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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9월30일 금요일 4 (제117호) 관향조 종친회 1997년 신라 신덕왕릉 제10대 참봉으로 도임하여 2년의 봉직 기간에 그 소임을 다하고 퇴임 후에도 지난해 병석에 눕기 전 까지 한 번도 삭망봉심을 거르 지 않 는 등 1 6 년 여 를 하 루 같 이 숭덕전의 위상을 회복하려 노력 했던 순욱 참봉이 지난 8월 25 일 숙환으로 영면하여 주위를 안타깝게하고있다. 고인(故人)은 1935년 4월 13일 충북 괴산군 청천면 귀 만리에서 시조왕 67세손으로 태어났으며, 본관은 죽산 이다. 26세에 청주시내로 거처를 옮긴 고인은 선친(先 親)이 종사에 열중하시는 본을 받아 고향에서 거주 할 때 죽 산 박 씨 대 동 보 (경 자보)를 수보(修譜) 시 (時) 청주파 족보를 손수 붓으로 써서 수단을 제출 하여 많은 사람들을 감탄 하게하였다. 특히산재해있는묘소로 인해 음력 10월 초하루부 터 보 름 까 지 매 일 시 향 을 받들어야 하는 수고로움을 개 선 하 기 위 해 묘 소 를 한 곳으로 이장하고 비문을 손수 써 세웠으며, 보름여 간의 시향 일정을 하루에 모실 수 있도록 하는 등 복 잡한 제례문화를 신세대들 의입장에맞추어개선하였다. 그리고 종중의 재정이 빈약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음 에 종중 가옥으로 시내 봉명동에 다세대 주택을 매입하 여 임대수익을 창출하여 재정난을 해소하는 등 종중의 크고 작은 모든 일을 도맡아 처리하는 등 큰 족적을 남겼 다. 박씨종친회 충북본부와 청주시지부가 쇠퇴하여 유명 무실하게 될 위기에 처해 있을 때는 사비를 출연하며 종 원들을 설득하여 반석위에 올려놓았으며, 석교동 자신 의 건 물 한 한 층 을 통 째 로 무 상 임대하여 청주시지부 사 무실로 사용케 하여 지역 종원들의 사랑방과 구심점이 되도록 하고 매년 개최되는 행사마다 출연을 아끼지 않 았다. 이밖에도 오릉보존회 이사, 숭덕전 운영자문위원 을역임하기도하였다. 고인은 청주시 석교동에서 한일당한약방을 운영하면 서 난치병 연구에도 매진하여 전국의 많은 환자를 치료 하며 빈곤층 환자에게는 약재와 치료비를 무상으로 하 는애민정신을보여그명성이자자했다. 지역사회의 각종 단체장을 맡아 많은 공을 세워 내무 부장관, 보건복지부장관, 도지사, 시장 상을 여러 차례 수상하였으며,국민훈장석류장을수상하기도하였다. 특히 지역 재래시장이 무질서 하였던 상도정립과 자 율적인 질서확립 계몽에 투자하며 온 정열을 쏟아 충청 일보 1991년 7월 15일자 신문에 대서특필되기도하였다. 이에 죽산박씨 문정공파 청추문중에서는 고인의 큰 공적을 기리기 위해 2006년 고향마을 앞에 공적비를 세 워찬양하고있다. 이렇듯 고인은 평소 애민과 봉사, 그리고 숭조정신으 로 가득 차 청소년은 몰론 지역주민 종친들에게 귀감이 되어 타계소식은 숭덕전을 비롯한 종중과 지역사회에 큰충격을주었다. 신덕왕릉제10대순욱참봉영면 퇴임후에도16년간한번도거르지않고삭망봉심,충북본부활성화에크게기여 죽산박씨 문정공파 청주문중에 서 세운 공적비. 하천에서 태어난 물고기가 바다로 나가 자란 뒤에 알 을 낳기 위하여 다시 자기가 태어난 하천으로 되돌아온 다. 이를 회귀본능(回歸本能)이라 합니다. 낙엽이 떨어 져 퇴비가 되고,그 퇴비를 먹고 나무는 무성하게 자라듯 우리의 조상은 후대의 사람들이 먼 조상까지 잘 수호 해 주길 바라면서 위토답을 남깁니다. 그리고 아이들의 훈 육을위해최선을다합니다. 이는 어찌 보면 후손으로 하여금 문호를 활짝 열고 그 열매 즉 결실을 맺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결실을맺 는 다 는 것 은 회 귀 본 능 의 단 면 을 보 여 주 는 것 이 기 도 할 것입니다. 많은 집안의 가훈에는 대부분 ‘효(孝)’자가 들어갑니 다. 서론이 너무 길었던 것 같습니다. 80을 바라보는 필 자가 이렇듯 긴 서론을 들어가며 글을 쓰는 것은 파행으 로 치닫고 있는 종중이 바로서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 에서다. 폭력이 난무하는 총회에 용역을 배치하고 급기야 경 찰병력이 투입되는 등 수년째 송사로 이어지는 동안 종 중의 위토답은 불법으로 매각되면서 종원들 간 이전투 구가 이어지는 우리 종중의 현실을 보면서 땅을 치고 통 곡하지않을수없습니다. 지금 우리 문중의 회장이라는 사람은 또 다른 사건으 로 구속되었고, 결국 종중사건과 함께 묶어져 재판을 받 게되었습니다.정말부끄러운일이아닐수없습니다. 우리 박씨 종중에서 수십억 원의 예산을 갖고 있으면 서 회장의 막강한 권력으로 종원들 위에 군림하는 문중 을 보고 우리문중은 아니겠지 했는데 설마 한 것이 우리 문중에서도재현될줄이야꿈에도몰랐습니다. 또한 종친회장에 취임한 모든 사람들이 취임 일성으 로 ‘봉사하는 자세로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정작 행동은 그에 따르지 못함을 얼마 되지 않아 금방 알 수있었습니다. 우리 종친회장 또한 그렇게 말했으나 종중의 위토답 을 불법으로 매각하고 수백억 사기에 연루되었다는 월 간지기사를보고놀라지않을수없었습니다. 우리 종중의 선조님은 나라를 위해 충절을 보였으며, 특히 정종대왕의 부마였던 선조님으로 인해 많은 사패 지를 받아 역대 회장님들이 몸을 바친 봉사로 기틀을 잡 아 명문으로서 경기지역 토호세족으로 거듭 발전해 왔 으나 지금은 많은 토지가 불법으로 매각되었고, 집행부 의 숭조사상은 찾아볼 수 없으니 이를 두고 누구에게 하 소연해야할지노구의필자는막막합니다. 이제 소원이라면 종중이 화합하여 옛 명성을 찾아 달 라는것입니다. ‘화(和)’를 종중의 근간으로 삼고 서로 도와가며 선조 님을 위한 위선 사업과 후손을 위한 육영사업을 펼친다 면더이상바랄것이없겠습니다. 그리고 인(仁)을 배경으로 서로를 위하면서 내가 적 극 도 와 줄 테 니 우 리 한 번 힘 을 합 쳐 어 려 운 종 중 살 림 을 일으켜보자며 서로를 격려 해 나간다면 우리 종중은 더 없는발전을이룰것이라확신합니다. 이제 80을 바라보는 노인으로서 간곡히 당부 드립니 다. 정말 사리사욕을 버리고 오직 종중을 다시 일으켜야 한다는 각오를 갖고 나서주실 것을 새삼 강조하며 당부 드립니다. 고언의당부 여주대학교재단이사 밀성박씨판서공后 박 광 찬 △ 작품설명 - 작품 ‘문중’ 은 한자의 ‘門’자를 형상화 하 여 崇 祖 와 睦 族 을 의 미 하 는 좌우의 음각한 두 개의 기둥 이 솟구쳐 올라 가문을 이루 는 ‘門’을 형상화 하였고, 가 운데오석판은문중을구성하 는 종원들의 결집된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中’을 형상화 하였다. △ 유 래 - 신라 54대 경명왕 (景明王)의 여덟 아들 중 두 번째로 분봉(分封)되신 박언창(朴彦昌)이 사벌대군(沙伐大 君)에 봉해지고, 사벌주(沙伐州)를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아 문호가 열리게 되어 언창을 관조(貫祖)로 모시게 되었다. 사벌 주가 고려 초에는 상산(商山)으로, 조선조에는 상주(尙州)로 개칭되면서본관을상주(상산)이라하게되었다. 신라 말 당시 사벌주는 후백제와의 각축장이 되어 경명왕이 아들 언창을 사벌 방어장으로 임명하자, 그는 군사를 강화하여 후백제 군사와 대항하였으나 신라의 국세가 급격히 쇠약해져 여러 지역이 함락되고 사벌주가 고립상태에 빠짐으로, 언창은 서기 918년(경명왕2년) 자립으로 사벌국을 세워 10여 년간 고 군분투 하던 중 서기 929년(경순왕3년) 낙동강을 도하하여 급 습해 온 후백제의 견원 군사를 맞아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항 전13년,재위11년만에패망하게되었다. 그후많은후손들이고려조와조선조에참지정사,좌의정,대 제학,판서 등의 높은 벼슬길에 올라 명문가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고, 상주시 소재 사벌국 왕릉(陵)은 지방문화재 제25호로 지정되어 있어 매년 능제(能祭)를 행하고 있으며, 오늘날에도 상암공파(商巖公派-中始祖 安義), 판서공파(判書公派-中始祖 安禮), 예판공파(禮判公派-中始祖 安智), 정숙공파(貞肅公派- 中始祖安信), 찬성공파(贊成公派-中始祖 侶), 판원사공파(判 院事公派-中始祖 文有) 6개 파의 2만 오천여 후손들이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고 사회 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어, 왕가(王家) 후손으로서명예와전통을이어오고있다. △ 작 품 설 명 - 작품의 둥근 외형은하늘로솟아오르는알 을 표현한 것이며 강인한 힘 과기상이넘치는형상이다. 투 각 한 원 은 나 정 (蘿 井 )을 , 그 가운데 붉은 구(球)는 월 성(月城)을 뜻한다. 좌측의 비상하는 말(馬)는 시조대왕 의탄생설화를우측의비천은 성모가신선으로하강한모습 을 나 타 내 고 있 다 . △ 유 래 - 월성박씨는 신라 를 건국한 박혁거세 왕을 박씨의 시조로 하여 신라 제54대 경명 왕의 제8왕자인 월성대군 박언의(朴彦儀)를 월성박씨(月城朴 氏 ) 의 분 관 조 로 한 다 . 경주 남산(금오산) 서쪽 기슭에 제단을 설단하고 고려 때 좌 사간을 지낸 31세(世)박견(朴甄)및 지하 (支下)10위의 제단도 좌측에 병설하였으며 그 아래 월성재(月城齋) 재실을 두고 매 년음력3월15일대군과11위선조의제향을봉행하고있다. 중조(中祖)42세 박구(朴寇)는 중군의 사정과 부령에 올랐으 나 조선이 개국하자 인천 장아산에 은거 중 태종의 출사 권유에 도 불응하고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켰으며 그 묘소에는 장아산 종중묘역(인천광역시지정문화재기념물제62호)에있다. 43세 박간(朴幹)은 성균관 대사성과 예문관의 제학을 지내고 가선대부로좌찬성에추증되었다. 묘 소 는 실 전 되 어 종 중 묘 역 내 선 고 의 조 하 (兆 下 )에 설 단 되 었으며 매년 음력 10월 첫 일요일에 제향하고 있고 인천시 서창 동에장아재를두고있다. 전국의 3만여 종친은 인천, 서산, 동래, 군위, 경주 등지에서 숭조정신을 바탕으로 왕손의 긍지를 갖고 치성을 다하며 종족 간에종의를돈독히하고있다. △작품설명 - 조형물의 전체적인 형상은 한글 ‘울산’ 글자를 조형적으로 해석하여 울산박 씨의 이미지를 담았고, 상부 꼭대기 ‘공’모양은 울자의 ‘ ○’부분을 모색했고, 또 울산 지역의 대표적인 고래의 형 상과 문중의 대표상징 ‘학’을 메시지로 담았다. 그리고 기 둥부분은 울 자의 ‘ㄹ’부분을 그렸고, 하부에는 산과 파도 로 미역바위(곽암)의 형상을 조형화하였다. △ 유 래 - 울산박씨는 본관 이 흥려(興麗)였으나 조선태종(朝鮮太宗) 13년(1413)에 지명 (地名)이 흥려부(興麗府)에서울산(蔚山)으로개칭되었다. 울산박씨 시조(蔚山朴氏始祖)는 흥려백 시호 장무공 휘 윤웅 (允雄)이시다. 공은 신라 시조왕 박혁거세의 후손으로 신학성장군 이라 칭 하여신라 하곡현(울산중구학성)일대를 통치하던 호족장이었 다.고려개국(918)시 태조를 도와 개국공신에올랐고 후삼국 통 일에 큰 공을 세워 통치하던 동진(東津), 하곡(河曲), 동안(洞 安), 우풍(虞風), 임관(臨關) 등 5개 군현(郡縣)을 통합하여 흥 려부(興麗府)로 승격(울산시는 이날 10월1일을 울산 시민의 날 로 제정함)시켜 공(公)을 흥려백(興麗伯)에 봉작하여 숭록대 부 대장군에 내명되고 통합 삼한 벽상공신에 녹훈되어 통치하 던전지역을사패지(賜牌地)로하사(下賜)받았다. 사 패 지 일 부 인 미 역 바 위 1 2 구 중 1 구 ( 區 )가 천 여 년 이 지 난 지금까지 보존되어 서기 2001년 12월 20일 울산광역시 지방문 화재(기념물)제38호로지정되어우리 종중에서관리하며여기 서 생산되는 미역을 매년 공의 향제시 제수(享祭時祭需)로 진 공(進貢)하고있다. 고려 문중 이래 공의 신주를 성황당(城隍堂)에 모셔 계변천 신(戒邊天神)으로 숭앙(崇仰)하여 수호신(守護神)으로 받들 고 있다.그러므로 공은 오늘의 울산을 있게 한 원훈(元勳)이시 며 그 공업(功業)은 동해의 물결 아래 저 곽암(藿巖)과 함께 천 여년세월속에빛나고있으며만세에불후(不朽)하리로다. △ 작품설명 - 조 형 물 은 민 족의중흥을주도한대통령의 가문으로 한문중에서박정희 박근혜 두분의 대통령을 배출 하고부녀간에 대통령이 배출 된 집안은 유일무이(唯一無 二)하겠다고하겠다.\ 조형물의 상부는 암행어사 박문수를 상징하는 마패형상 으로 문중의 위상과 기개를 의미하고,중심부는대통령의 상징인봉황을표현하였다. 조형물의 형태는 문중의 화합과 발전을 기원하며, 문중 위인 들의업적을함축적인이미지로상징화하였다. △ 유 래 - 우리 고령박씨 시조는 고양대군(高陽大君)박언성 (朴彦成)으로 신라의 시조대왕인 박혁거세의 30세손(世孫)이 며제54대경명왕의둘째아들로전해지고있다. 고양(高陽:지금의 고령)을 봉토로 후손들의 관향이 고령으로 되었다고한다. 고려시대에와서 중시조 세분(박섬,박환,박연)이 계시고조 선시대에 이르러 파조(派祖)를 모시게 되었는데 교수공(박유 동),영참판공(박금동),직강공(박숙동),승지공(박세광),경참 판공(박세정), 진사공(박세필), 읍취헌공(박은), 사정공(박문 현), 현감공(박진), 무숙공(박만), 감사공(박처륜), 참의공(박 제순), 판관공(박석생), 소윤공(박경), 우윤공(박상빈)으로 모 두열다섯분이다. 고려시대에는 흥위대장군 박지순, 문하찬성사 박리, 박광순, 문하시중박광우,박우생선조가계신다. 조선시대 와서는 문과급제자가 56인에 이르고 청백리로 녹 선된 박처륜, 박영준과 임진란의 공신 박진남, 조선 제일의 한 문 시인으로 꼽히는 박은, 암행어사로 이름이 높은 박문수, 임 진란에 의병을 지휘하여 왜와 싸우신 박정번, 유학자 박인이 계신다. 현대에는 제5대~ 제9대까지의 대통령으로 우리나라 근대화 의 위업을 이룩한 박정희 대통령과 이 분의 큰 따님으로 제18대 박근혜대통령이계신다. 우리고령박씨는 경북고령을비롯해전국에1만3천여가구5 만여명의성손이세거해오고있다. 곧고 굳은 절의와 청백의 정신으로 청신한 종문의 기풍을 이 룩해 오신 선조님들을 숭앙하고 그 정신을 계승하여 종문과 성 손의 찬란하고 고귀한 영광이 만대(萬代)에 이어지도록 우리 모두의기원을담아이비를세웠다. 뿌리공원박씨조형물현황 뱚지난호8면에이어 뱚상주(상산)박씨尙州(商山)朴氏유래 뱚월성박씨(月城朴氏)의유래 뱚울산(흥려)박씨蔚山(興麗)朴 氏의유래 뱚고령박씨(高陽朴氏)유래 뿌리공원은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뿌리를 알게 하여 경로효친사상을 함양시키고 한겨레의 자손임을 일깨우기 위하여 세계 최초로 성씨를 상징하는 조형물을 세운 충효 의 산 교육장이다.우리나라의 국조는 기원전 2333년에 고 조선을 세운 단군왕검이시며 우리가 현 재 사 용 하 는 성 은 삼 국 시 대 왕 족 과 일 부 귀 족 중 심 으 로 사 용 된 것 으 로 보 이 며, 고려 초기부터 귀족은 물론 평민도 성과 본관을 쓰게 되었다. 성은 조선조 세종 때 세종실록지리지에 265성 영조 때 도곡 총설에 298성 1930년 국세조사결과 250성이던 것이 1985년 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275성 3349본관인 것으로 나타났다. 성과 본관은 가문을 나타내고 이름은 가문의 대 수를 나 타내는 항렬과 개인을 구별하는 자로 이루어져 있어 성명 으로 개인의 구별은 물론 가문계대까지 알 수 있다. 이곳 뿌리공원을 통하여 우리 모두는 숭조위선의 정신으로 화 목과 우의를 돈독히 하고 충효의 실천으로 한민족의 얼을 자손만대에길이빛내야할것이다. 현재 우리 박씨 조형물은 1~2차에 걸쳐 무안, 밀양, 반남, 순천, 죽산, 진원, 충주, 함양, 3차에 울산, 고령, 상주(상 산), 월성박씨 등 12개 본관의 조형물이 세워졌고 3차로 조성된 울산, 고령, 상주(상산), 월성박씨 조형물이 건립 되 었 다 . 지 난 호 8 면 에 게 재 이 후 이 번 3 차 로 조 성 된 조 형 물에대해알아본다. 3차로 조성된공원에는88개성씨의조형물이 세워졌으며지난 23일제8회효문화축제일에일제히제막식을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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