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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9월30일 금요일 6 (제117호) 관향조 종친회 도평의사공의 휘(諱)는 언상(彦祥)으로 시조 왕의 37세이자 밀성대군의 8세 支孫으로 태사공 (휘 언부)의 동생이다. 고려 때 벼슬이 도평의사 (都評議事)에 이르고 밀직군(密直君)에 봉해져 도평의공파의파조가된다. 註 도평의사(都評議事) - 국방 최고회의 기구 이며 합의 기관으로 문종 때 정착된 도병마사(都 兵馬使)가 충열왕 5년에 도평의사사(都評議使 司)로 고쳐졌으며, 나중엔 국방뿐만 아니라 일반 정와서무(庶務)도관장하였다. 도평의사공파는 아쉽게도 종회가 구성되어 있 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산업의 발달로 후손들 또한 각기 흩어져 있어 찾아보기 힘들어 우선 돈재공파 와돈암공파를위주로알아본다. 도평의사공(휘 언상)의 아들 양신(良臣)은 소 감(少監),손자 직(直)은 감무(監務)로 아들 삼형 제(인경, 의경, 신경)을 두면서 각기 파계(派系) 를형성한다. 장남 인경(仁卿)은 손자 설(設)이 찬성사(贊成 事)를 지내고 시호가 문정(文靖)으로 문정공파의 파조가 된다. 차남 의경(義卿)은 문림랑(文林郞) 을 지내 관직을 따 문림랑공파, 삼남 신경(信卿) 은소감(少監)을지내소감공파라한다. △문정공(휘설)은아들창밀(昌密)과흥밀(興 密)을 두었는데 장남 창밀은 현감(縣監)이고, 차 남 흥밀은 전리판서를 지냈다. 이중 장남 창밀의 아들 거인(居仁)의 장남 문봉(問奉)의 후손들은 밀양 상남, 전주 등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 지나찾을수가없었다. 차남 승봉(承奉)은 고려가 망(亡)하자 의분(義 憤) 한탄(恨歎)하며 형 문봉(問奉)과 함께 벼슬 을 버리고 경서(經書)로 마음을 달래며 성현(聖 賢)의 학문을 닦았다.그리고 역성(易姓)혁명(革 命)을 부끄럽게 생각하라 하자 모두들 의사(義 士)라칭(稱)하여고려의사공으로불린다. 문정공의 차남 흥밀(興密)의 후손들은 경남 남 해,전북정읍,고창등지에산재해있으나이역시 찾지못했다. 고려의사공 휘 승봉의 아들 덕명(德明)이 태종 (太宗) 2년 임오(1402) 무을과(武乙科)에 합격 (合格)하여 처음 벼슬이 승의부위 호익순위사 우 령부사정으로 병사훈련과 영병생활의 군율확립 에 재능과 능력이 썩 훌륭하여 삼품상(三品上)에 이르니 절충장군(折衝將軍) 훈련원(訓鍊院) 도 정(都正)을 역임하였으며, 손자 연생(衍生)의 호 는 돈재(遯齋)로 훗날 돈재공파 파조가 된다. 돈 재공은 늠름한 자세와 높은 지조가 우러러 볼만 하여 단종 때 충무시위사 대호군(大護軍)으로,수 양대군(首陽大君)이 영의정(領議政)에 오르고 위엄이 날로 높아지자 신숙주(申叔舟), 한명회 (韓明澮),권람과 정인지등 수양의 처소를 드나들 며왕위에오르기를논의하였다. 이때 공은 수양과 절친한 사이이나 수양의 부름 을 거절,남하 할 것을 결심하고 천첩에게 이 편지 를 보여주라 하고, 고향 태인에서 아버님을 모시 고 장성 아치실로 옮긴 뒤,다시 독신으로 담양 월 산사위이석손집에은거하였다. 수양이 1455년 왕위에 오르고 12월 27일 전지 (傳旨)하기를 뷺대호군 박연생은 원종공신(原從 功臣) 삼등(三等)에 녹(錄)한다뷻라며 교서(敎 書)를 내리고 불렀으나 병든 몸이라 칭하고 나가 지 않으셨다.【 세조실록 2권,세조 1년 12월 27일 무 진 3번째기사 ‘의정부에 전지하여 연창위 안맹담 등을원종공신에녹훈하다.’ 】 돈재공의 아들 문아(文雅)는 조선 성종 때 어모 장군(禦侮將軍) 호분위(虎賁衛) 대호군(大護軍) 을 지내고 증 통정대부(贈 通政大夫) 승지(承旨) 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이고, 손자 현손(賢 孫)은 선략장군(宣略將軍)으로 가선대부(贈 嘉 善大夫), 병조참판(兵曹參判)겸 동지의금부사 (同知 義禁府事)에 증직되고 아들 5형제를 둠으 로서 가문을 크게 번성시켜 관직을 따 참판공(參 判)公)이라한다. 참판공의 장남 종원(宗元)의 자(字)는 자간(子 幹)으로 하서 김인후 선생의 외종조가 된다. 전남 장성의 수산사에 배향된 교리 김개 선생과 학문으 로 사귀고 아들을 그 문하로 보내 공부하게 하여 나름대로 학덕(學德)을 쌓게 하여 그 후부터 집안 이 더욱 알려져 장성지역 명족(名族)으로 초석을 다졌으며,아들 넷을 두었는데 장남 수온(守溫)은 하남처사공,차남 수량은 우리나라 감사원이 뽑은 3대 청백리 중 한분으로 시호는 정혜(貞惠)이다. 삼남수공은목우당,사남수검은사계당공이다. 이들 사형제중 장남 하남처사공(河南處事公) 수온(守溫)의 자(字)는 군직(君直), 호(號)는 하 남처사(河南處士)이다. 선천적으로 품행이 단정(端正)하고 아담하며 총명한 지혜가 뛰어나 일찍 학문에 나아가 경전에 통달하여 선교랑(宣敎郞) 경기전(慶基殿) 령 (令)에 제수(除授)되었다. 그러나 공(公)은 이름이 널리 세상에 드러남을 바 라 지 아 니 하 고 임 천 (林 泉 ) 에 묻 혀 몸 을 닦 으 며 학문에 전념하고 감지봉양(甘旨奉養)하며 형제 우애로써 분수 지키는 것을 천명으로 여기니 송북 (宋北)의 사마광(司馬光)에다름이없다하였다. 동생 수량(守良)이 재기가 비범하여 장차 세상 을 다스리는 큰 그릇이 될 것임을 굳게 믿고,수학 (修學)의 길을 돕고 서자(書資)를 제공, 형설(螢 雪)의 공을 세우니 동생 수량은 의정부(議政府) 좌참찬(左參贊)에 이르고, 청백리(淸白璃)에 피 선되고,시(諡)정혜(貞惠)이니 모두 처사공의 성 력이 아름다울 뿐이다. 처사공의 손자 백우당 상 의,눌헌공상지가크게현달했다. 백우당 상의(尙義, 1538~1621)는 천문지리에 능통하여 세칭 소강절 선생이 다시 태어났다 하였 다. 사재감과 전옥서 주부를 역임하고, 임진왜란 때 명나라 양호 장군이 군사(軍師)로 예우하였고, 1600년(선조33년) 의인왕후 박씨의 타계로 목릉 (穆陵) 장지결정에 참여하여 국장도감 관계자를 포상할 때 관직을 제수 받아 충좌위 사정이 되었 으며, 특히 1578년 율곡 이이, 중봉 조헌, 토정 이 지함, 구봉 송익필 등과 하늘의 장성(長星)을 보 고 돌아올 국운을 논의하면서 15년 뒤에 「靑衣賊 入自國城東門(청의적입자국성동문)」‘왜적이 장 차서울동문으로쳐들어오리라’하고예언을함으 로서 선생의 예언을 들은 율곡 이이는 이 말을 귀 담아 듣고 임진강변에 화석정을 짓고 들기름을 먹 여 두 어 후 일 선 조 의 피 난 길 에 칠 흑 같 은 밤 에 강 을 건너기 위해 이 정자에 불을 붙여 무사히 강을 건넜다는일화를남겼다. 눌헌공 상지(尙智)는 승사랑 군자감봉사와 예 빈시제검을 역임하였으며, 하서 김인후 선생, 우 계 성혼 선생과 교유하고 두 분 선생 문하에서 여 러 선생들과 도덕과 의리로 교우하고 학문을 전심 하여 닦았다. 효심과 우애가 심이 지극하였고 세 상을 위하여 유명한 유학자들이 기술해 놓은 경훈 (警訓)들을 편찬하고 외신록(外身錄)을 저술했 다. 정혜공 수량은 하남처사공의 동생으로 조선시 대 황희,맹사성과 함께 3대 청백리로 꼽힌다.자는 君遂(군수) 호는 莪谷(아곡) 38년간 벼슬길에 집 한 칸이 없는 가난한 청백리로 시호는 貞惠公(정 혜공)이다. 1491년 전남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에서 출생 교 리김개선생의제자이다. 1513년에 사마시에 급제하고, 1514년 별시문과 때 을과(乙科) 차석으로 합격 성균관 분교(分校) 인 광주 주학(光州 州學)에 들어갔다. 그 때 김세 필[金世弼, 1473(성종 4)∼1533(중종 28).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이 광주목사에 부임함으로서 일찍이 서로가 뜻이 맞아 학문하는 스승과 제자사 이가 되었다.다음해인 1514년 승문원 부정자에서 박사(博士)가 되어 정언(正言)에 전보되었고, 외 직으로 호서도사를 하고 그 후 지평으로 옮기고 다시 고부군수를 하다 헌눌장령(獻訥掌令)으로 승진하여 사간, 사도, 사성, 보성군수를 역임하다 사예(司禮)로서 조정에 돌아와 통정대부 좌승지 로 승진하고 가선대부로 증직되어 호조판서를 역 임하였다.외직으로 함경도 관찰사로 갔다가 다시 자리를 옮겨 한성부좌윤,동지중추부사, 공·호·예 조 참판을 역임하다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담양부 사를자원하였다. 1546년(명종원년) 상호군(上護軍)으로서 청백 리에 오르고 자헌대부 한성부판윤,전라도관찰사, 호·형·예·공조판서를역임하고다시의정부좌참 찬을 거쳤으나 써까래 몇 개의 집도 없었다. 명종 임금께서 “참 아름다운 일이라”하시고 특명으로 아름다운 집을 하사하시고 그 집을 청백당이라 하 였다. 븮중종실록븯·븮인종실록븯의 편찬에 참여하고 1 554년1월19일향년64세의나이로별세하였다. 부음을 들은 명종은 선생의 죽음을 애석히 여겨 이틀간이나 조회를 멈추기까지 하였고, 예관(禮 官)을 보내 영전에 조사(弔辭)를 올리도록 하였 다. 임금은 조사에서 안으로는 많은 학덕을 지녔 으면서도 밖으로는 항상 부족한 것처럼 했으며 가 정에는 한줌의 곡식도 없었으니 경의 죽음이 더욱 아깝고애석하다고하였다. 그리고 임금은 유사(有司)에게 명을 내려 장례 (葬禮)를 후(厚)하게 구원(救援)하도록 하고 서 해바다 돌을 골라 비(碑)를 하사하셨는데 비문을 세기다가 청백리인 선생에게 자칫 누를 끼칠까봐 비 문 이 없 는 돌 을 묘 앞 에 세 우 게 해 , 白 碑 ( 백 비 , 전라남도 기념물제198호)는 선생의 청백리 정신 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 전국의 고위공직자와 국 영기업체 직원 등 국내외 공직자들이 청백리 정신 을본받기위해줄을잇고있다. 그리고 명종임금이 고위직에 있으면서도 거처 할 만 한 집 한 칸 없 는 선 생 의 청 백 함 을 높 이 칭 찬 하여 황룡면 아곡리에 99칸의 집을 지어 주었는데 불행하게도 그 건물은 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되 어 빈터만 남게 되었으나 지난 2009년 장성군에서 복원 지금은 많은 관광객이 찾으면서 새롭게 각광 받고있다. 정혜공의 손자 언복(彦福)과 그의 아들 인립 (仁立)은 임진왜란에 많은 전공을 세우고 부자가 함께 순절하여 울산광역시 울주군 학산사에 배향 되어그유지를기리고있다. △문림랑공(휘 의경, 도평의사공의 증손)의 아 들 간(侃)은 소감(少監), 손자 치(穉)는 찬성(贊 成),증손 동생(東生)은 진사(進士)로 아들 둘(지 번,지만)을 두었다.이중 장남 지번(枝蕃)의 후손 들은 증손 자온(自溫)에 이르러 그의 호 돈암을 따 돈암공파로 파계를 이루며 종회를 구성하고 있 으나 차남 지만(枝萬)의 후손들은 창녕 이방, 성 주 개포, 전남 화순 북면에 거주한 것으로 전해지 나 이 역 시 찾 지 못 했 다 . 돈암공의 휘는 자온(自溫) 號는 돈암(遯庵)으 로 단종조에 성균 생원으로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 의 왕위를 찬탈하자 족형 돈재공과 함께 한양을 떠나 태인을 거쳐 의령 자굴산으로 은거하여 경사 (經史)를 즐기며 일생을 마치니 생육신과 같고 백 이숙제의 뜻을 따른 것이라 하겠다. 전남 장성의 수산사에배향되었다. 돈암공파는 단종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으로 의 령의 자굴산으로 은거하면서 종문의 시련은 시작 된 듯하다. 크게 세 문중으로 나누어지나 크게 번 성하지는 못했다. 돈암공의 손자 연(淵)이 아들 둘(문령, 손)을 두면서 장남 문령(文齡)의 장남 민탁(民擢)의 후손들은 고성 사천문중,차남 정검 (廷儉)은 함안문중,울산 여천문중은 돈암공의 손 자연(淵)의차남손(孫)의후손들이다. 고성·사천문중은 돈암공의 손자 휘 연이 학문 의 스승을 찾아 의령 자굴산에서 사천으로 이거하 여 그의 장남 휘 문령은 문과 급제 후 정언으로 행 승문원교리로임란에창의하였다. 12중조略史 도평의사공파(都評義事 公派) 도평의사공파(都評義事公派)연원(淵源) 도평의사공파(都評義事公派)세계(世系) 수산사 - 전남 장성군 황룡면 신촌리의 수산사에는 단종절 신돈재박연생,돈암 박자온,청백리이자문인아곡박수량, 교리김개,백우당박상의, 눌헌박상지선생등장성의문인 충신등이 배향되어있어해마다향사에광주전남지역유림 들로 북적인다. 이는 배향된 선현들이 얼마만큼 비중이 있 는인물임을방증한것이기도하다. 수산사전경. 울산광역시울주군상북면길천리1152 학산공 박언복 선생과 그의 아들 청수헌공 박인립 선생 의양세(兩世)충효를기리기위해건립한 곳이다. 원래 1840년 향내(鄕內) 유림들과 본손들이 두분의 충효를 기리기위해반곡사(盤谷祠)를창건하여향화(香火)를피워 제사를받들게되었으나1868년서원훼철령에의해반곡사 역시 훼철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1986년 지방 유림들과 후 손들이 중심이 되어정성을모아건립하였다. 삼문(尙賢門) 과 강당인 숭의당(崇義堂), 충효사(忠孝祠)가 있으며 삼문 밖에는학산공과 청수헌공양대충효비와추모비가있다. 호산재(狐山齋)-전남장성군황룡면금호리10(백비길33-1 8) 밀성대군의 8세 도평의사공(휘 언상)의 후예 돈재공파의 대소종사를 논의하고 돈재공(휘 衍生)의 조부 고려의사(高 麗義士) 휘 승봉(承奉)을 비롯한 후예의 시향을 봉행하는 재사(齋舍)이다. 뱚▶7면에 계속 시군지부활성화를위해강좌개설하여많은일가분이찾아온다면크게활성화될것입니다. 한빛신문은 성손 여러분의 소중한 구독료로 만들어지는 종중신문입니다. 구독료를 납부하지 않은 일가분은 지로 또는계좌이체로납부하여주십시오. 종중의미래정확한보학지식전달이좌우합니다. 한빛신문이책임지겠습니다. 최근각가정에서아이에게족보를가르치려해도가르칠어른이없다 고합니다.그리고잘못전달된보학지식은더큰문제로발생됩니다. 수십년수집한자료종친회회의및수련회보학강좌에도움을드리겠 습니다. 뱚각급종친회이제 밥만먹고헤어지는회의안됩니다 뱚강의지원및구독문의=053-588-7300(한빛신문) 뱚구독료입금계좌:농협453013-55-000691(예금주한빛신문) 밀성박씨는신라 말경명왕의 적장자인 휘언침(시조30세)이밀양의성 주인 밀성대군으로 봉작 되었기에 그 자손의 본관을 밀성 또는 밀양으 로 하 였 다 . 이후후손들은번성하여파계를형성하고,밀성(밀양)박씨대종회는12 중조를 중심으로 운영되고있다.12중조의 명칭은 언제부터 등장한 것 일까? 1742년(영조18) 임술년에 발행(印刊)된 밀성박씨연계대보(통칭 임술년보)에수록된‘密城朴氏大君之后12中祖世系分派之圖’가처음 등장한다.곧 12중조를 연계해서 세대를 표기한 창시보의 하나이기도 하다. 12中祖를 보면 밀성대군으로 부터 8세에 이르러 태사공(太師公, 휘 彦孚), 도평의사공(都平議事公, 휘 彦祥), 복야공(僕射公, 휘 彦仁), 밀직부사공(密直副使公, 휘 良彦), 판도판각공(判圖判閣公, 휘 天翊), 삼사좌윤공(三司左尹公, 휘 乙材), 10世 사문진사공(四門進士公, 휘 元), 13世이 충헌공(忠憲公, 휘 陟), 영동정공(令同正公, 휘 元光), 15世 밀직부원군(密直府院君, 휘 中美), 정국군(靖國君, 휘 쭈), 16세 규정공 (糾正公,휘鉉)등이다.이번호에는도평의사공파를연재해보고자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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