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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7월31일 일요일 7 (제115호) 관향조 종친회 경(璟)은 문과 정언으로 부제학으로 창의(倡義)하여 무적 (茂績)이 많아 장성 창의단(倡義壇)에 배향되었고 성엽(成燁) 은 진도군수이고, 현정(鉉鼎)은 부정(副正), 수원(秀元)은 이 충무공을 따라 진중(陣中)에서 순절하니 임란공신으로 병조참 의에추증되었다. 10世孫 선( 슬)은 선교랑 한성부 주부, 신(愼)은 찰방(察訪), 흔( )과 름(凜)은 모두 통정이며, 순(恂)은 별시문과 훈련원 판관, 등( )은 통정대부 동지중추부사,항(恒)은 통정대부(通 政大夫), 황(惶)은 찰방(察訪), 성(惺)은 문장이 세상에 떨쳐 증(贈) 지평(持平)이며, 응진(應珍)은 무과로 훈련원 주부로 병자호란에 호종(扈從)하여 반양(潘陽)에서 전공을 세우고 순 절하여 어모장군 훈련원 첨정 겸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 11세 손 진영(震榮)은 학행으로 증(贈) 가선대부 중추부사, 진빈(震 彬)은효로 정려(旌閭)가 있고,진걸(震傑)은 무과로 훈련원 주 부로병자호란에수훈(殊勳)이있어좌수사에증직되었다. 창원군파는 이와 같이 많은 후손들이 나라가 위태로울 때는 창의하여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에 큰 공훈을 세워 고흥지역 21 성씨(姓氏) 141명의 임란공신 중 9명을 배출하며 지역의 명문 가로서대대로충과효를이어왔다.후손들은전남고흥군동강 면,대서면등지에집성촌을이루고있다. 파조 휘 인우(麟祐)의 자(字)는 경유(景裕), 호(號)는 초암 (草菴)으로 삼사좌윤공의 6세손이다.고려 39대 충목왕 때 사마 (司馬) 양시(兩試)에 합격하였고, 문무의 재주가 있었는데 고 려 말에 양광도(楊廣道, 경기도지역) 병마절제사 봉익대부 전 법판서 등에 올랐으나 나라일이 날로 잘못되어 감에 이를 보고 직언을아끼지않았으나듣지않아물러나은거하였다. 이때왜구의침입이치열하여조야가황급하게조정에서논의 하기를 박인우가 아니면 능히 섬멸할 수 없다고 함으로 공양왕 원년(1390년)10월 다시 일어나 양광좌우도 수군 도만호가 되어 공을세웠고,공양왕4년임신(壬申,1392)7월16일조선이개국 하매 망복(罔僕, 이조의 臣民이 되지 않음)을 맹세하고 물러나 충청도예산덕방산아래초막을치고살며의리를지켰다. 태조 이성계가 잠룡(潛龍)의 옛 친구이기 때문에 병조판서로 불 렀 으 나 나 가 지 않 고 연 세 번 씩 이 나 초 청 했 으 나 응 하 지 아 니 하였다. 그리고 자손까지도 경계하여 과거에 따르지 않게 하여 신하노릇을하지않은의리를보였다. 아들 형제를 두었으니 장남 영실(榮實)은 사문진사(四門進 仕),차남종실(從實)은이조좌랑에증직되었다. 사문진사공 영실의 아들 제(悌)는 오위부사과 예조참판, 손 자 장손(長孫)의 號는 신재(愼齋), 훈련원첨정, 지경연춘추관 사로 아들 자원(滋元), 자형(滋亨), 자의(滋義), 자정(滋貞)을 두었으나 장남 자원(滋元)은 무후(无后)이고 차남 자형(滋亨) 은 통정대부 병조참의에 증직되고 아들 한우(旱雨), 한주(旱 펄)두어크게번성하게된다. 초암공의 8세 성춘(成春)은 선조임금 때 무과에 올라 선전관 에 등용 어가를 호종하여 만력 48년 광해 12년 12월 3일에 이르 러서야 특별히 통정대부 형조참의 어모장군 훈련원 첨정공 부 공선무원종공신1등의지첩이내렸고아울러부친몽필은가선 대부 공조참판에 추증되고 모친 최씨는 정부인에 추증되는 영 광을 입었다. 후손들은 초암공이 은거했던 충남 예산군 예산읍 간양리를중심으로산재해있다. 파조 정국군의 휘는 위( 쭈), 삼사좌윤공의(三司左尹公 諱 乙 材)8世,아버지는 려조(麗祖)판각문사 보문각 대제학 증 정승 휘 광후(版閣門事 寶文閣 大提學 贈 政丞 諱 光厚)이고 어머니 (母) 정경부인 안동김씨(貞敬夫人 安東金氏)의 장남으로 탄생 (誕生)하였다. 고려 공민왕 때 왕의 신변을 호위하던 숙의군의 임무를 담당 하는 우달치(于達赤)에 등용된 후 상주,김해,영흥 부사(府使) 진주목사, 계림부윤, 경상도순문사, 판자혜부사 지문하부사 겸 대사헌, 문하평리, 참찬문하부사, 양강도 절도사, 서북면 도병 마사, 삼군부친군총융사(三軍府親總戎使)를 역임하며 수많은 전장에서 공을 세웠으며 공양왕2년 忠義君(伯)에 봉해졌으며 이조태조7년(1398년)정국군(靖國君로)으로봉해졌다. 1361년 10월에 홍건적의 2차 침입에 靖國君께서는 南行하는 恭愍王을상주에서부터 피난지 福州(現安東)까지무사히수행 하는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당시 예정에 없던 파천이어 서 수행한 벼슬아치들은 고작 28名 뿐이었다고 하며 그 일행 중 에는일생을통하여가장많은영향을준유망한청년정몽주선 생이한림학사로서王을수행하고있었다. 이때의 인연을 통하여 포은 선생과 靖國君은 믿음과 존경으 로서서로를이해하고일생동안각별한관계에있었다. 尙州에서 福州로 오는 길에 홍수와 찬물 때문에 왕비(노국대 장공주)가 물을 건너지 못함에 안동여인들이 강에 나와 일렬로 서서 등위로 무사히 건너게 하여 이로부터 安東 놋다리밟기가 이어지게되었다. 1377년 5월 김해부사 재직시 왜적선 50척이 기어들어 密城 (現 密陽)을 향하여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가고 뒤이어 후속부 대들이 들이닥친다는 적정을 탐지하고 왜적선들을 포위섬멸하 기 위한 작전을 지휘하여 소탕하였으며. 왜구의 침입관문인 金 海지방을 방어하기 위하여 盆城(金海의 古號)山城을 수축하여 왜구를물리치고백성들을보호하는데효과적으로이용하여그 기록이 盆山 萬丈臺( 분산 만장대)에 靖國君의 金海山城 축성 사적비(사적비제66호)가있다. 왜구의 침입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나라와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였던 놈들의 소굴 쓰시마를 소탕해버 리는것이필요하였다. 이에 고려정부는 1389년 2월 경상도 원수 박위(朴 쭈)의 지휘 하에 화포와 화전을 장비한 100여척의 함선으로 원정함대를 편 성출전하여대승리를거두었다. 또한 이 원정은 고려수군의 위력을 널리 시위한 원정으로서 국제적 의의를 가진다. 쓰시마 원정을 계기로 고려수군에 눌린 왜구들은 감히 덤벼들지 못하였다. 이러하여 우리나라 내륙지 대에대한왜구들의침입은대체로없었다. 將軍의 쓰시마 원정은 우리 민족을 무참히도 괴롭히던 왜구 들을 징벌한 정의의 전쟁으로서 결코 침략전쟁이 아니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또한 우리 5천년 역사상 처음으로 海外에 원정하여승리한전쟁으로그의의가무엇보다크다. 박위 장군이 쓰시마정벌에 사용된 화포는 함포를 가진 군함 으로서는 세계사적 선구이며, 화포를 가지고 적의 선단을 해상 에서 격멸한 사실은 세계해전사상 처음인 것이다. 즉 將軍께서 창제하신 당시의 잠수함은 물론 원초적 수준에 불과하였을 것 으로 보이며 그 후 200년을 지난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에 의 하여드디어꽃을피우게된것이다.해군당국도將軍께서우리 나라 해전사에 이룩하신 빛나는 공적을 기려 1994년 한국형 잠 수함제4호를븮박위함븯이라명명하고그진수식을거행하였다. 이조 태조 7년(1398년) 2월 참찬문하부사로서 경복궁(景福 宮)창건의 총책임을 맡았다.그러나 불행하게도동년 8월제1차 왕자의난(무인난)으로서거하시어완공을보지못하였다. 장군의 위패는 경남 밀양시 무안면 정곡리 신남서원 및 충북 옥천의원덕사,경현사에배향되어있다. 정국군의 아들 기(耆)는 남양부사 가의대부 이조참판 경연참 찬관오위도총부도총관을지내고아버지와함께신남서원에배 향되었고, 아들 대생(大生), 현생(賢生), 인생(仁生), 효생(孝 生)을 두면서 크게 번창하게 되면서 각 지역거주지와 당호(堂 號)로문중을구분한다. 삼남 효생(孝生)의 호는 소암(紹菴), 야은 길재선생 문하에 서 수학하고 출사(出仕)하여 사한논사(詞翰論思,詩와 詞,문장 을 論하다)의 임무에 참여하고 박사(博士)로서 종학(宗學)을 세워 왕가의 자제를 명성을 떨쳤다. 이어 사직(司直)에 이르고 얼마되지않아정2품자헌대부에올랐으나당시정치상황이언 제 변할지 모르는 등 정국이 불안하더니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 의 왕위를 찬탈하고, 단종복위에 많은 대신들이 연루되어 처형 되고 급기야 단종이 영월에서 우해(遇害)함에 공(公)은 사직 (辭職)하여 관(官)의 감시에도 불구하고 3년간 복제(服制)를 입으며 군신간의 예를 다하고, 동굴에서 기거하며 매년 기일에 는 산에 올라가 종일토록 통곡하며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자취 를 감추었다‘ 이는 당시 사대부에게 알지 못하게 함이었으며, 사육신에버금가는충절을보인것이다. 공의 후손들은 공의 관직 사직(司直)을 따 사직공 문중으로 부산지역에거주한다. 사직공의 6대손 인수(仁壽) 경남 김해 대동면 신암에서 부산 학장으로 이거하여 초야(草野)에서 가학(家學)을 연마하는 포 의(布衣)의 선비로 임진왜란을 맞아 의병을 일으켜 동래부사 송상현 휘하에서 동래성을 지키다 34세의 젊은 나이에 순절하 여조봉대부군자감주부에증직되고안락서원에배향되었다. 후손들은 경남 밀양시 무안면을 중심으로 영천, 부산 등지에 큰집성촌을이루고있다. 파 조 휘 석 보 (碩 輔 , 初 諱 는횡)는 대제학(大提學) 광후(光 厚)의 둘째 아들이고, 정국군의 동생이다. 고려우왕(高麗禑王) 때 정국군(靖國君)에 봉해진 형 위( 쭈)와 함께 대마도 정벌에 공을 세우고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구산군(龜山君)에 봉해졌 으며,의흥현(義興縣 : 지금의 군의군 의흥면)을 중심으로 하는 동북 4개면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았다고 한다. 그러 나 그 사 적 이 남 아 있 지 않 아 비 문 의 일 부 를 인 용 해 본 다 . 【선 조 의 묘소에 비갈이 없는 년대가 오래되어 사적을 알지 못하였더 니 이로 인하여 비석에 새길까 하여 즉시 찾아와서 청하는 바입 니다.내가듣고서그사적이발견된것을기이하게여기어살펴 보니 그 종이가 화재를 입어서 온전하지 못하고 혹은 二, 三 자 씩 결손 되었으며, 한 글자에서도 혹은 반쪽이 결손 되었는데 얇은 종이로 표지에 첨부하고자 쓰기를 그 하나는 이르되 교지 (敎旨). 석보(碩輔). 대광보국(大匡고輔國). 숭록대부(崇綠大 夫 ) 겸 영 의 정 자 ( 領 議 政 字 )라 하 고 결 손 되 었 고 박 (朴 ) 의 글 자 하방(하방)에 十二월이라는 세 글자가 있고 어보(御寶)의 반쪽 만 남았다. 그 하나는 또 이르되 교지(敎旨)본조 공신(本朝功 臣) 영의정신(領議政臣) 박석보(朴碩輔) 구산군(龜山君)이라 하고 하방(下方)에 七年己라는 세 글자가 있고 어보의 흔적은 한 결에 반만 남았다. 그 하나는 이르되 유지 금이왜란후(有旨 今爾倭亂後) 본조 공신(本朝功臣) 박석보 구산군(朴碩輔 龜山 君) 봉후지자(封侯旨者)라 했는데 지(旨)의 글자는 윗 부분은 결손되었고 유(有)의 글자 하방(下方)에 홍무 이십구년병(洪 武 貳拾玖年丙) 二十 九日이라고 섰는데 병(丙)의 글자 아래에 三, 四자가 결손 되었으며 어보의 흔적은 완연하였으나 한결에 서 三분의 一이 결손되었는데 종이는 망가지고 누르며 먹은 물 에 잠긴 듯 하고 불탄 흔적은 좀벌레가 먹은 것 같고 구겨져서 접혀졌다.】 구산군의 아들 인해(仁海)가 조선초(朝鮮初)에 안동 판관 (安東判官)을 지내 가문(家門)을 대표하는 인물(人物)이 되었 다. 슬하에 3남 1녀를 낳아 가문을 크게 중홍시켰으며, 조선 선 조 인목왕후(宣祖仁穆王后),효종 인선왕후(孝宗仁宣王后)는 사위 윤종문 외손이며, 손자(孫子) 원의(原義)는 조산대부(朝 선大夫)로주부(主簿)를지냈다. 증손 공조좌랑(工曹佐郞) 만룡(萬龍)의 아들 간(艮)이 세종 조에 통정대부(通政大夫)로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지냈고,그 의 아우 진(震)은공조 판서(工曹判書)에올랐다. 8세 경장(景章)은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한 망우당(忘憂 堂) 곽재우(郭再祐)와 같이 화왕산성(火旺山城)수비에 공을 세워 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에 올랐으며, 그의 아우 경문(景 文)은선교랑(宣敎郞)으로현감(縣監)을지냈다. 구산군(휘 천)의 차남 인완(仁琓)은 주부(主簿)를 역임하였 으며 도산정파(道山亭派), 6세에 이르러 번성하여 조선조에 군 수를 지낸 유창(惟昌)은 행정파(杏亭派), 조산대부로 사간원 정언을 지낸 유녕(惟寧)은 이정파(梨亭派파), 현감을 지낸 웅 언(雄彦)은 옥천파(沃川派),호군을 지낸 수창(壽昌)은 신녕파 (新寧派), 장사령으로 봉사를 역임한 하령(遐齡)은 와동파(瓦 洞派), 어모장군에 이른 형지(亨枝)는 두동파(杜洞派), 의장 (義長)은 청송파(靑松派),참의를 역임한 장연(長淵)은 경주파 (慶州派)로 나누어 세계를 이어왔다. 또, 이정공 유녕의 장남 승손(承孫)은 통덕랑에 올랐으며 차 남 흥손(興孫)은 효력부위(效力副尉)에 이르렀으며 성동파(星 洞派)로,현손대준(大儁)죽정파(竹亭派)로분파되었다. 그 외 인물(人物)로는 첨정(僉正)을 지내고 이등공신(二等 功臣)에 책록된 봉상(鳳祥)과 효자(孝子)로 이름난 문엄(文 淹)이 유명했으며 예조 정랑(禮曹正郞)을 지낸 화덕(和德)은 경 학 (經 學 ) 에 능 통 했 고 효 행 (孝 行 ) 이 지 극 하 여 세 인 의 칭 송 을 받았다. 후손들은경북군위군의흥면을중심으로산재해있다. 파조는 삼사좌윤공 휘 을재(乙材)의 현손(玄孫)으로 고려조 에 광록대부(光祿大夫)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오른 휘 원 의(元義, 밀성대군 12세)이다. 이부상서(吏部尙書) 휘 준의 아 들로 아홉 형제 중 여섯째로 나라에 큰 공훈을 세워 태안부원군 (泰安府院君)에 봉군(封君)되었으며 슬하에 아들이 없어 백형 인 세흥군(世興君) 원효(元孝, 좌정승을 지냄)의 아들 희문(喜 文)을사자(嗣子)로맞아대를잇게하였다. 아들 희문(喜文)은 고려조에 좌정승을 지내고 태안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손자 보규(甫圭)가 봉익대부 판도판서(奉翊大夫 版圖判書)를 역임하였다. 또 보규의 아들 학(虐)은 신호위보승 중랑장(神虎衛保勝中郞將)을 손자 유와 증손 인추는 상장군 (上將軍)을 지내며 가세를 일으켰다. 상장군 인추(仁抽, 6世)의 아들 문거(文巨)는 문과 장원으로 봉상대부(奉常大夫)로 총랑(摠郞)을 거쳐 지곡주사(知谷州 事)를 역임하고 홍건적을 토벌하다 순절하여 삼중대광 문하시 중평장사(三重大匡門下侍中) 순성부원군(蓴城府院君)에 봉해 졌으며 시호는 충장공(忠莊公)이다. 그의 아들 비(斐, 8世)는 고려 공민왕 때 문과 二人으로 급제하여 봉직랑(奉直郞) 고흥 감무(高興監務) 겸 권농병마단련판관(勸農兵馬團鍊判官)을 지내고 고려가 망하자 처자를 데리고 송경에서 충청도 청산현 동면 대동리(현 충북 옥천군 청산면 법화리)로 옮겨 은거했으 며 조선 태조(太祖)가 신창(新昌), 예산(禮山) 현감(縣監)에 임명하고 불렀으나 끝내 거절하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 를지켰다. 조선조에 감무공(監務公) 비(斐)의 아들 상덕(尙德, 9世)은 통훈대부(通訓大夫)로 통례원봉례(通禮院奉禮)를, 상덕의 아 들 중 자유(10世)는 승의랑(承議郞)김해교수(金海敎授),둘째 자주는훈련원판사(訓練院判事)를 역임했다. 자유의 아들 인(11世)의 字 는 자복(自馥) 號는 호은(湖隱) 으로 종사랑(從仕郞)이다. 연산군이 상기(喪期)를 짧게 하여 사람을 시켜 통하게 하였으나 공께서는 아버지 상을 당해 삼년 상제를 행하였으니 중종대왕 때 사실이 알려져 정려가 내려졌 다.둘째온은장사랑(將仕郞)에올랐다. 인의 아들 세훈(世勳, 12世)은 장사랑(將仕郞) 안릉참봉(安 陵參奉)으로 증직은 통정대부 공조참의요, 세근(世勤)은 성균 생원,세적(世勣)은참봉(參奉)이다. 세훈의 손자 민(敏,청풍군수 안방의 아들)의 字는 행원(行 遠) 호는 능허(凌虛)로 한강 정구 선생의 문인이다. 스승 정구 선생은그의기국(器局)이 충후함을인정하여제자들에게 그를 스승으로 삼을 것을 말하고는 하였다. 그 뒤 장현광(張顯光)을 만 나 역 리 (易 理 )를 의 논 할 때 장 현 광 은 그 의 높 은 학 문 에 감 탄 하였다. 또한 정인홍을 만나보고 스승인 정구에게 정인홍을 멀 리 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모두 그의 말을 듣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그를 못 마땅이 여기게 되었다.인조반정후 진사가 되었 고, 이원익이 천거하였으나 등용되지 못하였고, 1627년 정묘호 란이 일어나자 주군(州郡)이 창의하여 그를 강우의병장(江右 義兵將)으로 추대하였다. 이에 의병을 거느리고 상주에 이르렀 으나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되돌아갔다. 기자헌(奇 自獻)이 그에게 시 한수를 지어 주었는데 “천지에 눈보라치니 모든 풀은 시들었는데 그대의 마음은 대나무같이 푸르도다.”라 고 하여 그의 굳은 절의를 나타냈다. 또 그는 효성또한 지극했 다. 어려서부터 병이 있어도 부모에게는 숨기며 치료하고 아버 지께서 풍비(風痺)가 걸려있음에 지극히 간호하였다. 대를 이 어 효도하고 충성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태안박씨는 충효로 유명해지게 되었다. 사후에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고, 진 주 정강서원과 정산 향현사에 배향 되었으며, 능허집(4권2책) 이후에간행되었다. 세적의 아들 안도(字는 眞卿, 13세)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 어나자 동향의 선비인 유함, 이욱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자 많은 사람들이 합세하였다. 모두가 그를 대장으로 추대하여 하 였지만 유함에게 미루고 자신은 종사관이 되어 군무를 정돈하 며, 여러 곳으로 옮겨 다니면서 군의 사기를 높였다. 이듬해 적 들이 서울에서 철수하여 남하하면서 많은 병력을 진주성으로 집결하여 지난해의 진주성 참패를 복수하려하였다. 그는 경상 우도 병마절도사 최경회,충청병사 황진 등 여러 장군등과 함께 성을 수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10일간의 대격전 끝에 성리 함락되자, 최경회 등 여러 장군들과 함께 남강에 몸을 던져 순 국하였다.선무원종공신에추록되고 호조좌랑에 증직되고최경 회,김천일등과함께진주창렬사에배향되었다. 능허공의 증손 태무(17世,字는 春卿,號 西溪,황해도 수군절 도사昌潤의아들)는서계하정의문인으로19세에향시의장원 으로 급제하였으나 그 일이 시험관이 사정을 둠으로써 이루어 진 일임을 알고는 시권(試券)을 받아 불살라버렸다. 시험관이 어떤 이유에서 그의 시권을 찾아 장원에 올려놓았는지 분명하 지 않지만 서계는 이 사실을 매우 부끄럽게 생각해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숙종22년(1696)부터 진주 남내동 지계 서쪽에 서계서 실을 짓고 이곳에서 독서를 업으로 삼았다.중년에 부친의 권유 로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이인좌 드의 무신난변에 토적(討賊) 에 양곡 수백석을 군량으로 지원하고 가정(家丁) 100여명을 동 원하여 창의에 힘썼다. 이의 공으로 포상하고자 하였으나 사양 하였고 수직(壽職)의 벼슬도 거절하였다. 만년에 이르러서는 믿고 따르는 이가 날로 많아지자 이에 ‘여씨향약(呂氏鄕約)’을 증손(增損)하고, 퇴계의 향약까지 참고해 새로이 ‘동약(洞約) 을 만들어 인근에 실시케 하면서 편술(編述)에 진력해 많은 저 술을남겼다. 서계공의 증손 지서(旨瑞, 字 國禎 號 訥菴, 20世)는 5세때부 터 조부인 연재공(蓮齋公,휘 挺元)에게서 공부를 배웠고 또 종 숙인 석포공(石浦公, 휘 맹기)에게서도 성리학등을 착실히 공 부했다. 9세때 부친(玉山公 受絅))상을 당했는데, 상을 치르는 법도와 예(禮)가 일발 성인과 같았으며 아버지를 따라 자결하 려는 어머니를 설득하여 음식을 들게 하고 병을 낫게 하여 천수 를 다 누리도록 하기도 하였다. 향시에는 합격하였으나 회시에 는 합격하지 못하였고 이때,과거가 사람에게 누를 끼친다고 생 각하여과거를포기하고마음을수양하는공부에전념하였다.2 1세 때실학자인 순암안정복(順菴安鼎福)을광주의광릉산속 으로 찾아가 심경(心經)중 의문나는 내용을 질문하였다. 1799 년 정조가 영남의 선현들의 업적을 편찬하도록 하였는데 유림 에서네사람을추천하여그일을관장하도록하였다.이때그는 당시 상주에 살던 입재 정종로와 함께 추천되었다. 1811년 홍경 래가 난을 일으키자 울분을 이기지 못하여 도내 각지의 선비들 에게 보내는 격문을 지어 창의하려고 했었는데 난이 진압되었 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만 두었다.벼슬하지 않고 초야에서 지내 며 지역의 유림일을 주도적으로 관장했으며, 진주 정강서원에 추향(追享)되었다. 이밖에도 태안박씨는 조선조에서도 많은 석학을 배출하며 명 문가의 전통을 이었으며 현세에도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으며, 후손들은 충북 옥천군, 경남 진주, 전북 정읍 등에 집성촌을 이 룬다. 뱚▶6면에서계속 뱚초암공파(草菴公派) 창절사(彰節祠)-충남예산군예산읍간양리 초암공을 비롯 초암공의 제향 후에는 동서 종향으로 배향된 아들 사문진사 휘영실, 손자예조참판 휘제, 증손 지경연춘추관사휘 장손, 현손 병조참의 자형, 오대손 성균진사 휘 한주 公의 위패가 봉안되었으며, 앞에 초암공의 불사이군의정신을기리기위해불사이군비를세웠다. 초암공묘소-예산군예산음신예원리산15 뱚정국군파(靖國君派) 신남서원-경남 밀양시 무안면 정곡리. 정국군 박위장군과 그의 아들 기(耆) 의위패를봉안하고있다. 박위함, 1994년 한국형 잠수함 제 4호를 븮박위함븯이라 명명하고 그 진수식을 거 행하였다. 박위장군영정 뱚구산군파(龜山君派) 무검재 -경북 군위군의흥면수복리 뱚태안군파(泰安君派) 혜덕당(惠德堂)충북 옥천군청산면한곡리 뱚지파(支派)世系및집성촌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