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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7월31일 일요일 8 (제115호) 시·군 지부 경북도홍열문화예술과장( 사진븡 5 7 )이 지 난 3 일 청 송 군 부군수에 취임했다. 박 부군수는 이날 취임식에서 뷺문화관광도시를 꿈꾸는 청송의 다양한 문화정책을 경 북도와 중앙부처 등과 연계해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풍 족한곳으로만들어보겠다뷻고취임소감을밝혔다. 경북도청에 근무하는 동안 경북 북부 5개군 연합회인 오청회에 부회장으로 역임하면서 매년 아름다운 고향장 터를 개설하여 지역의 농산물 판매에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기에 이번 부군수 취임으로 종친은 물론 지역 주민 들이크게반기고있는분위기다. 박 부군수는 1958년 경북 영양에서 출생했다. 전통적 인 농촌의 유교적 가풍에서 배우고 익힌 도덕성과 근면 성, 그리고 청백리 후손으로 청렴성을 가장 중요한 가치 관으로 삼고, 타고난 친화력으로 공직사회를 이끌면서 화제가 되었던 그는 경북 영양군 영양읍에서 만고충신 관설당 박제상 선생의 57대손으로 아버지 故 박인호님 과 금 녕 김 씨 故 김 순 이 여 사 사 이 에 서 7 형 제 중 셋 째 아 들로 태어나 고향인 영양에서 영양초븡중븡고등학교를 우 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경상북도 도비지원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경북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지방자치단체 행 정사무의 효율적인 조정 방안’ 논문으로 행정학 석사학위를 취 득했다. 박 부군수는 영양군 산 업과·내무과, 고령군 개진면장, 경북도 국제통상진흥·관광정책 ·예산총괄사무관, 체육진흥과 장, 안전총괄과장, 문화에술과 장을 역임하는 동안 대통령 표 창, 국무총리 표창 등 다수의 수 상경력이 있고, 저서로는 지방자치단체의 행정사무 배 분조정,지방재정에관한연구등이있다. 특히 고향 영양군종친회 발전에 크게 기여한바 있어 청송군 부군수 취임으로 청송군종친회 발전에도 크게 기여할것으로보인다. 박 부군수는 “뿌리 없는 나무가 없듯이 조상 없는 후 손이 있을 수 없다. 오늘의 나를 존재하게 하는 뿌리의 의 미 를 되 새 겨 보 는 것 도 의 미 있 는 일 이 며 그 것 이 자 손 으로서의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한다. 또한 “ 재임 중 청송지역 종친들의 화합과 단결을 위해 최선의 역할을 다해나갈생각”이라고말했다. 경북도청홍열현종청송군부군수취임 뷺뿌리없는나무가없듯이조상없는후손있을수없어븣종중에누가되지않도록최선뷻 남에서는 월북한 남로당의 괴수, 북에 서는 미제의 간첩으로 1956년 7월 19일 김일성에 의해 처형당한 박헌영의 제60 주기 추모재가 지난 19일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만기사에서 영해박씨 성수 대종 회장을 비롯한 임원진 40여명과 일반 추 모객 등 60여명이 함께한 가운데 엄숙 봉 행되었다. 이날 추모제는 선생의 육성청취, 참배 객의 분향 헌작 순으로 진행되었으며, ‘눈물 젖은 두만강’의 비화와 노래가 흐 르는 동안 잠시 숙연해지는 분위기가 이 어졌다. 추모제에 앞서 선생의 아들이자 만기 사 주지스님인 원경 대종사는 무더운 날 씨임에도 잊지 않고 찾아준 모든 분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하고 10여 년 전 전라도 모처에 가서 선생의 천도제를 올리고 나 왔는데 지인들이 숨겨놓은 애인 만났냐 며 행적을 추궁해 천도제를 올리고 왔다 고 말하면서 선생의 추모기일이 알려지 게되었다며거듭감사의인사를전했다. 박헌영(朴憲永) 선생의 본관은 영해 (寧海), 호(號)는 이정(而丁)으로, 1900 년 5월 1일 충남 예산군 광시면 서초정리 에서 아버지 박현주(朴鉉柱, 1867~1934) 와 어머니 이학규(李學圭,1867~1943)사 이에서태어났다. 1915년 4월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 하면서 부모님은 아들이 열심히 공부해 법관이 되기를 바랐다. 경성고보 출신이 라면 시도해 볼 만한 일이었다.법관이 아 니라행정관리만되어도좋을터였다. 하지만 박헌영은 조선인 착취에 앞장 서는 총독부 관리가 되고 싶은 마음은 추 호도없었다. 박헌영이 누렸던 학창생활은 조선인 가운데 극소수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었다. 이런 특권의식에 젖은 학생들은 조 국을 빼앗은 일본의 정신문화를 숭배한 나머지 민족개량주의자가 되거나 아니면 친일파가되어갔다. 러시아의 10월 혁명, 동양 현대사의 최 대 민중항쟁이었던 3·1 운동은 자신을 공 산주의로 진영으로 이끌었다고 고백한 다. 그리고 사회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한 독립운동가로서의삶은평탄치못했다. 상해 망명과 거듭되는 감옥살이 소련 으로의 탈출 그리고 세 번째 투옥 6년형 선고, 아버지의 사망 등 가정에도 상당한 고통을 감수해야 했으며, 1941년 3월 21 일아들박병삼(원경스님)이태어났다. 븮일본필패론븯을 비밀 출판물로서 선전 공작에 열중하던 박헌영은 1945년 5월 독 일의 항복소식을 접하고 일본의 항복은 더욱 필지(必至)라고 보았고 1945년 8월 9일에 소련군의 대일개전(對日開戰)을 보고서는 일본의 붕괴는 시일문제로 보 았다. 그리고 1945년 8월 15일 광복이란 기쁨 의 날 이 오 자 그 는 취 업 중 인 벽 돌 공 장 감 독에게 “장래를 위하여 서울로 가겠다.” 는간단한말을남기고서울로향했다. 한국역사에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이 다. 박헌영에게도 새롭고 득의에 가득 찬 시기였다. 3·1운동부터 해방의 그날까지 계속된 박헌영의 투쟁역사는 이제 그의 정치적 자산이 되었다.해방 후 간행된 출 판물에서 박헌영은 “해방 조선의 산 역 사”,“27년 동안 꾸준한 초인적 투쟁을 계 속한 철(鐵)의 인(人)”이라는 평가를 받 았다. 그러나 남북한으로 나누어 수립된 양 쪽정부 모두에게서 환영받지 못하는 비 운의독립운동가로남았다. 뷺나는 이 자리에 오기 훨씬 전부터 살 아서 나갈 수 없는 신세임을 느끼고 있었 다. 이 재판은 말 그대로 요식일 뿐, 어떠 한 최 후 진 술 도 너 희 들 의 각 본 을 뒤 집 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그렇다면 결론부터 말하겠다. 너희들의 주장대로 나는 미제의 간첩이었다. 그러나 너희들 이 주 장 하 는 미 제 간 첩 과 내 가 주 장 하 는 미제 간첩은 엄격히 다르다. 나는 남조선 에 있 을 때 , 아 니 그 훨 씬 전 부 터 미 국 사 람들과 교분이 있었다. 그 교분은 조국의 해방과 독립된 통일 조국 건설을 위한 차 원이지 결코 간첩행위가 아니다. 남조선 에서 나는 미군정 고위장성들을 만나 내 가 통일조국의 최고 책임자가 되면 미국 과도 국가 정책을 협의할 수 있다고 분명 히 밝혔다. 내가 약속한 그 협의는 현재 소련과 미국의 두 지도자가 서로 얼굴을 맞대고 국제문제를 협의하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븣뷻라며 1955년 12월 15일 재판에서 최후진술을 남기고 이듬해 형 장에이슬로사라졌다. 그러나 최근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의 재평가와 정부 포상이 이루어지면서 박 헌영 선생의 행적과 1997년 서울리서치 가 행 한 여 론 조 사 결 과 에 따 르 면 븮 눈 물 젖 은 두만강븯은 ‘통일 후 북한 동포와 함께 부르고싶은노래’가운데첫자리를차지 하면서 이 노래에 실린 애환 과 어떻게 지 어진노래인지가새롭게주목받고있다. 박승직 상점(현 두산그룹 모태)의 주 인 박승직은 박헌 영의 광기(狂氣)가 사 실인지 사람을 통해 은밀히 확인하고 그 의 망 명 을 실 행 에 옮 기 기 위 해 당 대 의 유 명배우이자 영화연출가 김용환을 찾았 다. 그리고 평소에 박헌영과의 접선을 위 해 ‘님’이라 암호를 정했다며 모스크바로 의 탈출을 부탁하면서 무사히 넘어갔다 는 증표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여 김용 환은 예정대로 일이 잘 되면 신문에 글을 하나 쓰겠다며 신문에 글이 게재되면 성 공한걸로알아달라고하였다. 이후 모진 고생과 위험을 무릅쓰고 무 사히 두만강을 건너게 한 김용환은 신문 에 시(詩)‘눈물 젖은 두만강’『 님 가 신 강 언덕에 단풍이 물들고/ 눈물진 두만강에 밤새가우니/떠나던그님이보고싶구나 / 그리운 내님이여그리운 내님이여언제 나오시려나』을 실어 무사히 국경을 넘어 갔음을알렸다. 그 리 고 박 승 직 은 집 에 기 거 하 던 문 객 이면서 김용환의 친구였던 한명천에게 “내가 무척 아끼고 흠모하는 이를 그린 시 일세”라며 박헌영의 무사탈출을 알린 김 용 환 의 시 눈 물 젖 은 두 만 강 을 노 래 가 사로 만들어 줄 것을 부탁했다 이에 한명 천은 3절로 구성된 노래가사를 만들었다. 본디 김용환이 썼던 시는 3절에 배치하고 한명천이1,2절을완성해넣은것이다. 박승직의 부탁을 받은 김용환은 곧 작 곡자인 친구 이시우에게 부탁하여 「눈물 젖은 두만강」이라는 불세출의 명곡은 그 렇게 만들어졌고 그 노래는 김용환의 동 생인 신인가수 김정구에 의해 불리게 되 었다. 탈출한박헌영이‘그리운내님’으로은 유되어 ‘떠난 님’의 안위를 염려하는 심 정과 그의 조속한 귀환을 염원하는 심리 상태가잘묘사되어있다. 이정박헌영선생60주기추모제봉행 사회주의독립운동가에대한재평가이루어져야븣 남한에서도북한에서도외면받았던비운의독립운동가 박성수대종회장이 헌작하고있다. 추모제를집전하고있 는원경스님 ‘우리가 도와줄 테니 함께 잘해보자’라며 함께 어울리며 친목 과 화합을 이루어 온 강원도 태백시지부 지부장·성모회장·청년 회장 이·취임식이 지난 달 26일 태백시 황지동 종친회관 2층 회 의실에서 강원도본부 태근 회장, 재두 前 회장과 임원진, 인근 시군지부 임원진 등이 대거 참석 자리를 빛낸 가운데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이날 행사는 1부 이임식, 2부 취임으로 진행되었으며, 1부 이 임식은 정열 사무국장의 사회로 내빈소개, 요약연혁보고, 유공 자표창, 이임사, 회기 전달 순으로 진행된 가운데 광옥 지부장 은 취임당시 종강삼시를 중심으로 하여 나름대로 보람 있고 훌 륭한 일을 해보겠다고 다짐했으나 건강상 이를 이루지 못하고 임기를 마무리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그동안 동창 고문님을 비 롯한 선대 지부장님의 보살핌과 정열 사무국장 동영 재무국장 등 집행부 임원진 모두에게 감사드리며,공직에 오래 몸담은 경 륜과 사회적으로 덕망을 두루 갖춘 상기 후임지부장의 취임은 우리 종친회 발전에 획기적인 전기가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 는다며후임집행부를적극도와줄것을당부했다. 이어 경혜 성모회장은 우리 모두는 시조 할아버지의 후손으 로 서로를 사랑하고 이해하며 보듬고 살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여성의 본질을 최대한 활용하여 3개 조직을 화합단결 할 수 있 도록 최대한 노력하면 전국시군지부의 모범이 될 것이라고 말 했다. 영화청년회장은 임기 중회원배가운동에최선을다했으나3 0여명 확보에 그쳐 후임 회장을 도와 더 많은 회원을 확보할 수 있도록노력할것을다짐했다. 이임식에 이어 제2부 취임식은 석용 신임사무국장의 사회로 회기이양과 명패 및 신임 집행부 위촉장 수여에 이어 취임하는 회장단의 취임사가 이어진 가운데 상기 지부장은 모든 면에서 부족한 저에게 지부장이라는 중책을 맡겨주신 것은 열심히 하 라는 뜻으로 알고 항상 봉사하는 마음가짐으로 최선을 다하겠 다고 말하고 종친회 구성원 면면을 보면 고령화로 급변하고 있 어 청년들의 육성과 여성들의 참여만이 이를 극복할 수 있다고 강조하고 이를 위해서는 지부장 한 사람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 라 모든 사람이 함께 할 때 가능하다며 적극적인 협조와 지도를 당부하였다. 이어 숙자 성모회장은 성모회원들 비롯한 종친 모두를 사랑 하며 열심히 최선을 다 할 것을 이시간을 빌어 다짐하며, 역대 회장님의노고에감사드리고앞으로도많은협조바라며성모회 융화단결에최선을다할것이라고말했다. 이어 대근 청년회장은 우리는 박씨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또태백이라는공간을공유하면서살아가고있는특수단체이기 에 종친 간 화합과 결속을 통해 지역사회 발전에 당당한 일원으 로자리매김하는것이라고말하고자라나는후손들에게자긍심 을 가질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매사에 솔선수범해야 하는 의무 도 있다며 임기동안 회원배가운동에 전념할 것이라고 말하는 등이같이각각취임포부와취임일성을밝혔다. 이어 태근 강원도 본부 회장과 재두 前 회장의 축사와 격려사 가 이어졌으며, 염동열 지역구 국회의원은 축전을 통해 이취임 을 계기로 더욱 발전 계승하는 종친회로 거듭나기를 기원드린 다고전했다. 태백시지부는 전국의 시군지부 가운데에서도 유례를 찾아 볼 수없는친화력과결속력이엿보인다. 凡 朴氏들이 신라왕손(新羅王孫) 만파 일원(萬派一源)이라 는 기치(旗幟)아래 서로 뿌리를 찾고 종시(宗是)인 숭조,애종, 육영을 실천하기 위하여 1974년 8월 20일 여러 종친들이 삼척읍 황지동 소재 황지극장에서 종친회 명칭을 ‘종우회(宗友會)’라 하여 결성하고, 1993년7월1일 故 규태(圭泰) 회장을 초대지부 장으로 추대하고 임원진을 재구성 사)신라오릉보존회 태백시 지부로 정식 출범한 이래 회관건립과 성모회, 청년회 창립으로 더욱더 활성화를 이루고,매년 정월 세배행사,장학금 전달,5월 경로행사,가을 선조유적탐방 등 굵직한 행사를 통해 종원 모두 에게근원을알게하면서자긍심을가질수있도록하고있는점 이특징이다. 특히 다른 조직에서는 ‘나 아니면 안 된다.’ 그릇된 고정관념 을 찾아 볼 수 있지만 태백시지부는 원로들을 중심으로 내가 도 와줄 테니 우리 함께해보자며 서로를 독려하며 매월 개최되는 월례회에서 부족한 점을 채워주고 있어 친목과 화합을 이루며 선진종회의모습을여실히보여주고있다. 특히 이날 연혁 요약보고를 한 동창 고문은 태백시지부의 살 아있는 전설로 통하면서 젊은 사람들을 지도하는데 몸을 아끼 지않은점은많은사람들이본받아야할것으로보인다. 한편 이날 행사에서 태백시 전 종원으로 이름으로 이임한 광 옥 지부장,경혜 성모회장,영화 청년회장에게는 재직기념패를, 정열 사무국장,동영 재무국장,복제 성모회 총무에게 공로패가 각각 전달되었으며, 취임하는 상기 지부장은 오랜 공직생활과 각종사회단체에 몸을 담을 경력,종친회 사무국장,부회장 등의 이력은종친회를크게활성화시킬것으로보인다. /박종현명예기자(강원태백시지부) 강원태백시지부지부장·성모회장·청년회장합동 이·취임식 태백시지부임원진이이·취임식에참석자리를빛내준내빈과함께하고있다.(앞줄왼쪽부터영화청년회이임회장,광옥이임 지부장,동창고문,태근강 원본부회장,재두前강원본부회장,상기신임지부장,숙자신임 성모회장,대근신임 청년회장,뒷줄무정삼척시지부장,경혜이 임 성모회장,용수 前 지부 장겸전형위원장,석용 사무국장,시원재무국장순) 친목과화합이루며선진종회참모습보여 용수 전형위원장이 이날 신임 회장과 사무국요원, 성모회, 청년회장과 사 무국장에게선임장을각각전달했다.(왼쪽부터석용 사무국장,용수전형위 원장,상기신임지부장,시원재무국장) 성모회숙자회장,상희 사무국장,청년회대근회장,희원청년회사무국장 전북 부안군지부 고암(古巖) 박 백석(朴伯錫·010-3683-5420) 회 장이 1940년 전북 부안군 행안면 삼간리에서 태어나 면(面)별정우 체국장에서 중앙회장까지 지내고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부안군협 의회장을 역임하기 까지 삶의 족 적을 진솔(眞率)하게 쓴 회고록을 냈다. 금년 77세를 맞아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전북 부안중, 이리공고, 서울문리사대, 그리고 동국대학교를 졸업하고 그간 살아온 이런저런 그의 이력을 간결하게 글로써서자신의자화상을잘그려놓았다. 앞 30여쪽에는 화보를 실었고, 제1장 븮만남의 인 면 븯 을 시 작 으 로 제 8 장 븮후 회 없 는 삶 븯까 지 2 3 0 쪽에 걸쳐 술회하고 뒷 부분에 자신에 관한 신 문보도와 연설문, 제언, 그리고 수상(공로·감사 기타)내용을담았다. 회고록은 온통 고암이 후회 없이 살아온 삶의 편린들이 돋보여 잔잔한 감동과 함께 많은 여운을 안겨 준다 /박재순명예기자(전북부안군지부) 전북부안군지부고암박백석회장회고록븮내인생븣 븯발간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