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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7월31일 일요일 4 (제115호) 관향조 종친회 大同譜編纂委員會및編輯委員 △위원장박래식(010-7169-9140) △상근부위원장박상범(016-481-6552,국당공파) △부위원장 문림랑공파박진식(010-2290-1889,대구시)/난계공파박진하(010-4907-6936,옥천읍) 이요당공파박희삼(010-5402-1538,대전) △ 편 집위 원 ○문림랑공파박영식(010-4204-6565,제주시)/박남근(010-2079-6972,광주광역시) /박영동(010-2838-8384,대구)/박태암(010-3121-0635,달성군)/박태인(010-9310-4842, 진 주 시 ) ○난계공파박원하(적명 임용010-3203-3172,인천)/박팔만(010-4562-1488,여수) /박희태(010-5484-9849,옥천읍)/박종철(010-5546-3333,구미)/박희문(010-2877-0757,대구) ○국당공파박희원(010-4122-0127,영동읍)/박근용(010-5568-1564,영동읍)/박세열(016-468-3735,황간면) /박재용(010-4841-0412,영동읍)/박희조(010-7756-8199,거창읍)/박종운(011-526-5648,대구) ○이요당공파박희복(010-3412-6903,심천면)/박의부(010-2869-2173,대전) /박희선(010-2423-5644,김천)/박상용(010-4456-8055,대전)/박세종(010-8108-2304,대구) 密陽朴氏僕射公派大同譜編纂委員會 밀양박씨복야공파(僕射公派 ) 대동보 편찬 안내 밀양박씨 복야공파 대종친회에서 대동보를 발간하기로 결정하였기에 공고하오 니 단기간내에수단이정비되어우수하고귀중한족보가편찬되어가보(家寶)로보 존 될수있도록협조를부탁드립니다. 특히 족보상식에 밝은 어른들이 작고하면서 이번대동보가 마지막 족보가 될 우려 가있어종원여러분들의적극적인참여로누락되는종친이없도록하여주시기 바 랍니다. ◇발행기간:2015년 12월~2017년 6월30일까지 ◇발행기준:1990년(庚午譜),1979년(己未譜) ◇수단기간:2015년 12월부터 2016년12월31일까지 ◇수단접수처:충북영동군영동읍계산로2길4.종친회사무실(영동세무서앞) ◇입금은행:농협301-0181-4871-11 ◇예금주:복야공파대종회 문의043-743-3015 FAX043-744-3015 사무국장박원용010-5487-2228 ◇인쇄처대전회상사 밀양박씨 강원 옥계문중은 돈수공(遯 쑴公,휘 芝 鳳)이 화를 피해 삼척으로 아들 눌암공(휘 啓立)과 함께 1632년(인조 壬申)에 강원도 삼척시 소달산 (소달면, 현 도계읍) 아래로 이거 한 이후 훈도로 후학양성에 매진하다 1643년(癸未) 돈수공이, 10 년후 1653년(癸巳) 숙부인 남원양씨께서 하세(下 世)하니 아들 눌암공은 예법에 어긋남이 없이 3년 상(喪)을 치르고 난 후 1658년 강릉 옥계면 북동으 로 이거해 현재 358년에 이르렀다. 입향조 눌암공의 휘는 계립(啓立) 자(子)는 성 천(性天), 1620년(광해12) 2월 29일 전북 김제 흥 복동에서 태어났다. 총명하고 재주가 뛰어났으며, 아버지 돈수공과 어머니 남원양씨를 모시고 소달 산 아래로 이거하여 어려운 살림에도 부모님 섬김 에소홀함이없었다. 25세에 아버지 돈수공이 돌아가시자 몸이 심하 게 여위고 수척해질 정도로 슬퍼한 것이 제도에 지 나칠 정도로 하였고, 묘 자리를 아직 정하지 못해 밤낮을 울부짖으니 밤에 꿈속에서 노인이 나타나 마을뒤두수곡에쓸만한묘가있다고손짓을하여 새벽에 일어나 가보니 그곳에 사슴 한 마리가 누워 사람을 바라보고 서서히 일어나 간 즉, 사슴 누워 있는 곳에 가보니 눈이 녹을 정도로 따뜻하였기에 인하여 그 자리를 묘자리로 얻게 되었으니 어찌 정 성과 공경이 사슴을 감동시키는 효도가 아니겠는 가.10년후어머니초상을만나서염을하는절차에 몸이 수척하도록 서러워하는 지극함이 이전 아버 지 초상 때와 같았고 아버지 묘 옆에 부장(附葬)을 하였다. 5년후 지금의 옥계 북동으로 이거해서는 농사를 지으며 목은 이색이 지은 정재기를 읽으며 선조의 유훈을 되새기며 아버지 돈수공의 뒤를 이어 후학 을 가르치는데 매진하다 숙종 癸亥(1683년)향년 6 4세의 일기로 운명(殞命)하였으며, 순조 정해(丁 亥, 1707년) 효행으로 통훈대부 군자감정(通訓大 夫軍資監正,정3품)에추증되었다. 눌암공의 상계를 보면 17대조 사문진공의 휘는 원(元)으로 고려 사문진사이고 밀성대군의 9대손 으 로 밀 성 대 군 후 1 2 중 조 중 의 한 분 이 다 . 1 0 대 조 정 재공의 휘는 의중(宜中)으로 두문동 72현의 한분 으로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켰다. 초휘(初諱)는 실 (實), 字는 자허(子虛)요, 諡號는 문경공(文敬公), 아호(雅號)는 정재(貞齋)이다. 공민왕 11년 壬寅 (1362) 10月에 문과장원으로 발탁되어 전의 직장 헌납 사예를 거쳐 예문관제학을 역임하였다. 이때 공민왕 16年 丁未(1367)년 성균관이 재건되어 이 색(李穡)이 大司成이 되어 경학에 통달한 정몽주 (鄭夢周) 김구용(金九容) 박상충(朴尙衷) 박의중 (朴宜中) 이숭인(李崇仁) 등에게 성균관 교관을 겸직(兼職)시키었다. 그때 儒生들의 경학질의(經 學質疑)에 對하여 정밀하고 소상한 해답은 정재 先 生이으뜸이었다고한다. 고려 우왕(禑)14년 戊辰(1388)5月에 先生이 國 書인 철영위 철폐(鐵嶺衛 撤廢)에 관한 진정전(陳 情箋)을 받들고 명나라에 들어갈 때 행장(行裝)이 검소하여 요동진무(遼東鎭撫)서현이 先生의 청고 함에 감복하여 이 사실을 예부에 告하니 황제는 듣 고 국빈례(國賓禮)로 대우하고 철령위문제(鐵嶺 衛問題)를 잠재웠다. 이를 두고 陽村 권근(權近) 先生은 先生을 祭祀하는 글에 봉사위난(奉使危難) 악절불투(握節不逾) 승수제칙(承受帝勅) 복아판 도(復我版圖) 철령이북(鐵嶺以北) 위국오구(爲國 졸區) 공대불벌(功大不伐) 안어퇴휴(安於退休) 라.(나라가 위급할 때 사신으로 가서 절개를 더럽 히지 않았으며 황제 칙서를 받들어 우리나라에 판 도를 회복하여 철령이북은 나라의 요지로다 공로 가 크고 중해도 자랑하지 않고 나아가고 물러감을 편하게 하셨도다)하였고 大司成 김복한(金福漢) 이 撰한 신도비명에서 수침철령립위의(遂寢鐵嶺 立衛議)하고 려조봉강지득완(麗朝封彊之得完)은 선생지력야(先生之力也)라.(드디어 철령위 세우 는 일 을 그 만 두 게 하 고 고 려 의 강 토 를 완 전 하 게 함 은 선생의 힘이라 하였다)하였으며 星湖 이익(李 瀷)先生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忠臣忠臣이여 박의중(朴宜中)先生이 아니었다면 고려의 령토가 어찌완전하였으랴」라고적었다. 고려 允王 元年 己巳(1389)에 추성보조공신(推 誠補祚功臣)으로 책봉되었고, 고려 간성왕(杆城 王)二年 庚午(1390)正月에 예문관제학(藝文館提 學)겸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종2품)가 되었다. 후에 예문관 제학 겸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었다 가 곧 이성계(李成桂)의 혁명으로 고려는 망하고 이씨혁정당시(李氏 革正當時) 즉 1392年 10月에 杜門 洞에 들어갔다가 지병이 있어 숙부 인 간의대부公(仁翊)과 더불어 전 라북도 김제로 퇴둔하여 후학을 가르치시며 두문 자정(杜門自靖) 하니 조선조 태종이 사방으로 찾 아 검교참찬의정부사(檢校參贊 議政府事)로 여러 번 불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고 불사이군(不事二 君)의忠節을지켰다. 정재공은 아들 5형제를 두었다. 경문(景文), 경 무(景武),경빈(景贇),연(衍),행(行)으로 셋째 경 빈은문과급제하여이조참의이고이조판서에추증 되고 밀원군(密原君)에 봉(封)해지진 눌암공의 직 계선조이다. 옥계문중은 입향조 계립(啓立)의 호(號) 눌암 (訥菴)을 다 눌암공파라 한다. 눌암공의 아들 유봉 (裕奉) 유봉의 초휘(初諱)는 유복(維馥), 字는 혜 곤(惠昆), 호(號)는 척당( 홋堂),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 공조참의에 증직되고 아들 연( ), 명 (蓂), 혜(蕙), 수방(守邦), 순(蕣) 등 5형제를 두면 서 크게 번성하여 장남 연의 號는 경와(耕窩) 수직 으로가선대부병조참판에증직되고후손들은경와 공파(耕窩公派)라 하고, 차남 명의 호(號)는 가헌 (稼軒)으로 가헌공파, 삼남 혜의 호는 목계(牧溪) 라하여목계공파,사남수방의호는서곡(鋤谷),수 직으로 가선대부한성부좌윤에 증직되고 후손들은 서곡공파,오남 순의 호는 운포(耘圃),수직으로 가 선대부동지중추부사이고 운포공파로 세계를 잇고 있다. 효자집안에 효자난다고 하였다. 눌암공이 효행 으로 통훈대부 군자감정에 증직되었듯 후손들 또 한 효자 효부 열녀 열부가 줄을 이어 충신,효부,열 부, 효열부, 효자 정려가 내려져 비각이 있었으나 퇴락하여 준공한 2004년 10월 덕우재(德佑齋)를 중수하고 덕우재로 편액을 옮겨 걸어 그 사실을 알 아본다. 눌암공의 6대손 광학(光鶴)의 改諱는 광학(光 學)字는 학노(學魯),호는 경운(耕雲)으로 가선대 부동지충추부사춘빈(春彬)의아들이다. 어리적부터 대범하여 용력이 뛰어났다. 1780년 (정조4) 7월 13일(己丑) 대궐(시민당, 時敏堂)에 불이 났다. 아무도 접근하지 못할 때 公이 50근이 나가는 서까래를 메고 들어가 담장에 걸쳐 놓고 이 를 이용해 들어가 화재를 진압하였다. 이후 어머니 가 병환이 있어 퇴직하여 돌아와 농사를 짓고 어머 니를 지극정성으로 봉양하여 충신효자라 칭송이 자자했다. 암행어사가 이 소식을 듣고 임금에게 올 려 임금에게는 충성을 부모에게는 효도를 다하는 효자로 확인되어 통정대부 병조참의에 추증되었 다. 공(公)은 강직하고 깨끗한 지조가 있었고 충성 과 효를 다했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은 감동하지 않 은사람이없었다. (註) 시민당(時敏堂)은 세자의 외당(外堂)으로서 청정과 조참을행하는곳으로 화재이후흉년등의이유로 저승전과 마찬가지로 다시 중건되지 못하였다. 대신하여 정조 6년 세 자궁으로서븮중희당븯을새로 세웠다. 박시언의 초휘는 시연(時淵)개휘는 시언(時彦) 으로 字는 정도(正道)이다. 눌헌공의 6대손으으로 경주김씨는그의부인이다. 경주김씨는 어려서부터 친정 부모님 섬기기를 지극정성으로하였으며시집오기전부터효녀로칭 송이 자자했다. 시집 온 뒤에 시부모를 섬길 때는 더더욱 공경한 마음을 쏟았고 맛있는 음식을 먼저 드리고 아침저녁으로 구들을 살피며 추위 여부를 묻는 문안인사를 빠뜨리지 않는 등 며느리로서 도 리를다했다. 시부모께서 40리 먼 데 있는 종가를 찾아 길을 나섰는데 마침 눈이 많이 와 길이 막혀 돌아오지 못해 오는 도중에 누워버렸다. 이에 그 다음날 비 로소 소식을 듣고 며느리가 직접 가서 시아버지를 찾아 업고 집으로 돌아와 사경을 헤매는 시아버지 를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약을 구해 4년 동안 극진히 간호했다. 그러나 치료 도중 등창이 나 그 부위에서 벌레가 나오게 되었는데 경주김씨는 상 처부위를 입으로 빨아 8년이란 세월을 더 살도록 하여 도합 12년을 더 살고 결국 시아버지는 세상을 떠, 애통해 하며 3년간 영위를 모시며 살았을때와 똑 같 이 하 였 다 . 이 어찌 하늘이 내린 효부가 아니겠는가.이에 고 을 주민들이 아름다운 행적을 묻혀버지지 않도록 하려고 그 사실을 들추어서 감영에 아뢰어 포양을 받았다. 어려서부터 밝고 심성이 곧아 부모에 효도하는 효녀이다. 성숙하여 눌암공의 8세 광년(光年)에게 시집왔는데 남편 광년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병을 얻어 10년간 극진히 간호하였다. 하늘에 빌며 대신 데려갈 것을 애원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 이 돌아가심에 아녀자의 몸으로 3년의 시묘살이를 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유복자를 정성스럽게 양육 하였으나 결국 아이마저 세상을 떠 세인들이 안타 깝게여겼다. 충신효자의 가문에서 태어나 시집와 시부모님을 섬길 때 매우 조심조심 하였고,서방님을 공경스런 마음으로섬겨며느리와아내의도리를다했다. 그 뒤 을 묘 년 에 남 편 이 희 귀 한 병 을 얻 어 살 아 있 는꿩고기를먹고싶어해겨울에꿩을잡기란매우 어려워 마음이 타들어가고 초초해 하늘 에 축원하 였는데 다음날 아침에 갑자기 꿩 한마리가 날아들 어 닭 장안에 들어가 그 꿩을 잡아 봉양해 병세가 좋아졌으나 재발하여 누차 약을 써도 효험이 없어 하늘에빌며천한목숨을대신잡아가라며100번이 이상 축원하였으나 운명 직전에 이르러 단지하여 피를흘려주어운명했던목숨이다시살아나2일을 연명토록하였다. 부인께서 피눈물을 흘리며 서방님 뒤를 따라 죽 으려 했으나 시부모가 붙잡고 죽어서는 안 된다며 “만약 죽으면 늙은이들이 누굴 의지 하겠느냐”는 간곡한 당부에 부득이 죽지 못하고 생명을 부지하 면서조석으로상식을하고통곡하였다. 부모님 봉양에 정성을 다하고 남편의 산소를 매 삭망때 마다 성묘하는 등 이를 비바람에도 멈추지 않았다. 이에 이웃마을사람들도 감동해하지 않은 사람이없었다. 특히 남편과 시부모가 돌아가신 14년 동안 머리 빗질도하지않으며애도했다. 산골짜기에서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 이와 같이 특이한 열행이 있었으니 이런 사실을 발표해야 되 겠기에열부정려를세웠다. 시부모님을 섬길 때 효성이 지극하였다. 눌암공 의 10대손 구호(龜鎬)와 혼인하였으나 얼마 지나 지 않아 남편이 병환을 만나 조석으로 하늘에 기도 하며 서방님 대신 나를 잡아가주세요라고 축원하 였다. 그러나 남편이 돌아가시자 3년 동안 피눈물 을 흘 렸 으 며 , 그 뒤 시 부 모 를 섬 길 때 이 전 보 다 몇 배더효성을쏟았다. 그리고 유복자를 잘 가르쳐 남편의 뒤를(문호) 잇게하여그사실을손자재건이기록을들추어정 려하게 되었다. 손자 재건 또한 효자로 동몽교관에 증직되었다. 형제간 침중하고 말이 없이 차분하게 성장하였 다.어버이를섬길때효성이지극했기에많은사람 들의흠모를받았다. 시골에 살면서 어머니 김씨가 담이 끓어 병세가 깊어 그동안 간호를 잘했고 어버이 뜻에 순종을 해 의원이 생 목혈을 마시면 살아날 것이다는 말에 하 느님에게 밤낮으로 축원했는데 1892년(壬辰)12월 이다 때마침 큰 눈이 내려 오고갈 수 없었는데 갑자기 사슴두마리가 내려와 이를 잡아 피를 빼 마시도록 하고고기는요리하여드리고뼈는푹고아드렸다. 이후 병세가 좋아져 모두가 그 소식을 듣고 하늘이 내린 큰 효자라 칭찬하고 옛날 왕상과 맹종주에 버 금가는 효행이라 칭찬하였다. 이에 암행어사가 추 천하여 극찬의 비답을 받았으니 누가 흠모하지 않 으랴. 집/성/촌/탐/방 밀양박씨사문진사공파강원옥계문 중 강원도동해시옥계면북동,재사(齋舍)덕우재(德佑齋)와정려(旌閭) 덕우재-1935년(乙亥)3월에최초건립하였다. 입향조눌암공신도비 뱚△충신(忠臣) 박광학(朴光鶴) 뱚△효부박시연의처(朴時彦妻) 경주김씨(慶州金氏) 뱚△열부박광년의처연일정씨 뱚△열부박용하의처연안김씨 뱚△효열부장씨박구호부인 뱚△효자박래수븡래익형제 CMYK