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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9월30일 금요일 12 (제117호) 기획 인당(忍堂)박소(朴昭)선생은고려의 충신으로불사이군의 충절을 보인송은박익선생의아들이다.조선조 태종때 부친의유지(遺志)에 따라등과 하 여 여 러 군 ( 郡 ) 에 서 벼 슬 살 이 를 하 였 는데 가는 곳 마다 청백리(淸白吏)로 명성이 높았다.선생이 읊은 글에 「백성이 잘 먹고 내 굶으면 주림이 포만이고,그대 굶고 내 배부르면 포만이 고통이다.」또 「지나치게 많은 말과 생 각은마음에극히해롭다.」하였으니오늘날지도층(指導層)과공직자들이옷깃을여미고가슴에새길지극 히아름다운말이기에선생의행장과문집을생애와사상시(詩)의세계를자세 히알아본다. 인당(忍堂) 공의 휘(諱)는 소(昭)이고 자(字)는 회옹(晦翁)이며 인당(忍堂)은 선생의 호(號)이다. 성은 박씨(朴氏)로 밀성인(密城人)이다. 박씨는 신라의 혁거세왕(赫居世王)을 시조로 대대로 번성 하여 밀성을 비롯한 12관향을 가진 문벌이다. 중조 (中祖)인 휘(諱) 언부(彦孚)는 관직이 시중(侍中) 에 이르렀고 밀성부원군(密城府院君)에 봉해졌다. 휘 효신(孝臣)은 벼슬이 문하시중도평의사(門下 侍中都評議事)이 이르렀고 시호(諡號)는 문익(文 翼)이다. 휘 공필(公弼)은 대장군도검사(大將軍都 檢事)이다.휘 육경(育慶)은 대장군병부상서(大將 軍兵部尙書)이며 휘 대화(大和)는 이부상서(吏部 尙書)로 공에게는 고조부(高祖父)가 된다. 증조 (曾祖)의 휘는 간(幹)으로 문과에 두 번 급제하였 다. 조부의 휘는 영균(永均)이며 익대공신(翼戴功 臣)으로 은산부원군(銀山府院君)에 봉해졌고 시 호(諡號)는 문헌(文憲)이다. 고(考,아버지)는 휘 가 익(翊)으로 고려의 예부시랑(禮部侍郞)겸 중서 령(中書令)이다. 우리 조선에 들어와 대광보국숭 록대부의정부좌의정(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 議政)에 추증되었다. 시호(諡號)는 충숙(忠肅)이 며 호(號)는 송은(松隱)으로 비(삽)는 정경부인 (貞敬夫人) 분성배씨(盆城裵氏)로 문과에 두 번 급제한현보(賢輔)의딸이다. 공(公)은 고려 충목왕(忠穆王) 3년 정해(丁亥:1 347년)에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시 삽포리( 숍浦里) 에서 백씨(伯氏) 우당(憂堂)과 쌍둥이로 태어났 다. 그의 부친인 송은공께서 고려 공민왕 때 등과하 여 벼슬을 하면서 상경하여 포은(圃隱, 정몽주)에 게서 수학하였다. 당시 우당과 인당은 15~6세였고 포은은25~6세정도였다. 독곡(獨谷) 성석린(成石 면), 당옹(戇翁) 이서 (李舒), 당옹(戇翁) 이제현(李齊賢)과 서로 마음 으로 교유하였다. 또 신재(信齋) 한상경(韓尙敬) 과 주고받은 시문(詩文)과 이도은(李陶隱) 숭인 (崇人)이 증화(贈和)한 시를 보면 당시 포은의 문 하에서 수학하던 제생(諸生)들과 공의 인품을 짐 작할 수 있다. 이 때 공과 더불어 도의로 교유한 사 람들은 모두 한 시대의 명유석학(名儒碩學)들이었 다. 우리나라 유학의 적통이 포은에게 계승되었으 니 인당 역시 유학의 적통을 이은 것이다. 위로는 엄한 선생을 받들고 집안으로 어진 부형(父兄)의 인자한 가르침이 있었으며 밖으로는 진실한 벗들 과 우의를 나누었으니, 공의 행실이 아름답고 빛남 은 그 유래가 있는 것이다. 공양왕 때 적자폐위를 계기로국운이기울자송은은밀양삽포리기산(箕 山)아래 송계(松溪)로 낙향하였다.이때는 1391년 경으로 조선 건국 2년 전이며 인당공의 나이 45세 정도이다. 이즈음에 공은 삽포( 숍浦)에서 부(府) 의 서쪽 종남산(終南山) 아래 신촌(新村)으로 이 주하였다. 춘당(春堂) 변중량(卞仲良) 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과 같은 마을에 살면서 의리(義理) 를 강론하며 연마하고 문학을 이야기하며 토론하 면서 덕봉(德峰)과 노연(魯淵) 사이에서 술 마시 고 시 지으니 독곡(獨谷) 성석린(成石 면)이 지은 시 에 “덕 도 봉 (德 道 峰 ) 앞 에 그 대 술 있 고 노 연 (魯 淵)의 밝은 달빛 고깃배에 가득하네.”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또 고을의 여러 어른과 연장자들이 계를 모아 봄가을에 강회를 열고 각기 그 이름들을 적어 올렸는데 송은(松隱), 춘당(春堂), 춘정(春 亭), 인당(忍堂)이 모두 윗머리를 차지하였다. 동 약(洞約)은 남전(藍田)의 여씨향약(呂氏鄕約)에 의거하여 덕업(德業)은 서로 힘쓰고 과실(過失)은 서로 바로 잡는 것으로 요목과 강령과 규정으로 삼 았다. 민속이 평안하게 되어 효성스럽지 않음과 공 경하지 않음과 불쌍히 여기지 않는 형벌이 줄어들 었다. 이로써 그 안(案)을 짜서 구령동안(龜齡洞 案)이라고 하고 그 향약을 구령동약(龜齡洞約)이 라고 이름하였는데 구령은 인당공(忍堂公)이 살던 현(縣)의이름이다. 이름은 작은 현의 향약 즉 동약(洞約)이지만 한 고을의 유명한 선비와 큰 학자들이 이름을 올리지 않음이 없었으니 한 고을의 민속이 모두 흥기(興 起)하니 응천(凝川)고을의 아름다운 풍속이 공에 게서시작되었다고할것이다. 나중에 점필재( 탕畢齋) 김종직 선생이 동약(洞 約)을기초로그것을확대하고그이름을밀주향약 (密州鄕約)이라 하였다. 또 따로 명인이나 문벌의 사람들을 기록하여 밀주향안(密州鄕案)이라고 하 니 곧 예 동 안 (洞 案 ) 동 규 (洞 規 )이 다 . 수 백 년 뒤 에 도그남겨진풍도가사라지지않고오히려그법도 를 그 대 로 행 하 며 이 어 지 니 공 ( 公 )의 덕 행 이 후 세 에까지 베풀어짐이 멀고도 큰 것이다. 송은(松隱) 께서 1398년 영결하면서 “자신은 고려의 신하로 죽 으니 아들들은 조선의 사람으로 살아라.”는 유언이 있은 뒤 삼년상을 치르고 이후 7년 뒤인 1408년인 조선 태종(太宗) 8년, 인당공 61세에 네 형제가 나 란히 생원(生員)에 급제하여 이후 인당은 음직으 로 여 러 군 을 두 루 다 녔 는 데 이 르 는 곳 마 다 고 절 (苦節)을 지키는 생활을 하였다. 안음(安陰)에 있 을 때 서 쪽 벽 에 판 을 걸 고 그 형 제 인 우 당 (憂 堂 ), 아당(啞堂), 졸당(拙堂) 공들과 함께 유람하며 시 를 지으니 이 때 사람들이 사우당(四友堂)이라고 하였다. 선생께서 자호(自號)를 인당(忍堂)이라 한 것은 대개 장공예(張公藝)가 인(忍)을 써서 가슴 깊이 새긴 뜻을 취한 것이다. 일찍이〈계사(戒辭)〉를 지 었다. “말이 많고 염려가 많은 것은 지극히 해로운 것이다.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과 다른 사람에 충성하는 것과신의가있는것은잠시라도떨어질수없는것 이니 성현(聖賢)들의 말씀으로 스스로를 기약하여 라. 그 말씀은 ‘올바른 제도와 올바른 말을 평생토 록 가슴에 새기고 반드시 선왕을 기준으로 삼으리 라’이다.그학문은도(道)를향하고사물의외형을 추구하는 일은 하지 않아야 한다. 이치를 궁구하고 선한 것을 밝히며 반드시 본심(本心)이 항상 존재 하기를 추구하면 깊이 성현(聖賢)들의 심법(心法) 을 얻음이 있을 것이다.도박,변칙,유희 등의 상황 을 만나도 잠시라도 마음을 깃들게 하지 말고 눈을 바르게 하면 음란한 소리와 음탕한 색들에 마음이 오염되는것을막을수있을것이니대개외형적사 물에 매료되어 뜻을 해치는 것을 경계함이 있는 것 이다.” 이 계사(誡辭) 한편을 보면 公이 자호를 인 당이라고 한 이유와 평생 동안의 언행(言行)을 알 수 있다.탁영(濯纓)김일손(金馹孫)이 쓴 〈학궁기 (學宮記)〉에 “인당은 예학(禮學)에 정심(精深)하 였고 스승에게 배움이 더욱 도타웠다. 야은(冶隱) 길재 등 여러 현인들과 도의의 사귐이 친밀하였 다 .”고 하 며 또 “예 학 (禮 學 )과 도 의 (道 義 ) 에 깊 다 ” 고 하였다. 인당(忍堂)은 자신의 호에서 드러나듯 이 스스로를 밖으로 드러냄보다는 내면을 다스리 는 수신(修身)에 힘쓰고 그것이 삶의 근간으로 실 천됨을지향한것으로볼수있다. 도은(陶隱)이숭인이 공께서 벼슬함에 청백하다 는 말 을 듣 고 동 헌 벽 에 화 답 하 여 시 를 지 으 니 “맑 고 맑 은 저 샘 물 우 는 뜻 이 있 지 그 소 리 관 아 에 전 해 밝 고 맑 음 본 받 으 라 고 나 같 은 속 객 (俗 客 ) 이 어 찌 따르리, 효우문(孝友門) 아래서는 곡직(曲直) 도 평정하니” 하였다. 우당(憂堂)의 시는 “베겟머 리 솟 는 샘 물 소 리 집 안 에 울 리 며 항 상 맑 으 라 는 마 음을전한다네.맑게흐르는저물로하여금백성의 밭 적시어 태평성대 노래하게 하리라.” 공의 시 (詩)들 중 “선과 악은 마음에서 비롯되니 어짊 앞 에서는 악도 도리어 어질어지리.”라고 한 〈거관자 경(居官自警)〉은 인(仁)을 바탕으로 심신을 수양 하고 극기복례(克己復禮)하여 지선(至善)에 이르 기를 갈망한 도덕적 내용을 노래한 것이다. 또 “물 고기는 멋대로 뛰어 놀고 버들은 바람 따라 휘청이 네”라고 한〈즉사(卽事)〉는 인간의 수양이 개인적 수신(修身)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일체 가 되는 경지로 나아간 것이다. 이는 증점이 ‘기수 에서 목욕하고 무에 바람을 쐬고 노래하며 돌아온 다.’는 경지이며 인당의 원융(圓融)한 자연인(自然 人)으로서의풍모를보여주는것이다. 또 백성들을 지극히 아끼고 사랑하며 동고동락 (同苦同樂)할 것을 생각하여 〈자관(自寬)〉시를 지 었는데“백성이배부르고내 굶으면배고픔이포만 이고, 그대 굶고 내 배부르면 배부름이 고픔이지 배부름과 배고픈 유래 어디서 관여되나 누구나 천 심(天心)을 얻으면 배부르고 배부르리.”라 하였다. 한식시(寒食詩)에 “계절은 좋은데 백성은 즐겁지 않고, 집집마다 어린아이 굶주림 바라보네.”라 하 였다. 이러한 시들은 백성들이 자애롭고 불쌍히 여 기 며 벼 슬 에 청 백 한 행 적 을 볼 수 있 는 것이다. 이 러한 인당의 마음이 백성들에게 전하여지고 도은 의 시처럼 인당 스스로가 모든 곡직(曲直)을 공평 무사하게 처리하였으므로 관청은 송사(訟事)가 없 어 태평할 뿐이다. 그러므로 인당은 “관아가 적막 하니 문을 걸어 닫아 이끼가 푸를 때면 그 위에 발 자국 찍네.”라는 〈정당자희(政堂自戱)〉시를 쓸 수 있었던것이다.이뿐만아니라고려의신하로절의 를지킨부친의뜻을이은자신의절의를우당의두 견(杜鵑) 시에 차운하여 〈근차백씨두견운(謹次伯 氏杜鵑韻)〉에는 “한 맺힌 밤 충신의 슬픔 가까이 말라고 노래하니, 그 말 듣고 어찌 한 잠인들 이루 리.”라고 노래 하였다. 또 형제간의 깊은 우애는 〈제백씨문(祭伯氏文)〉에 절절히 새겨져 한날한시 에 태어났다가 뜻밖에 사별함을 참으로 믿지 못하 는 안타까움으로 표현되었다. 그리고 벗들과 사귐 에도 그 마음을 다하였다. 신효경에게 주는 시에 “앉으나 서나 보고픈 긴 그리움은 의연한 물색이 헤어질 때와 같아서이지.”라고 하여 벗과 이별한 뒤그를생각하는간절한마음을그려내었다.이러 한 인당의 시문은 인당의 평소의 삶과 생활을 여실 히 보여주는 것이다. “見其詩而知其人” 즉 “그 시 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인당 의 생애가 자세히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 글을 통 하여 생애가 가장 잘 드러나므로 인당의 생애는 그 의 시문에 절절히 아로새겨져 있는 것이다. 영락 (永樂) 병오(丙午)년 1426년 세종 8년 10월 16일 집에서 수명을 다하였는데 향년 80세로 부(府) 서 쪽 운정산(雲亭山)백호등 건좌(乾坐)에 장사하였 다. 배(配)는 평양(平壤) 조씨(趙氏) 홍(洪)의 딸 이 며 후 배 (后 配 )는 창 원 공 씨 로 부 정 (副 正 ) 을 지 낸 인 기 (麟 起 ) 의 딸 이 다 . 3 남 1 녀 를 낳 았 는 데 맏 이 는 맹번(孟蕃)으로 감찰을 지냈고 다음은 중번(仲 蕃)으로 별시위진의부위(別侍衛進義副衛)에 올랐 다.다음은계번(季蕃)으로호군(護軍)을지냈다. 인당의 학문이 구체적으로 제시된 문장은 남아 있지 않다.다만 편린으로 남아 있는 12수의 시와 2 편의문장이전부이다. 그 러 므 로 이 1 4 편 의 글 로 그 의 학 문 이 어 떤 성 향 이 있다고 확정하여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단 1 편의 글만으로도 그 사람의 내면적 깊이와 예능적 재능을 엿볼 수 있음도 부인할 수 없다. 「견기시지 기인(見其詩知其人)」즉 「그 사람의 시를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을 알 수 있다.」는 말이 근거가 될 것이 다. 동주(東州) 이민구(李敏求, 조선중기 문인)가 『당(唐)나 맹호연(孟浩然)의 훌륭한 시문이 다 없 어졌어도 오직「미운담하한 소우적오동(微雲淡河 漢 疎雨滴梧桐) : 엷은 구름은 은하처럼 맑은데 성 긴 빗방울 오동잎에 떨어지네」라는 구절은 천지와 함께할것』이라고칭송했다는내용에동감할뿐이 다. 즉 어떤 작가의 시와 문장이 많고 적음은 문제 가아니라단한구절이라도훌륭한것은그안에담 긴작가의정신이찬연히빛난다는말일것이다.그 러 므 로 1 2 편 의 시 를 많 다 고 할 수 없 지 만 결 코 적 은 것은아니다. 그 모두가 순정(純正) 충실(忠實)하지 않음이 없어 인당의 학문과 삶이 자세를 여실히 보여준다. 또 <계사(戒辭)에서는 수신(修身)을 위한 정심(正 心) 성의(誠意)의 바탕을 분명히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탁영 김일손이 쓴 학궁기(學宮記)>에 인당을 「예학에 정심하였고 스승에게 배움이 더욱 도타 왔다.야은길재이외여러현인들과도의의사귐이 친밀하였다.」고 하였다. 탁영은 같은 글에서 인당 의 형인 형인 우당은 문장과 치적에 뛰어났다고 하 면서인당은예학과도의에깊다고하였다. 방촌(尨村)황희(黃喜)는 우당을 한나라를 부강 하게 한 동중서에 비교하였다. 이러한 평가들은 우 당이 백성을 다스리고 문장을 지음에 뛰어났다면 인당은 도학을 궁구하여 포은 정몽주의 도학을 충 실히 계승하였다는 의미로 받아드려진다. 특히 그 의 교우관계를 살펴보면 이런한 그의 성향을 짐작 할수있다. 『독곡 성석린과 당옹 이제현과 서로 마음을 허락 한 교계(交契)를 하였고 신재(信齋) 한상경(韓尙 敬,고려말 조선초 문인)과 시문을 주고받은 것과 도은 이숭인이 증화(贈和)한 시를 보면 공이 더불 어교유한사람들이모두한시대의명유석학(名儒 碩學)들이었고』이외에도 춘당 변중량, 춘정 변계 량 형제와도 교분이 깊었다. 이러한 교우관계로 인 당이살아간삶의자세의대개를엿볼뿐이다.현재 남아 있는 인당의 시는 위의 인물들이 인당의 시에 차운하면서 인당의 원운(原韻)을 같이 기록해서 남겼거나인당이차운한것이남아있을뿐이다.그 몇 편만 남은 인당의 시를 대별하자면 도학(道學), 한정(閒靜), 애민(愛民), 절의(節義), 효우(孝友) 등다섯가지정도로나눌수있다. 벼슬살이를 경계하는 인당의 시를 인용해 본다. 【선과 악은 마음에서 비롯되니/ 어짐 앞에는 악도 선해지리라. 어질려면 마땅히 덕을 베풀라/ 방종과 잔인함은 자신을 해치니.선함 앞에 위협을 설 자리 없고/삿됨에빠지면진실을잃으리라.어떤약속이 든잊지말아라/성냄과급함은사람을상하나니.】 이 시에서 인당은 자신의 심성을 수양하는 지표 로 가장 중요한 것이 인(仁)임을 표방하였다. 또, 백성들을 다스리는 관직에 있는 사람이 어떠한 마 음가짐을 가져야 하는지를 말하였다. 모든 것은 마 음에서 비롯되므로 심성을 수양하여 인간 본의의 본성 즉 하늘이 처음 인간에게 내린 천성(天性)을 회복하고 극기복례(克己復禮)하여 인으로 돌아가 는 것 ‘귀인(歸仁)’을 추구한다. 다스리는 사람이 어질어 덕을 베풀면 백성들은 자연스럽게 순화되 고 천하가 태평하게 되리라는 유교의 큰 덕목을 실 천하려는의지가이시의핵심일것이다. 인당의 사상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은 없다. 그 러나 그의 시문(詩文)에 대한 고찰과 주변자료들 을근거로그의사상을대략으로는살필수있다. 첫째, 철저하게 수신에 기반을 둔 유가적 실천주 의이다. 그는 ‘계사(戒辭)’에서 철저한 수신의 자 세를 보인다. 이를 위해 일상에서도 정심(正心)하 고성의(誠意)하는태도를분명히하였다.또‘거관 자경(居官自警)’이라는 시에서 인(仁)을 근본으로 삶을 실천하는 위정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것 으로 그는 명분만을 따지는 유학자가 아닌 실천하 는유학자로서삶을산것으로볼수있다. 둘째,백성을먼저생각하는민본주의이다.‘자관 (自寬)’과 ‘한식(寒食)’ 등의 시에서 백성들에 대 한 지극한 애정과 관심을 보였으며 이는 그의 사상 이 민 본 주 의 임 을 보 여 주 는 증 거 가 될 것 이 다 . 셋째, 명분과 본분을 지킨 정명주의자이다. 그는 먼저 부친의 뜻을 따라 조선 건국 이후에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칩거하여 고려의 충신으로서 명분 을지켰다.그리고부친유언에따라송은이별세한 뒤 10년이라는 장례의 기간과 자숙의 기간을 보낸 뒤 부친의 명을 받아들어 늙은 나이임에도 과거에 나아갔다. 이는 부친에 대한 효를 다하는 자식으로 서의 명분을 지킴과 동시에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 여 집안을 몰락시키지 않고 지탱하여 후손에 대한 명분을지켰다.또한이왕조선의신하가된뒤로는 조선의 신하로서 나라에 대한 충의 실천으로 백성 을 다스림에 성심을 다하였다. 이는 조선의 신하로 서, 또 위정자로서의 명분을 다한 것이니 그를 정 명주의자라고할것이다. /참고문헌국역증보인당선생문집 /전(前) 창원대학교 문학박사 박태성 인당선생 문집해제(解題) 청백리인당박소(朴昭) 선생 선조 유지를찾아븣 선생의 가계 인당선생의안음현감교지. 인당선생유허비-경남밀양시초동면신호리모선정입구. 인당선생의단비에서후손들이모여제향을올리고있다.(경남밀양시청도면고법리송은선생묘역동편). 인당집- 1837년밀양의덕남서원에서송은선생문집단권을 간행할때부록속집으로간행한이후2005년종의(宗儀)에의 해증보국역본으로간행되었다. 인당선생 문집 책판(송은 박익선생 문집책판본)-경남문화재 자료제351호 선생의 생애 인당선생의시(詩)의의미(意味) 인당의 사상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