 승 인권도 그때 폐지됐다.”그는 온화한 성품이지 만 독립성을 지키는 데는 대쪽 같았다. 총재 시 절 정부에서 금융통화위원들에게 금리인상 반 대를 주문했다는 소리에 당시 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고함치며 항의한 일화는 유명하다. “고함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비서진들이 놀라 뛰어들 어왔다”고한다. 끝으로경제전망을물었다.“갈수록어려워질 것이다.지금 위기는 과거 위기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과거엔 고비만 넘기면 성장력이 복원되 는 위기였다. 잠재성장률은 높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고비를 넘긴다고 해도 구조적 개혁이 있 지 않는 한 복원되지 않는다. 잠재성장력 자체 가 망가졌기 때문이다. 이걸 높여야 하는데 지 금과같은단기부양책으로는안된다.” / 세계일보류순열선임기자ryoosy@segye.com △19 3 6년 전북 김제 출 생 △19 54년 이 리공고 졸 업 △ 1961년서울대 상대졸업, 한국은행 조사역△1974년뉴 욕대 경제학 박사 △1984년 중앙대 정경대학장 △1988 년 청와대 경제수석 △1988∼1989년건설부 장관 △20 02∼2006년한국은행총재 뷺강단서신나게열강,제자와하나되는시간븣관료 보단교수가천직뷻 뱚나의 삶 나의 길 경제석학박승前한국은행총재뱚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가 서울 평 창동 자택 서재에서 가진 세계일보 와의 인터뷰에서 농사지으며 대학 을 다녀야 했던 힘든 시절을 회고 하고 있다. 고교(이리공고) 시절엔 왕복 14㎞를 걷고 40분 기차를 타 며 통학하느라 매일 해뜨기 전 집 을나서야했다고한다. /세계일보남정탁기자 ◆박승은…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